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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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방’으로 귀환하는 글쓰기

이승우 소설집 『오래된 일기』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에리직톤의 초상」(1981) 이후 지금까지 이승우(李承雨)의 소설은 다양한 영역의 소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에 대한 성찰적 글쓰기를 끈질기게 시도해왔다. 종교적 구원과 원죄의식의 탐구에서 시작된 이승우의 소설은 최인훈(崔仁勳)과 이청준(李淸俊)의 소설을 잇는 개성적인 관념소설의 한 계보를 보여준다. 인간 존재의 불안한 내면의식을 파고드는 그의 소설은 가족서사와 소설가의 자기성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특히 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의 많은 작품들은 글쓰기가 단순히 문학적 영역에 머무는 행위가 아니라 실존적 자아를 탐구하는 근원적인 성찰행위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래된 일기』(창비 2008)는 이러한 이승우 소설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특히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방’이라는 공간적 상징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의식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개인의 내면탐구가 부각되어온 최근 소설들에서‘방’은 단자화된 개인과 소통부재의 현실을 표방하는 상징으로 자주 활용되어왔다.‘방’은 집단에서 떨어져나온 개인에게 방어기제를 선사하는 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안에 숨은 타자를 새로이 들여다보게 하는 부재와 혼돈의 공간이기도 했다. 『오래된 일기』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되는‘방’의 의미 역시 이러한 개인의 내면 탐색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일상과의 불화를 끊임없이 자각하며 자기만의‘방’을 찾아 귀환하고자 한다. 이 귀환의 과정은 때로 아버지를 축으로 한 가족서사에 대한 억압적 기억(「오래된 일기」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풍장-정남진행 2」)으로 나타나거나 결혼의 일상이 드러내는 속물적 허위의식(「타인의 집」 「방」), 타인과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위선적 삶에 대한 회의(「실종사례」 「정남진행」) 등으로 나타난다. 인물들이‘방’으로 귀환하는 계기는 허위적 일상에 대한 인물들의 절실한 대결의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사회화된 성인들이 다시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 부재의 가족사와 고통스러운 글쓰기 과정을 다루는 이승우의 소설은 근원적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개인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특히 「오래된 일기」와 「방」은 성장서사의 형식에 일상의 허위의식과 끈질기게 마주보는 인물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오래된 일기」의 주인공은 살부(殺父)의식의 자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며, 「방」의 주인공은 친자식처럼 키워준 큰어머니에 대한 책임감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두 소설이 내밀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족사의 구체적인 기억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의 기억들은‘방’으로 귀환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죄의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새로이 목도하는 자기 안의 낯선 타자다.

「오래된 일기」에서 병원에 누워 주인공에게 일기장을 읽게 하는 사촌‘규’는 주인공이 억눌러왔던 문학적 욕망의 기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방」에서 큰어머니는 방에 남겨둔 자신의 체취를 통해 기만적 일상에 억눌려 있던 주인공의 모습을 확인하게 한다. 이 지점에서‘방’으로의 귀환은 단순히 소설가로서의 자기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상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소설가의 글쓰기는 “하지 않은 말들과 하지 않은 행동들을 일깨”우는(「방」) 삶의 근원적 성찰행위로 자리잡는 것이다.

물론 자아의 심리적 모험의 여정에서 때때로 소설 속 기억과 사건은 자아의 육성을 들려주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로 축소되기도 한다. 「오래된 일기」에서 주인공의 내면적 고뇌와 갈등에 비해 사촌‘규’가 품었던 문학적 욕망의 실체는 선명하게 해부되지 않는다. 「전기수 이야기」에서‘노인’의 비밀스러운 사연은 일상 밑바닥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흐른다는 결론 아래에서 평범해진다. 「풍장-정남진행 2」에서 고향과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강박적 기억이 뚜렷한 실체를 명시하지 않은 채 모호한 지점을 남겨두는 것 역시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내면기술에 집중되는 관념적 서술방식이 종종 서사의 빈 구멍을 만들면서 소설의 주제를 직설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승우의 소설은 허위적 일상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인의 삶을 생생하게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준다. 이승우 소설의 인물들이 시달리는 이유 모를 죄의식과 강박은 결국 허위적 세계에 대응하는 정직하고 적극적인 반응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품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조차 회의하며(「실종사례」) 근본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비인간성과 이기주의를 힘들어한다.(「정남진행」) 어떤 소설이 이토록 절실하게 자기회의와 죄의식을 호소할 수 있을까. 글쓰기의 욕망에 숨겨진 불안의식과 두려움 속에서 힘겹게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그의 소설 인물들은 우리 내부에 웅크린 연약하고 벌거벗은 타자를 끊임없이 호출한다. 이승우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오랜 여운과 감동의 파장은 여기서 생겨난다.

개인과 일상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최근의 소설적 흐름에서 이승우의 소설이 보여주는 자기탐구의 양상은 지속적인 심화의 과정을 걸어왔다. “드러내려는 욕구”와 “은폐하려는 욕구”사이에서 길항하는 성장의 서사는 견고하고 치밀한 문체를 통해 미학적 완성도를 확보한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중진작가들이 보여주는 미학적 성취와 호흡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성을 지닌다. 기억의 서사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효서(具孝書)의 소설, 현실에 구체화된 생의 비의를 담담하게 포착하는 윤대녕(尹大寧)의 소설과 더불어 이승우의 소설은 일상에 대한 문학적 성찰의 수준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미끄러져나와 끊임없이 자기를 심문하는 혹독한 글쓰기의 과정은 쓰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작가의 비극적 운명을 실감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일기』는‘기억의 협곡’을 찾아헤매는 자아의 간절한 고투가 층층이 배어 있는 내밀한 고백록이라 할 것이다.

백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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