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과 새로운 주체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명
최근의 몇몇 소설들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촛불혁명 시대에 한국문학은 어떤 뜻깊은 변화가 있었는가? 이 물음에 응답하는 방편으로 주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시대의 혁명과 문학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혁명이 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면 혁명의 주체도 근본적인 자기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기존의 낡은 관계와 관행, 가치관에 맞춤하게 체질화된 자신은 바꾸지 않은 채 주어진 세상을 확 바꾸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혁명의 관계를 논한 사례를 살펴보면, 혁명기에는 작가의 출신성분이나 사회적 공공성을 앞세우기 쉽고 이런 경향이 팽배해지면 공공성의 이름으로 창조성을 억누르는 사태가 벌어진다.1 반대로 창조성을 빙자하여 공공성을 어지럽힐 가능성도 상존하기에 진상을 가려줄 비평의 역할이 요긴하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되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유영역이라는 ‘문학 커먼즈(commons)론’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커먼즈’라고 하면 으레 공유(共有)와 공공(公共)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만, ‘문학이라는 커먼즈’의 핵심은 그것이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당대 사람들의 ‘협동적 창조’라는 데 있다.2 그 과정에 동반되는 작품평가 작업도 불멸의 정전을 세우고 보존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특정한 작품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문학이라는 커먼즈를 재창조하는 비평작업으로 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창조적 파괴’라 일컬어지는 혁명도 이런 ‘협동적 창조’의 소산이랄 수 있다. 촛불혁명은 지금 이곳을 사는 사람들의—낡은 것의 파괴와 전복을 포함하는—‘창조적 협동’의 구현이며, 이 시기의 문학과 혁명을 함께 거론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촛불혁명이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살피기보다 주체의 변화를 중심으로 촛불혁명에 걸맞은 문학의 가능성을 꽃피운 몇몇 소설 작품을 논하고자 한다.
1. 촛불혁명의 주체
어떤 혁명이든, 그 주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관념과 의식의 차원만이 아니라 몸과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갈 데까지 가야 한다.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실로 어려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 예언대로 베드로가 새벽 첫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한 것은 그의 믿음이 일천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는 예수의 그런 예언을 터무니없다고 여겨 코웃음을 쳤다. 스승을 위해서라면 당장 목숨이라도 내놓을 자신이 스승을 배신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낡은 자아의 마지막 손길이 그를 붙들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했던 그 마지막 낡은 껍질까지 여의고서야 그는 비로소 새 존재—믿음의 ‘반석’(베드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체가 근본적인 자기변화를 꾀하는 방식은 그 주체를 탄생시키는 혁명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3 가령 87년 6월항쟁은 흔히 ‘죽 쒀서 개 줬다’는 식의 탄식을 듣지만 ‘87년체제’라는 민주화시대를 성취한 혁명인데, 당시에는 주도세력이던 대학생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는 ‘존재 이전’을 감행했고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합법·비합법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 혁명의 주체들은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정권과 싸워야 했던 만큼 자신의 신체와 장래를 걸고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 했다. 또한 이들은 신원을 숨긴 채 대중을 조직하고 ‘가투’와 파업투쟁을 이끌어야 했으니, 무거운 책임감도 안고 있었다. 이런 심각한 주체화 방식은 87년항쟁의 전투적 시위방식—경찰과 구사대의 최루탄과 곤봉 세례에 화염병과 짱돌로 맞서는 방어적 폭력—에도 일부 반영된다. 심지어는 분신으로 맞서기도 했는데, 이 시기 주체들의 비장한 정서는 이인휘의 소설, 특히 시인 박영근과 박영진 열사가 모델로 등장하는 「시인, 강이산」(『폐허를 보다』, 실천문학사 2016)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로부터 삼십년 후 우리가 맞은 촛불혁명은 시민 주도의 민주주의 항쟁이라는 점에서는 6월항쟁을 계승하면서도 그 주체화 방식은 여러모로 다르다. 촛불혁명의 첫 단계인, 2016년 10월 말에서 2017년 4월까지의 촛불항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항쟁이 특정한 지도부의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자들의 창의적인 협동으로 꾸려졌다는 점이다. 범시민단체 연대기구 ‘퇴진행동’(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이 집회를 주최했지만, 항쟁을 지도하기보다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23차례에 걸쳐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한 이 거대한 항쟁의 주체는 ‘세월호 진상 규명’ ‘박근혜 퇴진’ 같은 공통구호를 외치고 여러 적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그 표현방식은 비장하지 않았다. 이 자발적 주체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준수하면서 구호와 공연, 행진과 자유발언 등을 결합했고 덕분에 투쟁현장이 곧 축제의 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촛불혁명의 주체가 6월항쟁 주체에 비해 덜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은 30년 전처럼 독재정권의 국가폭력에 짓눌리지는 않았지만, ‘헬조선’이라 불릴 만큼 온갖 종류의 갑질과 불평등, 모멸과 혐오의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한 논자는 2008년의 “다중이 계급·민중 같은 전통적 저항주체로부터 벗어난 새로움 자체에 대한 열광의 산물이었다면, 〔2016년〕 촛불은 그런 다중이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능멸과 혐오의 시대를 견디다 광장에 다시 모인 정동적 주체”4라고 주장한다. 2008년 촛불의 주체와 2016년 촛불의 주체를 대척적인 성격으로 묘사하면서 그 전환의 이유로 “신자유주의 광풍”을 꼽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정동적 주체’라는 개념의 적실성 여부는 숙고해볼 만하다.
