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민생이라는 말의 참뜻
10월 29일 저녁 핼러윈을 즐기려는 인파가 몰린 서울 이태원 골목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압사 사상자가 발생했다(사망 158명, 부상 196명, 2022.11.15 기준). 10만명의 인파가 예측되는 도심 행사였지만 당일 현장에는 안전사고를 막는 어떤 대비도 없었다. 이날 6시 34분을 시작으로 위험을 알리는 신고가 계속 접수되었으나 긴급한 상황을 지휘하고 구조를 도모해야 할 시스템은 가동되지 않았다. ‘예견된 참사’ ‘부재하는 대책’ 그리고 ‘국가는 없었다’(청년추모행동)라는 진단 그대로 국민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국가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번 참사는 도시재난에 대응하는 안전 시스템의 문제로만 한정할 수 없는 국정 운영 전반의 총체적 위기를 드러낸다. 세월호참사가 남긴 상처에도 불구하고 예방이 가능했던 재난을 거대한 참사로 키우는 일이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헌법 조항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애도기간이 신속하게 선포되었으나, 이는 진상규명 및 책임소재 파악을 회피하고 희생자, 유가족, 부상자는 물론 수많은 시민의 고통을 더하는 시간으로 소모되었다. ‘참사 희생자’가 아닌 ‘사고 사망자’로 애써 명명하는 것이나 ‘(참사와 그에 따른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주문 자체가 진상규명과 동떨어진 회피성 발언이거니와, 공직자의 비상식적이며 각성 없는 언어도 참담함을 느끼게 했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이니 공적인 책임을 묻기 어렵다느니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느니 하는 망언은 시민들에게 깊은 분노와 허탈감을 안겼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마땅히 이어져야 할 진상규명을 두고 사법처리 원칙만을 들이밀며 책임을 전가하는 정부의 대응 태도다. 대통령을 포함한 관련 공직자 누구도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은 채 일선의 경찰·소방 인력을 향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를 통해 법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어떠한 사안에 있어서든 법리적 해석만을 앞세우는 것이 반복되는 모습이며, 이 모든 과정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자로서의 정치적·도의적 책임에 대한 자각과 지성은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
오랜 우리의 전통에서는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민생과 민본에 중심을 둔 애민(愛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으로 강조되었다. 오늘날에도 신뢰받는 정치 공동체와 리더의 덕성은 국민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노인과 어린이를 보살피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돕고, 상사(喪事)를 애도하며, 병자를 돌보고 재난을 구휼하는 일은 지도자와 행정가의 기본적인 직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공익에 관련된 이러한 진심을 찾아볼 길이 없다. 민주공화국의 지도부가 국민을 향한 마음에 있어서는 오래전 유교국가의 사상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처참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안전보다 이익 창출을 우선하는 정책 방향은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약화하는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돌봄 분야의 예산이 줄줄이 삭감되는가 하면, 공장과 철도의 노동현장에서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사망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기업에 실질적 제동을 걸지 못하는 부실한 중대재해처벌법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경제정책 역시 불안하기 짝이 없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둘러싼 부실 대응과 레고랜드발(發) 사태의 전개 과정은 참사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더욱이 우리가 감지하는 위기가 국내 상황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반도 평화의 위기와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 위협과 군사주의의 부상은 민주주의와 사회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고, 심화되는 기후위기와 전쟁으로 인한 물가 불안정,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징후 역시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어려운 자리를 보듬는 현명하고 담대한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든 팻말에는 국가와 정부의 참된 기능을 묻는 말들이 가득하다. 그 촛불에는 세월호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게 나라냐’라는 근원적 질문이 들어 있다.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온 이 질문 앞에서, 과연 우리는 그동안 어떤 나라를 염원하고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가를 생각해본다. 민주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민생을 도외시하는 무능한 정치를 개혁하여 이루고자 했던 ‘나라다운 나라’는 어떤 것인가. 나아가 그 나라의 주인인 나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국민의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살펴야 할 국가 운영의 기초적 직무에 큰 구멍이 난 현실에서 이 질문은 거듭 뼈아프다.
그런 점에서 이번 참사에 대처해나가는 지금이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넘기 위해 중요한 순간임을 날카롭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공직자의 철저한 반성과 쇄신을 끌어낼 수 있는 공동체의 압력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국회 역시 진상규명을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법원은 행정부·사법부를 견제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사건의 진실 보도에 눈감고 있는 일부 언론과 공론장의 개혁 또한 체념하고 놓아둘 문제가 아니며 시민들의 비판적 사유와 토론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는 일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점에 와 있다. 거시적인 시야로 참사 이후 떠오른 과제 및 질문을 차분히 추리고 벼려보는 동시에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여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국가, 사회,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간절한 느낌을 사회 구성원들이 회복할 때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촛불의 염원 역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한순간도 사유와 반성의 힘을 늦출 수 없는, 모두의 지혜와 슬기를 모아야 할 긴박한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호 특집은 ‘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라는 주제로 꾸렸다. 기후위기, 자본주의와 노동 현실에 대한 문학적·담론적 차원의 진단과 폭넓은 작품 분석을 통해 이 시대 문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황정아는 거대서사의 층위에 주목하는 최근 비평담론의 공과를 세밀하게 점검하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비평적 사유와 문학적 질문을 새롭게 정초한다.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문학이란 그 변화의 경로를 사유하고 상상하는 ‘이행의 문학’이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지아와 권여선의 단편을 통해 문학이 키워가야 할 이행의 역량을 살핀다.
