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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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희망버스’가 보여준 연대의 가능성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지지하는 ‘희망버스’ 기획이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며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 꼭대기에서 농성하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지지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모였다.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도 각종 매체를 통해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지지하는 전언을 보내왔다. 200일 넘게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역시 틈틈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대중과 다양한 방식으로 공감을 나누고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희망버스는, 구체적인 노동 현안을 바탕으로 시민의 공감과 참여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촛불시위가 보여준 연대의 가능성을 새롭게 확장했다.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공분과 자각, 복지와 공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연대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기초생활비를 보장받지 못한 노인들의 자살이 급증하고, 중산층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대학등록금의 가파른 인상으로 청년들은 불안과 좌절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무차별적 개발계획 탓에 재해를 겪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늘어났다. 김진숙의 농성과 그를 지지하는 희망버스의 행렬은 이렇듯 더이상 묵인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황폐하고 참담한 실상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비판을 보여준다.

“가진 자들의 편에 선 권력과 자본의 행태들과 약자들의 소외 전반에 대한 분노”와 “저항과 연대”(문화예술인 희망버스 지지선언 「정리해고 없는 세상, 희망이 이긴다」)를 폭넓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희망버스 기획은 풍부한 미래적 동력을 지닌다. 김진숙의 농성과 희망버스가 만들어낸 연대와 소통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만 머물 수 없다. 희망버스가 말하는 ‘희망’은 당장의 해결방도를 찾는 차원을 넘어, 지금보다 나은 삶의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고 실현해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희망버스가 보여준 자발적 연대의 가능성은 ‘이명박 이후’ 2013년체제의 전망하에서 폭넓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 공유하는 평화체제 구축을 핵심 의제의 하나로 놓는 2013년체제 구상은 분단체제의 인식에 기초하여 포괄적인 시야 속에서 한국사회가 당면한 긴박한 과제들을 성찰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체감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모순과 민주주의의 퇴행은 분단현실이라는 한층 근원적인 구조 속에서 격화되고 있다. 고용불안과 생태 파괴, 인권과 복지의 문제도 현실적인 대응책을 찾되 온전한 해결의 전망을 위해서는 한반도적 시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남과 북을 아우르며 ‘평화, 복지, 공정’의 주제를 성찰하는 2013년체제 구상의 취지는 단순히 현 체제에서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나은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권과 시민사회 전체의 지혜를 결집하는 실천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반인권, 반생태, 반민주주의에 맞서는 희망버스의 연대적 상상력 역시 이러한 지평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촛불시위 군중의 구호들이 모두 정책이 되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었듯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요구 역시 곧바로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는 책임있는 정치인과 지식인, 전문가 들의 또다른 기여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통해 우리는 ‘이명박 이후’ 2013년체제의 구상에서 시민의 역량이 어떠한 방식으로 녹아들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상기하는 것이지만 모든 연대의 출발은 자신이 딛고 있는 불안한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직시 속에서 이루어진다. 희망버스 지지선언의 한 대목을 다시 빌리자면 85호 크레인 위에 선 김진숙의 모습은, 저마다의 고달픈 삶의 크레인 위에 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크레인 위에서 “모진 바람과 투석전 같던 비와 살갗을 벗기는 햇살과 긴 시간의 불안과 폭력”(김진숙 트위터 @JINSUK_85)을 견딘 후에야 방울토마토가 열린 것처럼,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 씨앗들 역시 막막한 두려움의 시간을 통과해야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절실한 메씨지를 보내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고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공감하는 우리 자신의 진정성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이제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준비와 구상을 바탕으로 결연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때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와 불안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는 사회적 연대의 활력 및 ‘더 나은 체제’의 준비과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자 한다. 체제론의 심화된 분석에서부터 중산층의 위기, 청년들의 불안과 소외, 노인문제, 지역문제에 이르는 폭넓은 현실 진단과 대안 탐색을 담았다. 김종엽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화(物化)와 주체 위기의 현상이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는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재생산 위기를 심도있게 고찰한 후, ‘더 나은 체제’로서 남북이 함께하는 2013년체제 구상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새로운 체제의 운영원리인 ‘평화, 복지, 공정’의 개념을 세심하게 분석한 이 글은 위기를 극복할 희망의 자원으로서 연합정치와 자발적 시민연대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김현미는 한국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원동력이던 중산층이 겪고 있는 난관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교육 위기, 저출산과 젠더갈등, 문화적 혼종성의 불안을 현실의 세목들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구체적 실감을 주는 글이다. 엄기호는 우리 시대의 청춘이 절감하는 사회경제적 현실과 불안 심리를 깊게 파고든다. 사회적・경제적 위치의 추락과 실업의 압박에 직면한 청년들이 제기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읽어내면서, 세대를 넘어 연대를 실천하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유시주는 현재의 지역간 불균형이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환기하면서 참여정부에서 주도한 내생적 지역발전론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짚은 후, 지역살리기와 관련한 시민사회의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 김대호는 우리 현대사를 폭넓게 조망하는 속에서 53년체제의 해체와 87년체제의 한계라는 문제틀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분단체제의 재구성 및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를 위해 지식인집단과 정치권의 준비를 촉구하며 ‘이명박 이후’ 새로 만들어갈 2013년체제의 핵심 과제를 논의한다.