‘정동’(affect, 情動)5은 정서(emotion)나 감정(feeling)과 관련된 몸(존재)의 상태를 가리키지만 의식 이전의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고정된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렵다. 정동은 들뢰즈의 ‘되기’(becoming) 철학을 거치면서, 기존의 경계들—신체와 정신,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들—을 가로지름으로써 세계를 계속적으로 변형시키는 힘으로 이해된다. 이 변형력이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마쑤미(B. Massumi)가 경고하듯 정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기 때문에, 틀어질 수 있고, 삶의 부정으로 반전할 수도 있”다. 또한 “존재역량의 긍정이 증오라는 극단으로 치우치면서 (…) 부정과 반동의 힘으로 이행하는 정동적 전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6 요컨대 정동은 긍정과 부정 양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역량이며, ‘정동적 전환’은 정동의 ‘아나키즘’적 속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하겠다. 촛불광장에서 실감하듯 우리 시대 주체에게는 SNS의 역할과 온라인상의 존재감이 예전보다 훨씬 중요해지면서 정동적 힘이 더 세어지는 현상도 중요한 특징이다.
어쨌든 이 개념은 기존의 재현체계를 가로지름으로써 종래에는 무시되기 일쑤였던 비식별 영역에 주목할 수 있어서, 주체의 새 면모를 부각하는 데 유리하다. 이번 촛불에서 두드러진 페미니즘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그렇다. ‘박근혜 퇴진’을 빌미로 여성비하나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경우에는—예정된 DJ DOC의 공연을 취소시키는 등—강한 저항이 있었다. 이후 거세게 번진 미투운동과 혜화역시위 등을 감안할 때, 이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재현-대의체계상의 성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성평등 주장일뿐더러 무의식적인 남성우월적 발상과 언어, 관행에 대한 ‘정동’적 저항이기도 하다. 한편 장애인학교 설립을 둘러싼 진통과 ‘제주난민반대’의 사례에서 보듯이, 장애인과 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와 난민 등에 대해서는 정동적인 힘이 부정과 반동으로 전환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번 촛불항쟁의 성격을 놓고 그것이 “단순한 박근혜퇴진을 넘어 헬조선 탈피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7는 점에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있지만, 한반도 차원의 시각을 확보하지 않으면 현재의 혁명적인 변화를 근시안적으로 판단하기 쉽다. 분단체제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간 반공·반북의 이념적·정서적 기제로 헌법 위에 군림해왔던 ‘이면헌법’8의 작동에 제동이 걸린 것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면헌법은 분단현실의 부정적인 정동을 한껏 고조시킴으로써 이곳을 ‘헬조선’으로 만든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촛불항쟁 주년을 통과하는 지금 우리는 혁명의 어디쯤에 있을까? 2018년의 한국은 미투운동과 각종 적폐청산 및 갑질청산을 통해 기득권자들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회의 체질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한 고용불안과 수도권 집값폭등 등 경제적 현실에 있어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반면 남북관계는 연이어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함으로써 한반도가 평화와 통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재개되었는데, 다만 여기서도 미국과 국내 방해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이 상반된 흐름이 촛불혁명의 두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형국인데, 현재 주된 전선이라 할 한국사회 내부의 개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촛불혁명 주체들의 동력이 자칫 부정적인 정동으로 전환하면 혁명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장기화될 수 있는 촛불혁명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개혁 조치들을 실천하는 한편으로 혁명 주체들이 자신의 부정적인 정동을 감당하면서 마침내는 그런 정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기변화를 거듭할 필요가 절실하다.
