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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자 지구에서 두 발이 떨어져버렸다

김재훈

예멘에 내전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기 전엔 몰랐다. 지구가 이렇게 발붙이기 어려운 행성인지를. 자국민을 죽이는 데 동원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지구로부터 발이 떨어져버렸다. 지구의 표면이 땅과 바다로 구성돼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땅과 바다 이전에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지구를 뒤덮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떠 있어야 했다. 나라를 떠나 가족들로부터 70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은 없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제주로 온 예멘인들, 그리고 공포를 파는 사람들

 

예멘인들이 예멘을 떠나 제주로 오게 된 경로는 제각각이다. 보통 두세 나라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생활은 어려웠다. 많은 경우 식당 등에서 일하며 4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았다. 생계를 꾸리고 예멘에 남은 가족들에게도 돈을 부쳐야 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꾼 이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예멘인들은 이런저런 한국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제주로 올 수 있었다. 외국인 무사증(비자) 입국을 가능케 한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시행, 박근혜-트럼프가 유발한 남북 갈등 증폭, 사드 미사일 설치에 따른 중국의 반발과 중국 관광객 감소 등. 행정 당국은 동남아 관광객을 유치해 중국인 관광객 감소 문제를 타개하고자 했고, 그 결과 제주-말레이시아 직항노선이 개설됐다. 이 항공노선을 통해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던 예멘인들이 ‘세계평화의 섬’ 제주도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예멘, 예멘 난민, 무슬림에 대한 온갖 가짜뉴스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옛 기억 하나. 30년 전 초등학교 미술시간이다. 모든 친구들이 일제히 머리에 뿔이 달린 북한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이빨도 뾰족했다. 이마에는 별을 그려 넣었다. 때려잡자. 무찌르자. 뿔을 가장 크게 그린 친구가 반공포스터 그리기 시간에 최우수상을 받았던가. 그러한 주입식 공포교육은 성공적이었다. 뿔 달린 북한사람에게 쫓기는 꿈도 몇번인가 꾸었으니까. 그 영향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최근 화해무드 속에서 바라보는 북한사람들의 얼굴이 영 낯설기만 하다. 세뇌가 이렇게 무서운 장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난민 반대세력은 예멘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사회의 노력을 ‘감성팔이’라고 비난하면서 ‘공포팔이’에 열중하고 있다. 감성팔이? 감성과 공감은 인간 지능의 일부다. 그러나 공포는 지능의 마비일 뿐이다. 공포는 대상에 대한 이해 부족을 반영한다. 이해가 부족할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다. 직접 대상을 공부하고 대화하며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공포를 해소하거나, 아니면 눈을 감은 채 망상 속에서 뿔과 날카로운 이빨을 그려 넣거나.

 

난민 반대세력의 선택은 이해의 공백에 가짜뉴스와 선정적인 이슈를 채워 넣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는 공포와 혐오를 납득시키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정부와 언론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음모론도 가미된다. 이들은 이렇게 내가 초등학생 시절 상상력으로 그린 북한사람처럼 한없이 무서운 예멘인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딱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랴. 인지부조화에는 백약이 무용한 것을.

 

문재인정부가 들어서고 악마화할 수 있는 대상이 마땅치 않은 지금, 극우세력이 겨냥하는 타깃 또한 바뀌고 있다. 한국사회의 내재적 부조리를 이해하고 해결하기보다 타자에게 전가하려는 시도의 연속. 그간 우파 진영은 한국사회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부조리를 북한에 전가하면 됐다. 현재는 다른 약자들을 주목하는 모양새다. 인종주의적 파시즘의 특성이 드러난다. 난민 문제를 둘러싼 극우정치인, 일베, 워마드, 일부 극성 개신교인들의 연대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조합이다. 급조된 예멘 난민 반대세력의 대표적인 전략은 공포의 유포다. 공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대상들을 포섭하는 전략. 여성 및 아이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이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듯도 하다.

 

공감과 연대의 경험

 

난민 반대세력의 대표적인 구호 중 하나는 가난한 한국인도 많은데 왜 외국인들에게 세금을 쓰냐는 것이다. 그러나 난민 반대세력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예멘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시민사회진영 및 ‘인권 지능’이 높은 봉사자들이야말로 가난하고 어려운 약자들을 위해 힘써온 이들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예멘 난민 신청자들의 바람은 시혜적인 온정을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예멘인들은 의류나 음식 등을 제공받고 있어 고맙지만 하루하루 자존감이 떨어져간다고 털어놓는다.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땀 흘려 돈을 벌어 예멘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즉 사회의 일부로 기능하며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달라는 부탁일 뿐이다. 이토록 물컹물컹한 지구에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예멘인들이 빠르게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봉사자들은 한국어 교실을 열었다. 한국어 교육 봉사에는 여고생들도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예멘인에 대한 어른들의 왜곡에 치를 떨었다. 나 역시 우연한 계기로 한국어 교육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어느날 수업이 끝날 무렵 예멘인들은 ‘사랑해요’ ‘기뻐요’ ‘슬퍼요’ 등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예멘에 남은 가족들과 통화할 때 말하고 싶다고. 그날 밤 사랑해요라는 말이 7000km을 날아서 예멘에 남은 아내와 자녀, 부모님의 귀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지난 6월 예멘인 20여명과 한국인 10여명이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멘인들은 70여년 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큰 시련을 겪은 제주도민들의 아픔에 공감했다(제주4·3 당시 일본으로 떠난 4·3난민은 5000명에서 1만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4·3평화공원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물을 보면서 ‘지금의 예멘과 똑같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행방불명인 묘역에서는 모두 말을 잃었다. 4·3평화공원에 들르기 전 그곳이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인지 몰라서 웃음을 지었던 이들은 몇번을 반복해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행한 한국인들은 제주의 과거로부터 자신의 고국을 발견한 예멘인들에게 “하루 빨리 예멘에 평화가 와서 전쟁희생자들을 위한 평화공원을 만들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멘인들은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김재훈 / 시인

2018.8.8. ⓒ 창비주간논평

커버 이미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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