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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구원과 페미니즘: 벨 훅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그리고 여성혐오 폭행(살인)사건

선우은실

bell 100‘묻지 마 폭행’이라는 말 뒤의 혐오 정서와 폭력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강남역살인사건’(이하 ‘강남역’)을 겪은 뒤 폭행의 ‘이유 없음’의 저변에 혐오 정서가 자리해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남역’은 이 땅의 여성이 약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손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이유로 때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워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성별에 의한 혐오 폭행(살인)사건은 ‘강남역’으로 끝나기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부평에서 한 남성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둔기로 내려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둘은 초면이었으며, 범인은 아르바이트생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느껴져 그녀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뒤쫓아 폭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강남역’과 유사하다. ‘여성’을 표적으로 했다는 점, ‘여성’에게 무시당한 기분이었다고 이유를 밝힌 점이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이유의 이면에 자기보다 약한 자가 ‘감히’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꼈다는 점, 약자에게는 상해를 가함으로써 서열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가부장제의 논리와 일치한다. 벨 훅스(Bell Hooks)는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김순영 옮김, 책담 2017)에서 가부장제를 “남성은 선천적으로 우세하며, 약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존재(특히 여성)보다 우월하고, 그 약한 존재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권리, 그리고 여러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 테러리즘과 폭력을 통해 그 지배를 유지할 권리를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는 정치사회 시스템”(52면)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선천적으로 부여받았다고 믿는 ‘지배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폭력성을 동원하여 지배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부장제이다.

 

벨 훅스는 성차별, 여성혐오로 인한 사회의 부조리와 같은 문제의 근원을 가부장제에서 찾는다. 이때 가부장제는 여성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또한 억압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유약함으로 치부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은 감정을 공유하고 드러내는 관계를 꺼리게 된다. 이는 대화보다는 폭력과 권력에 복종하는 방법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폐단이다. 따라서 여성/남성의 대립을 강조하기보다는 둘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글의 골자이다.

 

벨 훅스의 논리는 가부장제의 또다른 희생자인 남성의 존재를 버리지 않고 함께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존재로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에의 반영이 매끄럽게 수행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벨 훅스의 가부장제에 관한 정의와 분석은 현재 한국의 여성혐오 범죄의 기저를 설명하기에는 알맞으나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의 남성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 얼마만큼의 해답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여성인 ‘나’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여성’의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상황에서 남성을 구원하자는 말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벨 훅스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지점은 있다. 여성해방과 여성(자신)의 구원은 오로지 여성의 몫이어야만 하는가를 묻을 때 그러하다. 애초에 근본적인 원인이 가부장제와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남성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면 해결책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성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이 가부장제와 대다수의 남성에 있다면 문제의 해결 역시 그들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돌파구는 오히려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벨 훅스의 이론을 현실에 좀더 적용해보자. 여성혐오를 전제한 폭행(살인)은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이 ‘남자다움’을 획득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강제적으로 학습한 결과이다. 이때 ‘남자다움’은 “가부장적인 남성성”에 의해 자처된 남자다움을 말하며 “감정학대”에 따른 자학적 측면을 포함한다. 남성도 여성도 원하지 않은 남(여)성이 되는 것의 기저에는 결국 가부장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은 ‘피해자 여성’만의 것처럼 여겨졌지만 실제로 남성들 역시 큰 피해자의 자장 안에 자신들이 핵심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마주해야만 한다.

 

가부장제 안에서의 ‘남자다움’을 휘두르면서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데 어떤 식으로도 면죄부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떤 이가 자신을 사람을 증오하지 않고는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살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혐오범죄를 단죄하기 위해서라도 가부장제를 연구하고 자신이 거기에 얼마만큼 종속되어 있으며 스스로 어떻게 그것을 걷어내야 할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벨 훅스의 이론이 현실적용이 어려워 보일 뿐만 아니라 다소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더라도 근원적인 지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유효하다.

 

‘남성을 구원할 수 있는가’를 천착하는 것은 결코 남성‘만’을 구원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 깊숙하게는 ‘여성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근본적으로는 ‘인간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부장제의 영향권 속에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다. 어떤 시간 동안 가부장제를 (자타의적으로) 학습(당)했다. 또한 내 주변에는 ‘가부장’적인 가족과 친구도 있다. 그들 모두와 함께 갈 수 있으리라 자신하지 않는다. 내게는 누군가를 구원할 의무도, 책임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가부장제를 학습하여 내 삶에 해를 끼치는 남성 혹은 인간을 ‘제거’하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삼지 않는다. 다만 가부장제 안에서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 그들 중 누군가를 건져 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나와 당신 각자 몫만큼의 역할이다.

 

선우은실 / 문학평론가

2018.1.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