2. 주체의 자기변화와 순간의 삶: 황정은의 「웃는 남자」와 정미경의 「못」
촛불혁명 시대의 문학이라 해서 혁명을 직접 소재로 삼아야 하는 법은 없다. 촛불혁명의 기원적 사건인 세월호(2014. 4. 16)를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세월호든 촛불항쟁이든 소재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재주의가 아니면서 촛불혁명의 지향과 밀착된 방식으로 핵심적인 물음을 던지고 분투하는 작품도 적지 않은데, 그중에서 황정은의 「웃는 남자」 연작9이 돋보인다.
연작 중 두번째인 단편 「웃는 남자」는 체질화된 몸의 문제를 거론한다. 일인칭 화자 도도는 그의 연인 디디를 사고로 잃는다. 함께 서서 타고 가던 버스가 승합차와 충돌했을 때 그가 연인을 붙들지 않고 메고 있던 가방을 붙잡는 바람에, 디디는 버스 바깥으로 튕겨나가버린다. 도도는 위급한 순간에 사랑하는 연인 대신 그 평범한 가방을 붙든 자신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자기 뜻과는 달리 무의식적인 행동 때문에 연인을 지키지 못했으니 참담할 뿐이다. 이 사건과 연관된 사건들이 더 추가된다. 그중 하나는 땡볕에서 도도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노인이 도도 쪽으로 쓰러지는 바로 그 순간 도도는 비켜서고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는데, 노인은 도도가 서 있던 자리에 “퍽, 하고 머리를 박고 쓰러졌”던(177면) 것이다. 작가가 두 사건을 통해 문제 삼는 것은 자기의 의식적인 생각과 따로 노는 패턴화된 부분이다.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184면, 강조는 인용자)
이것을 한 개인의 잘못된 습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그,라는 인간이 되는 것’, 즉 존재를 결정짓는 어떤 연속적인 패턴은 이를테면 존재의 짜임새로서의 체질이라 하겠는데, 이때의 체질은 타고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습득한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개개인의 그런 체질이 사회의 체질—영어로 ‘체질’(constitution)에 ‘헌법’이라는 뜻도 있듯이—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맞물려 있는 체질을 바꾸는 것이 곧 혁명이 된다. 두 사건은 모두 도도가 무의식적인 존재의 차원에서 자신의 의식적인 생각과는 정반대의 정동—남의 생명보다는 내 물건이 소중하다든지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직조해낸 것임을 암시한다.
이 일화는 세월호참사의 근본 원인—생명보다 돈을 앞세우는 사회적 체질—을 떠올리게 하면서 도도의 주체적인 변화가 곧 혁명의 시작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세번째 작품인 중편 「웃는 남자」는 d(도도)가 어떻게 여소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런 체질을 변화시키고 새 존재로 나아가는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한 후에야 새 존재로 거듭나듯 도도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디디를 배신(외면)한 후 그 참담한 결과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새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도도에서 d로 이름이 바뀐 것도 그런 혁명적인 존재 변화의 표시로 느껴진다. 「웃는 남자」 연작은 주체의 자기변화라는 주제를 주밀하고 힘차게 밀어붙인, 촛불혁명 시대 문학의 수작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작품의 모든 요소들이 철저하게 존재의 체질화된 부분과 그것의 변화 가능성에 맞춰지다보니 지나치게 성찰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있다.
문학에서 주체는 다른 무엇의 주체이기 전에 먼저 자기 삶의 주체를 뜻하고, 삶의 주체에게 연인 간의 사랑은 혁명 못지않은 ‘진리 사건’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와 촛불 사이(2016년 5월) 에 발표된 정미경의 연애소설 「못」(『새벽까지 희미하게』, 창비 2018) 은 울림이 크다. 혁명이 아니고 연애, 그것도 ‘실패한’ 연애를 다뤘지만 ‘헬조선’의 일상을 견디면서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자 애쓰는 과정을 그 실패의 선연함과 함께 날카롭게 묘파한다. 몇몇 중요한 지점을 살펴보자.