논단과 현장에서는 김흥규의 글이 민족주의와 근대의 인식 문제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이어간다. 황종연의 반론에 답하는 이번 글은 신라통일론, 민족주의 생성의 조건, 민족주의 대두와 전근대의 유산 문제를 중심으로 치밀한 반박을 펼친다. 이번호에 그간의 쟁점을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근대 인식에 관한 논의를 한단계 끌어올릴 사회과학도의 글이 실릴 예정이었으나, 필자 사정으로 다음호로 미룬다. 홍성태의 글은 원전 의존국가인 한국의 위험한 상황을 일깨우며 핵발전을 폐기하고 생태민주주의의 길로 전환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한다. 미국대학 우월론의 허상을 벗겨내는 하워드 홋슨의 글도 우리 대학문제를 풀어가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사회인문학 연속기획’에서는 유재건이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을 극복하는 과제의 일환으로 맑스의 반체계의 ‘단일한 과학’ 구상이 지닌 현재적 의미를 고찰한다.

이번호 대화란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취지로 중국의 저명작가 한 샤오꿍을 초대했다. 문학평론가 백지운과의 대담 에서 한중 양국 문학의 활발한 교류, 상업주의가 주도하는 출판시장의 문제점, 문화혁명 전후 중국문학의 흐름, 세계문학의 시야에서 전망하는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미래가 폭넓게 다뤄진다.

창작란 역시 풍성한 읽을거리다. 시란에서는 김기택을 비롯해 열두명의 시인이 다채로운 시세계들을 펼쳐보인다. 소설란에서는 첫회에 이어 흡인력을 더해가는 은희경의 장편연재와 조경란, 최민석의 단편소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영화평론가 김혜리의 깊이있는 산문도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문학평론란은 우리 문학현장의 중요한 쟁점을 짚으면서도 중진과 신인의 작품세계를 고루 담아내고자 했다. 고(故) 박완서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소설세계에 내장된 전쟁체험의 기억을 사회사적 현실과 연관시켜 섬세하게 분석한 염무웅의 글, 시와 정치의 소통을 추구하는 최근의 비평 논의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김종훈의 글, 장르를 넘나드는 서사실험을 통해 개성적 특징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분석한 강지희의 글이 독자를 찾아간다.

작가조명에서는 『두근두근 내 인생』을 출간한 김애란을 만난다. 세대를 아우르는 따뜻하고도 예리한 감수성으로 호응을 얻고 있는 이 소설에 대해 영화감독 윤성호와 평론가 강동호가 작가 인터뷰와 작품론을 보내주었다. 이번 계절의 중요한 신작을 선정해 리뷰하는 문학초점과 여러 분야의 좋은 책을 두루 소개하는 촌평 및 문화평도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올해 만해문학상은 천양희 시인이, 신동엽창작상은 송경동 시인과 김미월 소설가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세분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더불어 본지가 제정한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공모가 곧 마감을 앞두고 있음을 알리며 의욕적인 투고를 부탁드린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성원을 아끼지 않는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모든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기울이고 부단히 정진하는 열린 창비가 될 것을 또 한번 다짐한다.

白智延

백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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