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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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동북아의 새로운 패권주의를 경계한다

 

 

지난호 머리말에서 올해를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원년으로 삼자는 본지의 희망 섞인 제안은 지금 정세에서는 일단 무색해졌다.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 대립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터에 지난 2월 19일 타이완해협 문제해결을 공동 전략목표에 포함시킨 미일 안보협의회의 선언은 동북아에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타이완의 독립 추구에 대해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하겠다는 ‘반국가분열법’으로 맞섰고, 노무현 대통령은 강화된 미일동맹의 중국 견제구도에 한국이 휘말리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세계전략하에 동북아 역내의 일본과 중국의 갈등으로 촉발된 정세변화에 대한 대응일 텐데, 다만 그 역할을 어떤 내용으로 정립하고 어떤 방법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인가는 진지하게 숙고할 과제이다. 물론 동북아에서 미국을 배제하는 논리는 그 자체로 비현실적일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정립을 기하지 않고는, 그리고 남북긴장을 크게 완화시키지 않고서는 역내 균형자로서의 역할에 필요한 힘을 얻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미국이 역외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면서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대북강경책을 구사하고 있는 마당에 단기적으로 여러 난관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다. 하지만 한·중·일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 중국과 불필요하게 대립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현싯점에서 한국이 대북 선제공격 불사를 공언하는 미국 네오콘의 패권주의가 유도하는 군사적 갈등의 한편에 설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 균형자 역할이 19세기 영국이 대륙 바깥에서 대륙국가들의 분열을 활용하면서 취한 패권주의적 세력균형자 역할과는 정반대인만큼, 힘이 막강해야 균형자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남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강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소국도 아닌 나라로서, 평화가 절체절명의 과제인데다 민주주의적 활력을 갖고 있는 한국이 반패권주의적 균형자로서 역내 평화와 민주주의의 촉진자를 자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올해 또다시 불거진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한국의 강력한 반발과 중국의 대대적인 반일시위를 불러일으키면서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역사는 동북아 3국간의 총성없는 전쟁터가 되어 ‘역사전쟁’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실정이다. 하지만 ‘역사전쟁’이란 용어는 일리가 있는 수사인 동시에 사태의 본질을 각국 민족주의간 충돌의 문제로 흐리고 배후의 패권주의를 가리는 효과를 갖기도 한다. 따라서 과거역사 인식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은 민족주의적 갈등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패권주의와의 싸움임을 분명히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배에 관한 반성을 회피하는 역사왜곡은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자국의 역사왜곡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일본인과 맺는 반패권주의 연대는 마땅히 우리 내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역사교과서 사태가 반복해 터질 때마다 ‘국사교육 강화’ 같은 낯익은 국가주의 방식으로 맞서는 우리 사회와 역사학계의 대응도 이제 반성할 때가 되었다. 게다가 후소오샤(扶桑社) 역사교과서 문제가 획일적인 교육만 받아온 한국인들이 다양한 역사인식을 허용하는 일본의 교과서 검인정 제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는 일부 일본인들의 주장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교묘한 술수일지라도, 그 술수조차 우리 내부의 성찰을 유도하는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국사교육을 국민주체성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방편으로 삼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우리의 현행 국정 역사교과서 체제는 어쩔 수 없이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 ‘국사(國史)보안법’이라 해야 할 정신적 질곡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 한국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다. 이제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보듯이 중화주의가 패권주의의 기미를 보이는 터에 이들 나라의 반패권주의 세력과의 실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그 제도의 폐지는 더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이같은 한일의 문화적 연대가 결실을 맺어 만약 일본이 20세기의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고 그에 부응하는 실천을 행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일본은 사실상 근대 세계사를 점철한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철저히 반성하는 나라가 될 텐데, 말하자면 전쟁범죄와 제국주의의 이중가해자였던 일본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반파시즘 전선의 주역이긴 하지만 제국주의 가해자였던 유럽 나라들과 베트남 침략전쟁의 주역인 미국에 가하는 문화적 충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동북아 역내에 긴장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중화주의를 견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일본이 그 주요 구성원이 될 동아시아공동체가 세계체제의 진보적 변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평화와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이 반패권주의에 동참하는 것,과연 그것을 꿈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작년 여름호의 소설비평 특집에 이어 이번호 특집은 시와 시비평의 현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하였다. 앞으로도 우리 문학의 주요 현안과 핵심 쟁점에 성실하게 대응하겠다는 창비의 각오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집 제목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에서 ‘갈림길’이란 표현은 현재 한국 시와 시비평이 모종의 어려운 기로에 직면해 있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요즘 한국 시의 흐름에서 전통적인 서정적 경향과 ‘반’서정 혹은 ‘다른’ 서정을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으로 갈라지는 길목을 확인한다는 뜻도 담고자 했다. 기조논문 격인 최원식의 글은 수준높은 독자층의 급감에 직면한 한국 시의 위기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시비평의 위기와 맞물려 있음을 지적하면서 최근 시비평의 허실을 날카롭게 평가한다. 여기서 특히 시 텍스트를 하나의 균일한 텍스트로 ‘단수화’하는 경향에 대한 경계는 음미할 만하다. 나희덕은 유홍준, 김태정, 김선우, 문태준의 시에 아로새겨진 각기 다른 문양과 성격의 ‘기억’과 ‘자연’을 파헤침으로써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독특한 서정성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임홍배는 80년대 민중시인 김진경, 하종오, 백무산의 최근 시들에 나타나는 ‘사회생태적 상상력’이 고도자본주의 시대의 사물화에 대한 의미있는 시적 대응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 시대 민중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다면 이런 인식만으로는 시적 활력을 되살리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이에 비해 ‘갈림길’의 저편을 바라보는 이장욱은 한국 시가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동일성의 시학’이나 기존의 ‘서정적 자아’에서 탈피해 ‘다른 서정들’을 구현하는 새로운 방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유희석은 고은 시인의 역작 『만인보』 연작시를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의 성취도를 세심하게 분별함으로써 『만인보』를 범박한 민중적 민족주의의 균질한 텍스트로 여기는 항간의 피상적인 인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 특집에 더해 새로운 경향의 시들을 섬세하게 가려 읽으면서 그 새로움의 뿌리를 되돌아볼 것을 충고하는 박형준의 계간시평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시비평을 특집으로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소설평론을 싣지 못했는데, 가족로망스의 틀로 구효서, 김애란, 심윤경, 이기호, 박완서, 박민규 등의 최근작을 촘촘히 분석·품평하는 백지연의 계간소설평은 이런 아쉬움을 달래준다. 하지만 소설란에는 모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한 편인데, 은희경, 권여선, 김영하, 김경욱의 단편들 하나하나가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족하며, 밀도있는 독특한 서사로 ‘왕따’가 당하는 일방적인 전체주의적 폭력과 탁구의 대화적 소통을 대비시키며 시작되는 박민규의 장편소설(연재 1회분) ‘핑퐁’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시에서도 원로 신경림에서 올해 등단한 신인에 이르기까지 각기 개성있는 목소리를 선보이고 있어 이번 창작란은 꽤나 다채로워졌다.