금융업 종사자인 공은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아내와 별거 중에 마트의 가전코너 여직원인 금희와 연애를 하게 되고 금희의 원룸에서 반(半)동거를 시작한다. 성격이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름에도 둘의 관계는 여름 내내 이어져오다가 공이 전 직장 상사로부터 새 일자리를 제안받으면서 끝나고 만다. 이런 줄거리라면 얼핏 헬조선의 낯익은 풍속을 그려낸 세태소설로 보일 수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만남에서 파경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따라가면서 미세한 감정까지 포착하는 정미경의 냉정한 시선과 예민한 언어 덕분에 「못」은 이 시대의 인간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빼어난 작품이 된다. 공과 금희의 됨됨이는 물론 그들의 직장 스트레스, 욕망과 강박, 심지어 금희의 집에 들어온 길고양이(점순이)를 대하는 태도10에서까지 서로 간의 차이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듯하다.
이 소설에는 「웃는 남자」와 달리 투철한 자기성찰과 자기변화를 수행하는 인물은 없다. 대신 공과 금희를 초점화자로 번갈아 활용하는 ‘내포작가’가 있어 해석과 논평을 통해 두 사람의 삶에서 뭐가 문제인지를 살짝살짝 일러준다. 공의 경우 한때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것은 긴장할 때 나타나는 눈밑떨림 현상뿐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이제는 “인정과 안정”(25면) 강박에 사로잡혀 있음을 스스로 인지한다.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을 받고 술에 취해 금희에게 전화해서 “출근보다도, 나란 사람을 알아준 게 너무 기뻤어”(36면) 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인정’ 강박의 강도를 입증한다. 또한 ‘인정과 안정’을 동시에 확보한 이상 금희와의 관계를 지속할 동인이 사라졌고 그의 전화를 받은 금희 역시 관계의 끝을 예감한다.
금희의 문제는 무엇일까. 금희의 생각인지 내포작가의 논평인지 애매하지만 “공은 자신의 욕망에 전력으로 매달림으로써 불안을 유예하는 쪽이었다. 금희의 방식은 반대였다. 미리 내려놓음으로써 불안의 싹수를 자르는 식이었다”는 진술은 두 사람이 불안한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뿐 “어느 쪽을 선택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36면) 말한다. 사실 금희의 방식으로는 ‘인정과 안정’의 강박에서 벗어날 순 있지만—종일 선 자세로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듯한 특유의 발성”(18면) 으로 고객들을 대해야 하는—가혹한 노동의 시간에서 놓여날 수는 없다.
작품 자체는 이런 중립적 진술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지만 그 진술의 차원을 넘어서기도 하는데, 어쩌면 그런 차원이 이 소설을 빛나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금희가 바라는 것은 공과 함께 나란히 앉아 세차 서비스를 받는 것,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것,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공에게 들려주는 것 정도이다. 이는 실로 소박한 욕망이지만, 인정과 안정의 강박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그런 욕망을 충족하면서 환해질 수 있는 ‘경지’이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다시 겨울의 끝’)에서 공은 지난여름 금희와의 연애 가운데 좋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거품 속에 금희와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순간을 자신도 좋아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품이 창유리를 온통 덮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환했던 순간. 생각해보면 그날 환한 빛은 한결 청결해진 유리창이 아니라 우와 하던 낮은 탄성, 조심스레 유리창을 문질러보던 손가락 끝에서 나왔다. 아니다. 빛은 또다른 어딘가에서 왔다. 그게 금희의 눈빛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다음에 또 오자. 막 빠져나온 세차 기계를 되돌아보는 금희에게 무심코 말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뜻밖에 단호했지.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44면)
여기에 환해지는 삶의 순간이 있고 그런 순간의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라는 단호한 말이 있다. 마치 자기 삶 깊숙이 때려 박는 ‘못’처럼 아픈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온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축한 듯하다. 삶 본연의 빛과 생기가 환해지는 순간은 다음에 그대로 반복될 수 없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가 곧 끝날 것이라는 예감이 겹쳐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소멸하는 관계와 찬란한 순간의 삶을 교차시킴으로써 하나의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환해지는 삶의 순간을 잇는 ‘다음이란 건’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 삶은 지속되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이 시대의 문학에서 환해지는 삶의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작품들은 적잖지만 이어지는 질문까지 던지는 작품은 드물다. 이 물음에 충실히 답하려면 더 긴 호흡의 형식이 필요하다.
