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세월호 참사와 ‘임계사회’ 혁신의 과제
세월호가 가라앉은 후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희생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원고 학생들의 마지막 모습은 몇몇 학생들 자신이 찍은 동영상과 사진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기울어지는 배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천진하게 장난을 치지만 나중에는 선내방송의 지시대로 가만히 대기하며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 ‘탈출하라’는 한마디만 했으면 튀어나왔을 승객을 두고 자기만 살아남는 선장과 선원들, 이들을 구하면서도 선내의 사람들은 구하려 시도하지 않는 해경, 사고 직후의 생명 같은 시간을 개념 없는 발언과 행사성 방문으로 허비하는 대통령, 이들의 뻔뻔한 직무유기 앞에서 시민들은 이 나라가 한참 잘못되었음을 절감한다. 단단히 잘못되기로는 6800톤급의 배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가라앉은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사’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간의 행적과 정황을 고려할 때 이 중대한 진상규명의 임무를 현 정부에 맡겨두고 가만히 지켜볼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우선 세월호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검경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 구조 책임을 방기한 해경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거니와, 참사의 원인을 관료사회의 지난날 ‘적폐(積弊)’ 탓으로 돌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를 상대로 합수부가 엄정한 수사를 할 것 같지 않다. 그렇기에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과 청문회를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거기에 더해 국회 국정조사와 여·야·정 및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범국가적 위원회를 제안했는데,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이 정략적인 차원에서 처리될 소지를 막기 위해서는 범국가적 위원회 설치는 사전에 합의하고 활동은 지방선거 이후에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야당이 시민의 편이라면 이번에는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도 진상규명의 요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전형적인 ‘임계(臨界)사고’다. 노후 선박의 운항이라는 근본적인 취약성에 더해 무리한 개조와 증축, 과적, 균형수 부족, 화물 고박(固縛) 미비 등의 불법적 관행들이 중첩되어 이미 안전의 임계치에 달한 배가 맹골수로의 가파른 물살을 통과할 때 선원들의 운항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낸 것이다. 침몰사고가 대형 참사로 이어진 데서 임계사고로서의 성격은 한층 두드러진다. 재난구조 사령탑이 부재한 탓에 구조작업에 심각한 혼선이 빚어진데다 안전행정부·해양수산부·해경 관료의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구조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구조체계의 문제가 현장 구조책임자들의 직무유기와 구조장비의 작동불능을 계기로 참담한 구조 실패를 낳은 것이다.
또 그 이면에는 선박과 운항의 안전을 무시하는 온갖 불법·편법의 관행과 이른바 ‘해피아’(해양수산부 마피아)의 ‘적폐’—해수부와 해운업자(청해진해운), 해경과 구난업체(언딘) 사이의 유착—등 민·관의 더 많은 관행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관행조차 여러겹의 요인 중의 한 층위에 불과하다. 정치술수에 능하되 시민과 공감하는 능력은 전무한 박대통령의 제왕적인 통치스타일도 관료사회 전체를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시민의 안전과 구조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만든 요인이다. 그렇잖고서야 국가안보실장이라는 사람이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막말을 했겠는가? 이는 4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과거로부터 겹겹이 쌓여온 잘못된 적폐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너무도 한스럽”다며, 마치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고 모두 ‘적폐’ 탓이라는 박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과 통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그 ‘적폐’와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더 심각한 종류의 ‘적폐’를 쌓고 있다. 분단 이후 검찰과 국정원이 쌓아올린 진실 은폐와 조작의 ‘적폐’는 그의 집권기에 국정원 선거개입과 간첩조작사건의 진상규명 방해로 한층 더 두꺼워졌다. 차원이 다르지만 이 ‘적폐’가 대통령이 강조하는 ‘적폐’ 못지않게 참사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가령 이번 참사는 전례로 흔히 거론되는 1993년의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보다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의 처리과정과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당시의 민군합동조사단이 내린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결론에 대해 이승헌 버지니아대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명백한 ‘자연과학적’ 반론을 제기했지만 이명박정권은 종북몰이로 진상규명의 요구를 덮어버렸다. 당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 만약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었다면 우리 군이 철통같은 경비를 재정비하여 그해 11월의 연평도 포격사건을 막았을 것이고, 좌초 등의 다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더라면 선박 안전과 사고의 예방 및 보고 시스템 문제가 부각되어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한국사회 도처에서 임계사고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최근의 아찔한 추돌사고가 일러주듯 지하철, KTX, 선박, 항공기, 케이블카, 건물, 공장, 다리 등에서 임계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임계사고 후보는 원자력발전소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한 것은 징후적이다. 1978년 운전을 시작한 36세의 최고령 원전인 고리 1호기는 이미 30년의 설계수명이 끝났지만 가동수명을 10년 연장한 것으로, 잦은 고장과 사고로 여러번 가동 중단되었다가 이번에 또 재가동 승인이 난 것이다. 부산시 기장군에 소재한 고리원전의 30km 반경에는 부산시청과 울산시청이 포함되고, 필자의 가족을 포함한 34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고리 1호기 외에도 경상도에는 30년 이상의 월성 1호기를 비롯해 십여개의 원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만약 노후 원전이라는 원천적인 요인에 더해 이런저런 실수가 겹쳐 임계사고가 터지면 상상하기 힘든 참사가 될 것이다.