김미정은 최근 소설에 나타난 자본-노동의 관계 변화와 그 얽힘 양상을 분석한다. 장류진 임솔아 박서련 이서수 소설에 재현된 노동의 시대적 의미를 가늠하고, 오늘날 우리를 실질적으로 포섭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본주의체제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해방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양경언은 신동엽의 「시인정신론」을 경유해 기후-생태 복합위기에 요청되는 실천의 사례를 최근의 시에서 톺아본다. ‘전경인(全耕人)’의 마음가짐에 기반한 시적 상상력과 서정시의 재발견을 강조하며 이종민 정다연 조온윤의 시를 분석하는 가운데, ‘나’와 ‘우리’를 별개로 생각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희망을 구축해가야 한다는 제안을 내어놓는다.
근대문명을 형성한 세계관을 감각 차원에서부터 전환할 필요성을 전하는 김용휘의 글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기후위기 문제에 대한 발본적 사유를 담았다. 동학의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자연과 삶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생태적 감각과 미학적 감수성의 회복을 위해 문학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논지가 인상적이다.
논단에서 최원식은 임형택의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을 읽고 자상하고도 명쾌한 논평을 펼친다. 고전과 현대, 한국과 동아시아에 걸쳐 서사양식의 변천 과정을 해석한 저자의 독보적인 저작을 예리하게 탐문하는 비평적 시각이 돋보인다. 문장렬은 한반도 핵전쟁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는 최근 상황을 다각도에서 분석하며,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 및 피해 정도를 차분하게 규명한다. 평화가 비핵화의 우선적 조건이 되어야 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된다. 현장에서 하승수는 2024년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도 개혁을 숙고하는 글을 보내주었다. 개혁의 잠재적 주체들을 호명하고 여성과 청년, 소수자의 목소리가 좀더 폭넓게 반영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특히 대선거구 비례대표제의 가능성을 꼼꼼하게 검토한다.
백영경의 사회로 진행한 대화에는 강이수 김현미 엄혜진이 참여하여, 대학개혁의 필요성과 페미니즘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참여자들은 페미니즘 관점으로 대학 현실을 짚어보는 것이 곧 우리 사회 민주주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과정임을 강조하며 미투 이후 대학의 변화, 대학 내 성평등기구의 역할, 페미니즘 지식 생산과 교육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산적이고 열띤 토론을 펼친다.
인아영의 문학평론은 게임·장르 서사에서 끌어온 ‘루프적 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성수나 정영수 김연수의 최근 소설에 나타난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흥미롭게 탐색한다. 문학초점은 지난 봄호에 이어 지역 탐방 두번째 기획으로, 경북 안동의 ‘시집도서관 포엠’에서 진행했다. 김선애 사서교사, 안상학 시인과 임정균 문학평론가가 참여해 이번 계절의 주목할 작품들에 대해 진솔하면서도 예리한 감상을 들려준다.
작가조명에서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는 정지아 소설가를 후배 소설가 임현이 만났다. 작가의 유년기 기억부터 아버지의 전기적 삶을 문학적 허구의 공간에서 새롭게 재현하는 과정, 풍부한 인물 군상에 대한 모티브 등 소설의 탄생 비화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김봉준의 산문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하면서 창의적 예술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더해온 마당문화예술의 역사를 조명한다. 촛불대항쟁기에 변혁적 시민운동으로 대합류하는 마당문화예술의 현재적 의의가 새롭게 다가온다. 기획 연재 4회를 맞은 ‘내가 사는 곳’에서는 박대우 출판편집자가 강원도 고성 아야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불이 잦았던 고장의 역사와 함께, 함경도 이북 사람들이 정착해 만든 공동체의 고유한 분위기가 필자의 애정 어린 눈길을 통해 세심하게 그려진다.
창작란도 풍성하다. 시란에서는 김근에서 최백규에 이르는 열두 시인이 다채로운 시적 개성으로 자리를 빛내주었다. 소설란에서는 김이정 박민규 박서련 이서수 이재은의 신작 단편이 독자를 반기며, 이주혜의 장편연재가 결실을 맺는다. 연재에 뜨거운 호응을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단행본으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린다. 매호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선정해 소개하는 촌평란에도 따뜻한 관심을 부탁드린다.
제37회 만해문학상은 본상에 김명기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특별상에 장애인언론 비마이너가 기획하고 정창조 등 7인의 기록활동가가 참여한 『유언을 만난 세계』가 각각 선정되었다. 제24회 백석문학상은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돌아갔다. 수상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대형 참사의 비극이 남긴 분노와 슬픔으로 모든 이들의 마음이 무거우리라 짐작한다. 이번 계절에 잡지를 꾸리면서 필자들이 보내온 글 곳곳에도 깊은 충격과 더불어 고통과 슬픔에 연대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며, 부상자들의 조속한 쾌유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본지 역시 성찰의 자세를 가다듬고 모든 마음과 힘을 모아서 이 어렵고 힘든 국면들을 차분히 헤쳐나갈 수 있도록 정진하고자 한다.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