3. 지속의 삶과 마음: 김금희 장편 『경애의 마음』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창비 2018) 은 흥미진진한 연애소설이자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사건들을 대거 활용하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가령 세월호참사와 닮은꼴인 인천호프집화재사건(1999. 10. 30)을 중심 사건으로 삼음으로써 그때 친구와 연인을 잃은 두 남녀 주인공의 트라우마 극복과정을 「웃는 남자」보다 훨씬 현실적인—지속적인 삶과 변화하는 관계들의—맥락에서 탐구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촛불혁명 시대의 ‘새로운’ 장편이라고 할 수 없다. 이야기하는 방식도 새로워져야 하는데 이 소설은 ‘마음 중심의 서사’라고 부름직한 자기 고유의 방식을 발명한 듯하다.
‘마음 중심의 서사’를 거론한다고 해서 ‘마음의 사회학’이나 ‘마음의 레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11 여기서 ‘마음’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장편소설의 서사방식과 관련해서이다. 장편의 경우 무엇보다 지속적인 삶의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데, 종래의 두가지 큰 흐름은 사실주의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와 모더니즘 소설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파편화된 서사로 대별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양자를 결합하고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지만 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양상이다.
또 하나는 앞서 ‘정동적 주체’를 언급하면서 주목한, 정동의 아나키즘적 속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정동 개념이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사회현상이나 주체의 새로운 면모를 파악하고 논하는 데 유용하지만 그런 유용성을 활용하는 방법만으로는 정동의 아나키즘적 운동을 제어할 방법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 해법을 알려준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동 중심이 아니라 마음 중심12의 이야기라야 ‘헬조선’이라는 정동의 소용돌이치는 바다에 뛰어들어 헤쳐나갈 엄두를 낼 수 있겠기 때문이다.13
이 소설은 ‘사건의 한중간으로’(in medias res) 뛰어드는 고전적인 수법을 택하여, 한 중소업체(반도미싱)에 근무하는 박경애와 공상수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각각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었고 실패한 연애의 전사(前事)가 있음은 물론 이미 특별한 인연을 맺었지만—화재사건 때 죽은 E/은총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수의 페북 계정 ‘언니는 죄가 없다’(이하 ‘언죄다’)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둘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로써 언제 그 사실이 알려져 어떤 영향을 줄지 추리소설적인 궁금증을 유발한다. 중간에서 시작된 소설 서사는 두 사람 각각의 과거사를 비추는 한편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형국인데, 과거와 현재의 사건/시간의 연결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마음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묘해서 모든 것을 마음이 정하지만, 그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경애와 산주의 관계에서 경애의 마음이 그렇다. 산주와의 연애가 끝난 뒤에도, 심지어 산주가 결혼하고 3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은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60면) 이기 때문이다. 산주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경애의 마음은 로맨스적 욕망도, 관계 회복에 대한 열망도 아닌 일종의 패배감일 뿐”(138면)인데도 경애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이게 통념적인 미련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E라는 존재 및 그의 상실과 관련있다. “산주를 죽은 사람처럼 만들고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건 적어도 스스로를 피조,라고 불렀던 어느 시절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았”(161면)기 때문이다.(이 점에서 두번째 장 ‘E’의 서두에 산주와의 관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애는 그 마음을 ‘폐기’하지 못한 채 상수와 함께 베트남으로 가는 선택을 한다.
