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등단.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말의 온도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고집한 건 어머니였다. 이혼한 딸내미가 떡하니 안방을 차지하고 늙은 어머니를 사랑방으로 내쫓는 꼴이었다. 오랜 이웃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그럴 거면 이사를 오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자 어머니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젊을 적에는 사랑방에 손님들이 들끓었어야. 남정네들이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삼시세끼 따신 밥상 척척 받아감시로 시나 읊어대는디 고거이 고로코롬 부럽드란 말이다. 죽을 날도 지났는디 나도 고로코롬 펜하게 살아볼란다.
사진 찍는 것도 불편해하는 어머니가 그날따라 대종상 여우주연상감이라 해도 손색없을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바람에 나도 깜빡 속고 말았다. 부랴부랴 사랑채 방 한칸을 개조해 욕조를 들이고 비데를 설치했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 칠십년 넘게 살아온 집에서 사랑방 손님으로 옮겨갔다.
본채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사니 편하기는 했다. 아마 어머니의 의중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는 법, 하루 세번 밥 차려 나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족도 아닌 손님들의 밥상을 하루 세번 어머니는 어떻게 해 날랐을까. 어머니가 건너왔을 세월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벌써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생 제시간에 밥을 먹어온 어머니의 배꼽시계는 전자시계보다 정확했다. 7시에 아침밥을 먹으려면 적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했고, 어머니 모신 지 이년 만에 나도 시계처럼 정확하게 눈을 뜨는 신기를 갖게 되었다.
아이, 비도 온디 멀라고 아침을 갖고 왔냐? 먹을 것 천진디.
다행히 가는 봄비라 우산을 쓸 것도 없었다. 포슬포슬 내리는 비에 벚꽃이 투명하게 젖어가는 아침이었다. 나는 쟁반에 들고 온 것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우산 받치고 들고 올라먼 무거왔겄다이. 나가 오래 상게 니가 고상이다.
시간 맞춰 들고 오는 게 번거롭기는 해도 무겁지는 않았다. 평생 위병을 앓은 어머니는 뭐가 됐든 새 모이만큼 먹었다. 오늘 아침도 반 공기 남짓한 콩밥과 소고기뭇국, 조기구이, 접시 하나에 한젓갈씩 모아 담은 숙주나물과 애호박나물, 미역줄기무침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다 나를 위한 찬이었다.
아이고, 진수성찬이다이. 힘든디 멀라고 반찬을 요로코롬 많이 했냐?
다 내 반찬이야. 나 먹으려고 했구만 또 쓸데없는 걱정이다.
나도 된장찌개 좋아해야. 멀라고 내 반찬을 따로 허냐, 성가시게. 그냥 된장찌개만 해오제.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는 된장 없이 단 한끼도 먹지 않았고, 해서 우리 집 밥상에는 사시사철 끼니마다 각양각색의 된장국이나 찌개가 올랐다. 말갛게 끓여 각자 입맛대로 매운 고춧가루 팍팍 넣어 먹는 동탯국이나 무조림, 무생채, 상추겉절이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전까지 나는 그게 우리 집안의 식성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모시기 시작한 초창기에 어머니는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어른 한숟갈 정도나 겨우 먹고는 아이, 많이 묵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닮아 음식 솜씨가 나쁘지 않았고, 어머니가 해준 대로 했는데도 그랬다. 너무 먹지 않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무렵, 오랜만에 비 내리는 숲을 보고 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 오는 날이면 호박전 부치던 기억이 났다. 우리 식구 누구도 기름진 전을 좋아하지 않아 깨작거리다 말면 어머니 혼자 남은 전을 먹으며 중얼거리곤 했다.
비 오실 적에는 전인디……
혹시나 해서 가늘게 채 썬 호박을 듬뿍 넣고 밀가루는 조금만 넣고, 어머니가 해주던 대로 호박전을 부쳤다. 밥 한숟갈 겨우 먹던 어머니가 호박전을 두장이나 맛있게 먹었다. 내가 알고 있던 우리 집안 식성은 아버지 유전자의 식성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내가 발라놓은 굴비를 한점 먹고는 동자승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아이, 조기가 참 맛나다. 나가 딸을 잘 둬가꼬 늘그막에 이런 호사를 다 누린다이.
호사는 무슨. 서울 사람들은 더 좋은 것만 먹고 사는데.
아이가. 끼니마동 고기며 생선으로 배를 채우는 사램이 시상 천지에 워디 있다냐? 나만치 복 많은 사램 있으먼 나와보라 그래라. 나는 삼시로 요로코롬 큰 조기는 보도 못했다.
엄마 효자 아들이 보낸 거야.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내가 귀향한 뒤로 어머니는 늘 그랬다. 나를 고향으로 내려보낸 장본인은 큰오빠였다. 어머니 빼닮은 큰오빠는 어머니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허리도 안 좋은 어머니가 혼자 어찌 사시겠냐며 날마다 전화를 걸어 걱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잔소리 많은 것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오빠 등쌀에 나는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귀향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나를 등 떠밀어 보내놓고 정작 오빠는 고향에 잘 오지 않았다. 하기는 고향을 떠난 뒤 나도 그랬다. 명절 때, 부모님 생신 때나 겨우 고향을 찾았다. 늙은 부모가 둘이서 어떤 세월을 보내고 있을지는 관심 밖이었다. 나 살기도 바빴다. 오빠도 그럴 터였다.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 정년퇴직한 오빠는 대기업 이사네 뭐네, 교수 시절보다 더 바쁘게 사는 모양이었다. 알면서도 간혹 배알이 꼴리는 것은 내려가라 등 떠민 장본인이라서였다.
긍게, 니가 고상이 많다. 조기 굽는 것이 월매나 힘든디……
하나도 안 힘들어. 생선 굽는 기계가 있다니까. 올려놓으면 뒤집을 필요도 없이 그냥 구워지는데 뭐.
내가 내려오기 전만 해도 어머니는 커피포트로 물도 끓이고 전자레인지도 쓸 줄 알았다. 직접 밥을 하지 않게 된 뒤로 어머니는 기계 조작법을 자꾸만 잊어버렸다. 기를 쓰고 혼자 사는 편이 어머니의 기억력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효자 아들이 어머니의 기억을 더 빨리 지운 셈이다.
그러냐? 참말 좋은 시상이다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일찍 죽은 사램들만 불쌍허제.
어머니가 가스레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십년 전이었다. 우리가 가스레인지를 사준다고 해도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 무렵엔 읍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도로 포장도 되지 않은 우리 집에까지 가스 배달을 해주지도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들인 뒤에도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이 내려오면 굳이 아궁이에 불을 피워 숯 위에 생선이나 고기를 구웠다. 숯 향기가 배어 훨씬 맛있기는 했지만 불 앞에 쭈그려 앉아 수시로 석쇠를 뒤집어야 했다. 그 고달픈 노동으로 어머니는 우리의 배를 채웠다. 어머니는 자기 앞에 놓인 굴비구이도 그만한 노동을 거쳐 나온 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