문학에 비중을 둠으로써 좀 소홀해진 정론지적 면모는 최근 과거사청산 문제로 논란이 되는 박정희시대를 평가하는 ‘쟁점’으로 감당하고자 했다. 쟁점의 글 세 편 모두 현재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하에 그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체제의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서 일치한다. 그 가운데 황대권은 박정희 패러다임을 획일주의와 경제지상주의로 정의하고 그 폐해를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며, 조석곤은 박정희체제의 시대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경제개발과 독재 간의 필연적 관련성을 반박하고 박정희신화의 허상을 밝히고자 한다. 두 글이 아주 비판적인 데 비해 박정희를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 평가하는 백낙청의 글은 독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해 일정한 평가를 하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이 그 지속불가능성을 완화시켜 ‘경제적’으로도 공헌했다는 독특한 논지를 편다.

끝으로, 경제군사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면모와 이와 대결하는 미국 패권주의의 비관적인 전망을 그리고 있는 찰머스 존슨의 논단은 동북아시아의 현상황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돕는 계몽적인 글이라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밖에 토오꾜오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우경화 현상과 이에 대한 저항을 생생하게 전하는 일본인 학부모 마루하마 에리꼬의 현장통신, 영화 「주먹이 운다」에 대한 성은애의 섬세한 비평도 유익한 읽을거리이다. 짧은 지면에 촌철살인의 논평을 담는 촌평란은 이제 독자들의 호응이 꽤나 큰 창비의 자랑으로 자리잡았는데, 이번에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해준 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내년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편집진에서는 올 한해 여러 혁신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말씀을 전하며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한층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柳在建

유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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