마음은 이렇듯 비합리적으로 움직이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방식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무의식 깊은 곳의 움직임까지 포착해내는 것이다. 산주와 경애의 마음의 끈이 무의식의 층위에서는 상당히 깊이 뻗어 있었고 그것은 산주라는 인간이 그만큼 만만찮은 미덕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또 그런 만큼 경애로서는 산주와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자기변화의 관건이 된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요소는 생명력인데, 이 소설의 마음은 살아 있는 쪽으로 뻗친다. 그것은 아무리 칭칭 동여매도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기 시작하는 관계로부터는 빠져나오려 한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지 않으면 낡은 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경애는 상수와 살아 있는 새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산주의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잡는 두번의 장면이 바로 그때다. 첫번째(159~ 60면)가 산주와의 관계가 깨지는 시작이라면 두번째는 거의 단절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상수는 ‘언죄다’ 해킹 사건으로 상심한 상태에서 자기 상상에 취해 뭉클해서 “자기도 모르게 경애의 손을 잡고 말았다.”(258면)
상수는 경애 손을 잡고도 얼이 빠져 실감을 못하다가 경애가 손을 마주 잡았을 때에야 상황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상수가 경애의 손을 덮듯이 잡았지만 이번에는 경애가 손을 위로 올려 상수의 손을 눌러서 잡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상수는 생각했다. 이렇게 손을 번갈아 올려가며 잡고 있는 지금은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져 아무 번뇌도 없지 않은가.(259면)
상수의 손을 잡았을 때 경애는 더 밀착하고 싶다는 충동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꽉 차게 들어올리는 힘을 느꼈다. 자기는 물론이고 맞은편의 상수도 한 팔로 안아들 수 있을 듯한 정도였는데 왜 상수를 떠올리면 그런 힘을 생각하게 될까. 힘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될까.(268면)
두 사람이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서로 손을 잡으면서 한쪽은 아무 번뇌도 없는 상태—공상수라는 이름답게 항상 있지만〔常數〕 비어 있는〔空〕—가 되고 다른 한쪽은 “자기 자신을 꽉 차게 들어올리는 힘”을 느끼는 이 장면은 「못」의 환해지는 순간을 방불케 한다. 물론 그 순간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금희와 공의 관계와 경애와 상수의 관계가 다르듯이 그들의 관계 속에 내재된 어떤 생명력이 발현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새 관계가 형성되면서 산주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경애의 마음은 거의 다 녹아버려서, 나중에 이혼했다고 찾아온 산주에게 등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경애는 체질화된 마음의 ‘피조(물)’에서 존재로, 삶의 주체로 이행한 것이다.
마음 중심의 서사의 또다른 장점은 가혹한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정동들을 섬세하게 감지하되 거기에 아주 휘둘리지는 않는 능력이다. 가령 상수가 더이상 수능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농구공으로 맞는 가정폭력의 장면(38~ 45면) 이나 형 상규가 어린 전학생을 “스위스제 주머니칼로 위협해 옥상으로 끌고 가고 완력을 써서 묶고 때리고 방치해 이틀을 보내게 한 것”(122면) 에 대하여 상수가 아버지와 함께 대리 사과를 하러 가는 장면(118~ 24면) 은 기존의 단순한 식별체계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정동과 분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명장면들이다. 가령 후자의 장면에는 충격, 절망, 증오, 공포, 경외, 비참, 분노, 비겁, 노여움, 온기, 당황, 고통, 부끄러움, 순정한 수치심 등의 다양한 어휘가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의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그 나쁨도 그러데이션으로 존재한다는”(15면) 유정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체의 입장에서 이 폭력의 장면들을 새겨보면 상수의 마음이 온갖 종류와 강도의 신체적·감정적 시련을 겪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상수가 그 와중에도 부정적 정동들에 아주 장악당하지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공(空)한 데가 있어 무시로 타인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그 상상의 세계 속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사과하러 간 ‘백홍식당’에서 소년의 엄마가 상수의 입장을 헤아리는 말을 하자 “상수의 마음에, 그 막막하고 차가운 마음에 잠깐의 온기가 지나갔”(120면)고 그 온기 덕분에 금방 메뉴판의 ‘된장술국밥’이라는 단어에 끌려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 “자기 처지도 잊고 그러니까 저 엄마는 된장과 술국밥을, 아니면 된장술과 국밥을 팔아서 아들을 위하려고 섬에서 올라와서, 아들을 위해서 살고 있구나 생각했고 그러자 눈물이 핑”(121면) 돈다. 이 순정한 마음 덕분에 “상수는 형과는 최대한 다른, 아주 다른 인간으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결국 그 사건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꾼 건 상규가 아니라 상수”(123면)가 된다. 이 폭력 세계의 시련이 상수의 주체를 변화시킨 것이다.
상수가 페이스북에서 운영하는 연애상담 페이지 ‘언죄다’ 역시 마음을 나누고 수련하는 장이다. 그런 만큼 ‘언죄다’라는 가상현실은 특정한 소재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삶의 필수불가결한 영역으로 탐구된다. 게다가 상수는 여기서 ‘언니’로 불렸고 오랫동안 언니, 즉 여성으로 살아야 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공상수 팀장으로, 밤에는 집에서 ‘언니’로 표리가 부동한 이중생활을 한다.