세월호 사고의 일차적인 요인이 선령 연장에 의한 노후 선박의 운항에 있고 후꾸시마 원전사고의 일차적인 원인도 30~40년 된 노후 원전의 가동에 있음을 고려할 때 고리 1호기는 아슬아슬한 임계상태에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우리 원전은 지진다발지역에 있는 일본 원전보다 자연재해의 면에서 더 안전하달 수 있으나 작년에 불거진 ‘원전마피아’의 부품 비리와 안전검사 위조 사례에서 보듯, 더구나 이번 세월호 사건처럼 통제 가능한 재난을 거대 참사로 키우는 온갖 ‘적폐’에서 보듯, 인재의 측면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우리 쪽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안전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가히 ‘임계사회’라고 부름직하다. 이제 상시적인 임계상태에 이른 한국사회를 뜯어고쳐야 한다. 대통령은 조만간 ‘국가개조 수준의 시스템 혁신안’을 발표하겠지만, 마구잡이로 ‘규제와의 전쟁’을 들이댄 현 정부의 문제점을 적시하고 시민사회가 적극 참여하여 민·관·정 공동의 ‘국가개조 수준의 사회혁신안’을 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우선 공공운송수단과 공공시설의 상태를 진단하여 임계점에 이른 것들을 갈아치우고 온갖 ‘적폐’들을 청산하는 실제적인 작업과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제일주의, 배금주의에 젖어 있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두 차원의 혁신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수명을 다한 원전의 위태로운 운전을 당장 멈춰세우는 운동을 벌이고, 이번 지방선거에서부터 정부의 원전정책이 수정되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에너지 생산과 소비 문제를 생태친화적으로 해결할 길을 고민하면서 임계치에 가까워진 지구온난화 위기에도 대처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생명보다 돈을 앞세우는 사회체제와 삶의 방식을 너무나 쉽게 용인해온 우리 자신의 지난 모습들이 뼈아프다. 이번 참사를 지켜보면서 한국사회에 절망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생명을 구하고자 한 사람들,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어 시신을 찾으려는 잠수부들, 진실만을 전하려고 분투한 언론인들, 그리고 실종자 희생자 가족에게 달려가 묵묵히 자원봉사활동을 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려야 한다. 나아가 그동안 임계사회의 임계치가 높아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싸워온 시민들의 자긍심도 더욱 굳게 지키고 북돋아야 한다.
이번호 특집은 사회현실과의 연관이 약해지는 최근 평단의 흐름 속에서 ‘우리 비평담론의 사회성’을 찾아 나서는 뜻깊은 논의들로 구성되어 있다. 황정아는 한물간 개념으로 취급되는 리얼리즘론을 전체주의 딱지가 붙는 ‘총체성’을 중심으로 재검토하는데, 오히려 총체성의 ‘비전체주의적’ 성격과 여전한 필요성이 오롯이 드러난다. 나아가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재현/이해) ‘불가능성’의 오남용 문제를 날카롭게 짚고 질문/운동으로서의 총체성 개념이 사라져서는 안될 이유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최근 소설을 통해 ‘87년체제’의 감정구조를 분석하고 그 개념적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강경석은 87년체제가 문화혁명의 성격을 결여한 탓에 ‘정치적 자유’만을 수호하는 ‘최소주의’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은희경·권여선 등의 근작 장편을 놓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개인에게 한계이자 자산으로 작용하는가를 실감나게 논한다. 정홍수는 사회현실에 밀착된 비평담론으로서 ‘창비적 독법’을 조명하고 그 남다른 특성을 백낙청의 문학론과 실제비평을 통해 꼼꼼하게 짚는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을 진리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입론이 잘 녹아든 예로 박민규론을 거론하여 섬세하게 논하는데, 특히 『핑퐁』론에서 ‘2교시’의 의미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론의 ‘Writer’s Cut’ 해석에 대한 논평이 종요롭다.
