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근본적이면서 중도적인 근대극복론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jkyoo@pusan.ac.kr
창비가 한국사회의 변혁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새로 기획한‘창비담론총서’의 첫째권이 『이중과제론-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이다.‘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은 처음 백낙청(白樂晴)에 의해 개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세계적으로 널리 소통되는 담론이 아닌 터라 우리 지식계에서 별로 호응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소위‘근대’에 관한 담론이라면 저 유서깊은‘근대화론’을 비롯해 요즈음 낯익은‘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미완의 근대론’혹은‘성찰적 근대화론’등을 떠올려볼 수 있지만, 일반 독자에게 이중과제론은 이들 담론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주된 논지는 어쩌면 상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바람직한 삶은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이중과제를 떠안게 되지만, 우리가 처한 근대적 삶의 경우 자본주의의 막강한 영향력과 세계체제적 성격 때문에 그런 동시적 과제가 한층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이중과제론을 다른 담론과 비교해보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듯싶다. 이것은 근대 넘어서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근대화론을 비롯한 일체의 근대주의 담론과 대립되는 한편, 극복대상을‘근대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본다는 점에서 탈근대를 자본주의시대 안에 위치짓거나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탈근대담론과 구별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와도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지역간, 국가간 그리고 사회내 여러 균열 위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매끄러운 평면 위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18면)기 때문에 그 극복을 위해서는 계급적 시각만이 아닌 복합적인 시야가 요구된다. 극복대상이 세계체제인 만큼 시공간의 차원을 구별해 장기적인 근대극복의 노력들과 슬기롭게 일치하는 중단기적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백낙청은 세계체제 차원의 근대극복이라는 장기적 과제와 남한사회에서 가능한 민주주의라는 단기적 과제를 연결해줄 한반도 차원의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중기적 과제를 필수적인 매개항으로 강조한다. 또한 복합국가 구상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화의 매개로 주목하는 백영서(白永瑞)라든가, 지구화·지역화·지방화 요구에 직면한 국민국가의 지위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요청하는 최원식(崔元植) 등 이 책의 다른 필자들도 대체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중과제론은 근대극복이라는 근본적인 지향을 가지면서 중도적인 기획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현실주의 담론과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담론이 맞서 있는 우리 지식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남주(李南周)는 유토피아를 지금 이곳에 실현하고자 했던 과거의 급진주의적 실천보다 “중도의 길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근대극복의 토대를 만들어나가는 데 더욱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74면)이라는 믿음을 표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단연 흥미를 끄는 것은 이러한 입장에 대한 근본적 비판인 김종철(金鍾哲)의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다. 그는 근대에의‘적응’이 구체적 실천에서도 모호하고 결국 근대주의에 대한 투항이 될 뿐이라 비판하면서 한층 급진적인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근대적 방식에 대한‘적응’이 아니라, “성장논리와는 무관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 즉 비근대적 방식으로 방향전환하려는 급진적 노력”(163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생태주의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이전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되살리는 비근대적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근대주의 순응의 함정을 경계하는 김종철의 글은 우리 사회의 삶과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독특한 울림을 갖지만, 그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소중한 삶의 방식과 지혜가 있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하면 변화된 시대에서 한차원 높게 재생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보다, 어쩔 수 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가 “맑스”의 통찰을 하나의 “지침”(168면)으로 제시한 것은 한마디로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소농(小農)을 비롯한‘소생산자 연합’의 미래사회를 구상했다는 주장(167~68면, 202면)은 『세계공화국으로』에서의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견해와도 같은데, 이것은 맑스사상의 본질적인 부분을 오해한 것이다. 맑스가 농업이든 수공업이든 전근대 유럽사회의 틈새에 광범위하게 존재해온 소생산경영을 자연 생태를 위해서나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토지 및 생산수단의 분산을 전제로 한 이 생산양식이 더이상 회복될 수 없음을 당연시하면서, 자본주의하의 생산수단의 집중화와 공동점유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가능케 할 수 있을지 묻는 것이 맑스의 화두였다. 자본주의에서 억압된 개성을 자본주의로 가능해진 토대의 도움으로 되살리려고 했던 그의 상상의 거점은 “소생산자” 연합이 아닌 자유로운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한 관리였고, 그의 판단에 후자의 경우 대규모 공장과 농장은 그 비중이 커질 것이었다. 발전된 생산력을 토대로 한 새로운 차원의 개인주의를 갈망했던 맑스의 꿈은 소농공동체보다 훨씬 더 큰 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한 시대에 적응하면서 극복하고자 하는 꿈이었다.
이즈음 계몽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자처하는 이런저런 탈근대담론들이 결과적으로 대중을 계몽시키려고만 하는 엘리뜨주의 노선으로 귀결되는 역설은 근대적응이 근대극복의 과제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맑스가 당대의 맥락에서 그 누구보다 꿈이 큰 대중노선을 대변한다고 보는데, 요즘의 탈근대담론은 나름대로 소중한 계몽적 효과를 갖지만 꿈이 너무 작고 이상주의적인 엘리뜨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맑스 자신은 꿈이 너무 작아서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유토피아주의자라 불렀다.
사실상 이중과제론에 대해 내가 각별한 공감을 느낀 것은 이것이 맑스 연구자로서 개인적으로 줄곧 관심을 가져온 주제와 직접 닿아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든 연구자든 그의 사상에 내재하는 이중성 문제는 언제나 논란거리였는데, 가령 계몽주의와 해체주의, 과학주의와 비판철학, 국가사회주의와 아나키즘 등등 온갖 문제를 둘러싸고 상반된 관점의 논자들이 각기 정반대의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맑스의 이중과제론적 인식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맑스를 추종하는 맑스주의자들로부터 그를 계몽적 이성의 숭배자로 비판하는 탈근대론자들, 그리고 맑스를 프루동파 아나키스트로 보는 최근의 카라따니 코오진에 이르기까지 숱한 오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맑스의 이중과제론적 인식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지금껏 얻은 잠정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실상 맑스는 오늘날의 그 어떤 탈근대론자들 못지않은 해체주의자, 개인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지만 삶이 처한 특정한 구조에의 적응과 극복을 동시에 사유했기에 탈근대론자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시야를 제시했다는 것, 그래서 특정한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됨됨이를 분석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학의 과제로 나아갔다는 것, 그러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세계자본주의의 지정학적 분열과 그 역동성을 이론적 시야에 온전히 넣지 못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세계자본주의의 지리적 공간과 다층적인 사회적 분열을 감안한 새로운 이중과제론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사 연구자의 입장에서 본 『이중과제론』은 19세기의 맑스사상을 세계체제론적 시야에서 계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적응과 극복이란 담론은 그 자체로 추상수준이 높은 담론이기에 지금 이곳의 실천전략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 개인의 실존 차원에서나 집단적 차원에서 어떤 자세가 필요할지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엮은이 이남주가 말한, “도가(道家)적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대면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25면)를 얻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이 책은 그 길을 여는 뜻깊은 첫걸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