어쩌면 이런 이중생활 때문에 상수가 회사에서 겉도는지도 몰랐다. 언니에서 공상수 팀장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집과—상수는 반드시 집에서 편지를 썼다. 보안을 위해—회사라는 두 공간의 이동으로 가능하지 않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존재가 전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 전이를 하기에 반도미싱에서의 생활은 상수를 언니도 오빠도 형도 아닌 자꾸 ‘그것’으로 느끼게 했다.(37면)
이 대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존재 전이’라는 표현이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노동자로 ‘존재 이전’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촛불시대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 대학생 다수가 이미 ‘알바생’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온/오프라인 공간 사이를 무시로 존재 전이하고 현실의 경계도 모호해지는 것이 이 시대 주체가 처한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 공상수 팀장에서 언니로의 전이가 아니라 언니에서 공상수 팀장으로의 전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수에게는 온라인에서 언니로 사는 것이 오프라인에서 물건(‘그것’) 취급당하는 현실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수의 이런 이중생활이란 우리 시대에 온라인 삶의 비중이 커졌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온/오프라인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삶의 공간인지를 묻는 가운데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사회현실)의 삶에 대한 비평적 거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온라인도 온라인 나름인데 ‘언죄다’ 페이지는 남성중심의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상처받은 여성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곳이기에 상수에게 “단 하나 삶의 의미였다.”(34면)
상수는 회사에서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처럼 여겨졌지만 경애는 상수가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158면)고 느낀다. 상수와 경애가 가까워지는 데는 서로를 이어주는 인연들뿐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마음의 질서’와 ‘자기윤리’에 따라 비평적으로 행동하는 서로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큰 계기가 된다. 가령 경애는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지만, 그렇다고 조직노동자들의 잘못된 관행까지 지지하지는 않는다. 반도미싱의 장기파업을 허문 것은 경애가 “파업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했기 때문”(25면)인데, 이로 말미암아 경애는 비난과 따돌림을 받게 되지만 조선생의 조언대로 사표는 던지지 않는다. 현실의 잘못된 논리와 관행과 싸우되 관념적인 근본주의는 아닌 비판적 현실주의의 태도를 지녔다고 하겠다.
상수가 경애를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은 지속의 삶과 마음에 대한 이 소설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상수는 경애가 ‘언죄다’의 ‘프랑켄슈타인프리징’ 님임을 알았으나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경애는 상수가 자신의 모든 속내를 들여다봤음을 알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며, 편지를 전자책으로 내자는 제안에 끝까지 응하지 않는다. 상수는 그럼에도 경애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끝날 무렵 상수는 “아마도 경애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처음으로”(349면) 한다. 이런 기다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수는 누군가 들어와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커피포트로 물을 데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둘러보는 것을, 책장을 채운 문고판 소설들과 비디오테이프들과,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포스터에서는 웃고 있는 배우들과 잘 말린 수국과 레이스를 덧댄 커튼과 언니들의 편지를 인쇄한 종이들과 물기를 잘 짠 행주와 손으로 메모한 자동차세 납부기일 같은 것들을. 그렇게 자신을 뒤로하고 서 있는 사람의 한편으로 기울어진 고개, 이제는 길어서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과 좁은 편의 그 어깨는 상수가 하루에도 몇번씩 상상해본 것이었다.(351~ 52면)
한 생활인의 공간과 그 속의 물건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연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대목은 「못」의 환해지는 순간과는 대조적인 질감이지만, 다른 방식과 분위기로 그런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연인의 시선으로 익숙한 자신의 삶의 공간을 둘러보는 순간, 그 속의 사물 하나하나가 차분하고 명징하게 자기됨을 드러낸다. 상수가 자기를 가다듬으며 기다린 끝에 이 순간이 도래했지만 무조건 기다린다고 해서 이런 순간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경애는 그간 상수가 자기 주변 사람들의 상처투성이 마음을 돌보기 위해 분투하면서 보여준 자기 마음의 질서와 생명력을 알아보고 믿기에 돌아왔고 상수는 경애가 그러리라고 믿고 기다린 것이다.