문학평론에는 주목할 만한 두편의 평문이 실렸다. 이경진은 조해진과 백수린의 신간을 중심으로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나는 특이한 장소성과 이방성, ‘외국어로 말 걸기’에 내포된 변화를 분석하고, 그것이 기존의 국가적·문화적·언어적 경계를 벗어나고 있음을 솜씨있게 보여준다. 김남시는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꼼꼼히 검토하면서 그것이 세속적 정치에서 ‘희망의 목적론’으로 전유되는 예를 꼬집고, 그가 그런 미래의 희망 논리를 극복하는 실천전략으로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을 제시했음을 분명히한다.
작가조명에서는 신작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출간한 나희덕 시인과 평론가 조재룡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평론가의 비평적 해석과 시인의 진솔한 육성이 교차하는 가운데 애초부터 이분법적인 구도에서는 결락되는 수많은 경계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낯선 것들과 ‘너머’를 껴안으며 더욱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이번 시집에서의 변모를 낳았음이 확인된다. 개편 후 두번째 회를 맞이한 문학초점에서는 강경석·김사인·송종원이 이 계절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세권의 시집과 두권의 소설집을 놓고 첫회 때보다 더욱 자유로운 토론을 벌인다. 대상 작가의 세대와 작품 성향의 차이에 토론자의 세대와 비평관의 차이가 상호교차하고 어우러지면서 자아내는 복합적인 시점과 다성적 소리가 풍성하다.
김두식·백승헌·전수안이 참여한 대화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주제를 놓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사법권력 시스템, 검찰개혁, 로스쿨제도 등의 문제를 토론하고 그 해법을 찾아보는 가운데 법원의 몇몇 나아진 면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부 스스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배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법원이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함을 일깨우는 대목 등 세월호 참사 이후 대두되는 국가체제 혁신과 관련해서도 경청할 바가 많다.
논단과 현장에는 여섯편의 글이 실렸다. ‘인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나’를 묻는 백낙청은 그것이 근대 이전의 전통적 인문학과 ‘날로 새로운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올 수밖에 없는 연유를 폭넓게 개진한다. 동서양과 전근대의 학문을 두루 시야에 넣고 양자가 만나는 최상의 길을 정치하게 따지고는 새로운 인문학의 핵심 과제로 ‘분단체제연구’와 ‘비판적 한국어학’ 같은 참신한 제안도 내놓는다. 카라따니 코오진과 맑스를 비교하는 유재건은 교환양식을 축으로 하는 카라따니 입론의 독창적인 기여를 사주는 한편 그것이 맑스의 고유한 입장과 갈라지는 지점을 예리하게 공략한다. 특히 카라따니의 맑스 비판을 맑스 혹은 월러스틴의 입장과 맞대면시키면서 오히려 전자의 논리적 모순이나 취약성을 섬세하게 짚는 대목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밖에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의 진행과정을 면밀히 따라가면서 분단체제론적 시각으로 그 의의와 한계를 조목조목 짚는 김창수의 글, 국내외 언론사의 대학평가가 초래한 부정적인 변화들을 적시하고 평가지표의 개선방향과 아울러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김봉억의 글, 2014 인터아시아 청년포럼에 참가하여 동아시아의 ‘민족’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절감하고 돌아온 백지운의 참관기, 약탈적인 채취산업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제국의 두 얼굴’을 멜빌 소설의 두 인물의 특성과 연관지어 논하는 그렉 그랜딘의 통찰력 넘치는 글도 모두 일독에 값한다.
이번호 창작란은 예정된 장편소설 연재가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뤄지는 바람에 단출해진 감이 있으나, 전성태 천운영 김종옥의 개성적인 소설과 김남호 김준태 김행숙 박서영 박소란 서대경 이기철 이범근 정철훈 조연호 함성호 등 저마다 독특한 어법과 감각을 구사하는 시인들의 다채로운 시편이 그 빈자리를 달래줄 것이다. 그리고 유익함과 읽는 재미를 겸비한 것으로 정평 난 촌평란이 독자 여러분을 기다린다.
대형 참사로 온 국민이 분노와 실의에 빠져 보내는 가운데 시민사회 여기저기서 우리의 망가진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성찰의 소리가 높다. 이런 민의는 지방선거에서부터 표출되어 사회 전반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비극 앞에서 창비는 자신부터 돌아보는 성찰의 자세를 가다듬고, 임계상태에 이른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혁작업에 독자와 더불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
韓基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