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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하루

이향규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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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그곳이 더 그리워지는데, 하필이면 바로 추석이었다. 내가 아는 한국인 이웃들에게 다 연락했다. 추석날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그래봐야 이 작은 도시에 사는 한국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M과 S가 온다고 했다. 다행이다. 두명이라도 와줘서. 덕분에 추석날이 여느 수요일이 아니라 민족의 명절이 되겠다. 음식을 나누는 것, 내겐 그것이 명절이다. 잔칫상을 차리리라.

 

아침 / 소포

 

아침부터 설렜다. 한국에 보낼 소포가 있어서 우체국에 가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내가 기쁘니 사람들이 다 기뻐 보였다. 평소에 무뚝뚝했던 우체국 직원도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시시한 물건들을 부치는데 무게가 2.09Kg이었다. 90g만 줄이면 송료가 반값도 안 된다고 조언해줘서 포장을 다시 했다. 감사하다고, 오늘은 한국의 큰 명절인데 당신의 친절이 오늘의 첫 선물이라고 얘기해줬다. 자꾸 오늘이 추석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받는 사람 주소를 스크린에 입력하는 데 Korea라고 치니 인공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떴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노스(North)를 누를까봐 조심해서 사우스(South)를 눌렀다. 이 두 사회가 늘 이렇게 동급으로 표시될 때마다 ‘남한이 북한보다 40배는 더 잘살거든요’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북한에서도 추석 명절일 거다.

 

정오 / 사과

 

길거리에 농산물직거래장이 열렸기에 기웃거렸다. 사과를 파는 잘생긴 노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이 마을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어서 “저는 이곳에 살아요”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예쁘단 얘기를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 빈말에도 속절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내 티셔츠에 적힌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떠돌아다니는 모든 이들이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J. R. R. 톨킨(Tolkien)의 말이라고 얘기해줬다. 한국에 갔을 때 산 옷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말이라고 상표에 적혀 있었다. 그는 ‘오! 톨킨이냐?’고 했고, 나는 그렇다고 답하는 내가 좀 멋져 보였다.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wandering about) ‘사과를 사고는 또 그렇게 떠나시는군요’(wandering off)라고 말장난을 했고, 나는 좋은 하루 보내시라고 인사했다. 사과봉지를 들고 집에 오면서 나는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 건지, 떠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잠깐 생각했다. 길을 잃지만 않았기를.

 

오후 / 전

 

명태전, 호박전, 꼬치산적, 고기완자, 새우전 부칠 준비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산적꼬치 끼우는 것을 시켰다. 어릴 적부터 그건 어머니가 우리에게 시켰었다. 좀더 커서는 전 부치는 일을 했다.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줬다. 얌전하게 전을 부치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엄마가 전을 예쁘게 부쳐서 너희들이 이렇게 예쁘다고 했더니, 막내가 그래서 자기 얼굴이 전처럼 생겼느냐고 물었다. 두 딸이 마주 앉아 전을 부쳤다. 집어먹어가면서. 내가 어릴 적에 그랬듯이.

 

어머니는 늘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었다. 추석 때는 언제나 새벽에 기다리고 있다가 우유배달부와 신문배달부에게 선물을 건넸다. 성탄 때도 그러셨다.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얘기했더니, 엄마는 할머니를 닮았나보다고 말해줬다. 전을 부치면서 이런 덕담을 나누는 추석날 오후, 평생 기억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순간들은 이런 날일 거다.

 

저녁 / 밥

 

S가 아이 둘과 함께 왔다. 와줘서 고마웠다. 엄마 혼자 키우는 아이들. 괜히 엄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짠한 마음이 들어서 오늘 명절상은 이 가족을 위해서 준비한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을 위해 닭강정도 튀겨놓았다. 꼬마 아가씨는 우리 딸들을 잘 따랐고, 오빠도 표정이 편안했다. 그럼 됐다.

 

M이 남편과 왔다. M은 영국에서 20년 살면서 이렇게 추석 쇠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S도 이곳에 온 지 8년 만이라고 했다. 다들 여기서 오래 살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겨우 넘기면서 이제 고작 일년 반을 보냈을 뿐이다.

 

토란을 구할 수가 없어서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송편도 없다. 한국에서 그렇게 흔한 것들이 여기선 한없이 귀하다. 그래도 좋았다. 모여서 같이 먹으니. 그리고 엄마들이니. 엄마들은 보통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다고 생각한다.

 

밤 / 모닥불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가 불을 피웠다. 따뜻함을 주기로 모닥불만한 것이 없다. S가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둘째가 뱃속에 있을 때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세살 난 아들을 데리고 절벽 끝에 섰단다. 그때 아들이 “엄마, 바다가 참 예뻐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그 아들은 이제 열한살이다.

 

나는 아이들이 참 잘 자랐다고, 엄마가 애를 많이 쓰셨다고 말해주었다. S는 눈물로 키웠다고 말하면서 웃었고,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애썼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굴에 모진 흔적이 거의 없었다. 맑은 기운마저 느껴졌다. 누군가의 불운이 위로가 될 때, 그건 그가 나보다 더 불행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존엄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마운 것은 나였다.

 

명절 / 기억과 위로의 시간

 

나는 그동안 타지에서 한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반성 673」)로 시작하는 김영승의 시가 생각났었다. 서럽다고 해야 할지, 부끄럽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런던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일부러 길을 돌아갔고, 외국생활 하면서 한인회를 찾지도 않았다. 굳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같이 나눌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안다. 그게 주는 편안함. 지금은 그게 더 좋은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건지, 외로워지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이번 추석에서 내가 얻은 것들이 적지 않다. 찾아오는 사람을 위해 명절음식을 준비했던 오래된 기억이 돌아왔다. 그게 우리 어머니에게서 나로 그리고 다시 우리 아이들로 이어져서 다행이다. 불가에 앉아 나눈 엄마들의 시간도 좋았다. 우리가 아이 손을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지를 서로 알아주는데, 모닥불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몸속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설날도, 내년 추석도 이렇게 보내야 할까보다. 그래서 여느 평범한 날을 ‘명절’로 만들어야 할까보다.

 

그날 밤, 연일 흐리고 비가 왔던 하늘에, 선물처럼 보름달이 떴다.

 

이향규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영국 거주

2017.10.11.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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