『경애의 마음』이 제시하는 가상현실은 실제현실의 한 부분이나 보완의 의미를 넘어선다. 실체론적인 사고에 매이지 않으면 가상현실도 실제현실도 아니되 어디에서도 접속 가능한 ‘제3의 영역’이 협동적 창조의 공간으로 열려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점에서 E가 말하는 ‘불타는 시간’, 즉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도 씬도 배우도 아니고 오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과 상영되는 영화 사이에 이는 그 순간의 시간이라는”(64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가 자기만 본 영화에 대해 열을 올려서 이야기하면 경애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E가 그렇게 혼자 몰입했던 시간과 마음의 동선에 신경이 쓰이면서 서운해지곤 했”(230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또다시 거기를 다녀오는 듯해서 싫”(231면)다고 항변했다. 그 ‘몰입의 시간’과 ‘마음의 동선’과 ‘거기를 다녀오는’ 행위가 다시 똑같이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거기’는 ‘문학 커먼즈’론에서 말하는 ‘제3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경애의 마음』은 작가가 『제인 에어』 같은 고전과 동시대의 숱한 소설과 영화와 음악과 SNS 페이지에 ‘몰입한 시간’과 그때의 ‘마음의 동선’과 ‘거기’를 다녀온 경험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단독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독자에게 또다른 ‘몰입의 시간’과 ‘마음의 동선’과 ‘거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고 있다. 촛불혁명 시대의 이 독특한 작품은 협동적 창조의 산물이자 그런 창조적인 작업을 가능케 하는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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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령 러시아혁명에서 이런 경향은 노동자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Proletkult)로 나타났는데, 뜨로쯔끼는 이와 맞서 싸웠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Leon Trotsky, Literature and Revolution, ed. W. Keach, tr. R. Strunsky, Haymarket Books 2005, 9~33면 참조.↩
- 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특히 2절 ‘리비스의 커먼즈론’(20~23면) 참조.↩
- 바디우 철학에 따르면, 혁명(정치적 사건)은 예술·과학·사랑의 사건과 더불어 ‘사건으로서의 진리’가 구현되는 중요한 형식이다. 혁명의 주체란 혁명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진리가 도래하는 순간 구성되며 그 진리 사건에 충실한 존재다. Alain Badiou, “The Ethics of Truths,” Ethics: An Essay on the Understanding of Evil, tr. Peter Hallward, Verso 2001, 40~57면 참조.↩
- 김성일 「광장정치의 동학: 6월항쟁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까지」, 『문화과학』 2017년 봄호 159면. 괄호는 인용자.↩
- ‘affect’의 역어.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정의, “정동하고 정동되는”(to affect and be affected)이 내포하듯, 존재(몸체)들 간의 만남 혹은 충돌 시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존재의 힘(역량), 존재들 간의 관계, 그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이 용어의 역어에 대한 논의와 들뢰즈의 해석에 대해서는 김재인 「들뢰즈의 ‘아펙트’ 개념의 쟁점들: 스피노자를 넘어」, 『안과밖』 43호(2017년 하반기) 참조.↩
-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8)의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8면).↩
- 손호철 「6월항쟁과 ‘11월촛불혁명’: 반복과 차이」, 『현대정치연구』 10권 2호, 2017년 8월, 78~79면.↩
- 이 개념에 대해서는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30~32면 참조↩
- 첫번째 단편은 『파씨의 입문』(창비 2012), 두번째 단편은 『아무도 아닌』(문학동네 2016), 중편은 『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에 실렸다. 중편에 대한 뜻깊은 논의는 황정아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62~67면 참조.↩
- 동물권운동의 관점에서 병원비가 비싸다고 해서 점순이를 매정하게 버리는—“알아서 처리해주세요”(41면)—금희의 태도보다 점순이에게 동변상련의 마음을 주고 각종 고양이용품을 사들여 돌보는 공의 태도가 낫다고 볼 소지가 많다. 그러나 금희는 점순이를 위로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데 반해 공은 필요한 만큼의 위로를 받은 후에는 금희를 떠나버리는 것과 같이 점순이를 그냥 떠나버린다.↩
- 김홍중은 마음이라는 용어를 “마인드mind보다 하트heart에 가까운 의미계열”로 다루면서 “인간의 인지·정서·의지적 행위능력의 원천을 종합적으로 지시하는 경향”에 주목한다. 참조할 만하지만 서양철학 중심의 입론으로 보이며 마음에 관한 동양적 사유와는 거리가 있다. 「마음의 사회학을 이론화하기」,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505~506면 참조.↩
- 정동과 마음은 유사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현상적으로는 상당히 겹칠 수 있다. 하지만 정동이 지속적인 변형 과정을 통해 온갖 경계를 무너뜨림에도 여전히 유(有)의 세계에 머무는 반면 마음은 천태만상으로 변하다가도 어느 순간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무(有無)의 경계에 매이지 않는 경지가 있다.↩
- 이와 관련하여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백낙청의 「통일시대·마음공부·삼동윤리」,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