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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에 여성이 없다

예지숙
예지숙

예지숙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학계는 어느 때보다도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한국 근대사 연구에 몸담은 연구자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하여 3·1운동에 관한 학술대회나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으며, 그 성과물들이 논문·단행본·전시·대중강연 등의 형태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민족주의 일변도의 시각을 비판하고 식민지와 근대의 관계를 다각도로 규명하려는 시각이 학계에 널리 자리 잡았음을 떠올려보면 좀더 다양한 시각을 반영한 성과들이 기대된다.

 

신여성의 등장과 3·1운동은 무관한가?

 

100주년 이전에도 50주년, 70주년, 90주년을 계기로 연구를 집대성하고 3·1운동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는 의미있는 작업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간의 3·1운동 연구에서 ‘없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여성이었다. 1969년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논문집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에는 3·1운동에서 여성의 역할과 참여 실태를 담은 몇편의 논문이 수록됐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은 거족적 항쟁이라는 서사에 압도됐고 3·1운동에 관한 해석에서 주요한 요소로 채택되지 않았다. 1989년 70주년에는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가 기념논문집 『3·1민족해방운동연구』를 출간하여 당대의 새로운 해석, 즉 민중사적 해석을 시도했다. 여기에 여성에 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고 저항의 주체는 더욱 몰성적(沒性的)인 존재로 그려졌다. 2009년 90주년을 맞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1919년 3월 1일에 묻다』에는 젠더사에 입각해 분석한 연구가 몇편 포함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 젠더사적 시각에서 여러 연구들이 생산됐고 신여성 연구의 붐이 일었던 것에 비하면 다소 소략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100주년을 앞둔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엘리트에서 민중으로’라는 기존의 해석을 지역사적 관점으로 전복하려는 연구, 3·1운동의 의의 중 하나인 ‘세계사적 선도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 3~4월까지 벌어진 개별적 시위 양상에 주목하여 추상화된 3·1운동의 역사상을 극복하려는 연구 등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잠잠한 부분은 역시 여성사·젠더사이다. 근간에 개최된 3·1운동 관련 학술대회와 심포지엄에서 여성을 주제로 다루거나 젠더사적 해석을 시도한 연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한국역사연구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학술회의(‘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미래’, 2019.2.28 예정)에 포함되어 있는 한편의 발표가 유난히 눈에 띌 뿐이다. 그간의 3·1운동에서 여성이 소외된 것은 학계의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사·젠더사의 연구 경향과 영 무관하지는 않다. 많은 성과를 낸 신여성 연구는 문화사, 즉 일상사적 영역과 연구방법론에 치우쳐 3·1운동의 역사적 맥락과 신여성의 등장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신여성은 문화사적 영역에서, 3·1운동은 민족운동사적 영역에서 다루어져왔다.

 

당대의 젠더관을 바꿔놓은 19193

 

이른바 ‘촛불혁명’의 열기가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이어진 이때, 3·1운동이 여성의 삶과 당대의 젠더규범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을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활동기인 1898년이었다. 양반부인들이 주축이 된 ‘찬양회’가 결성됐고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이 세상에 나왔다. 양반부인, 기생 등의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충군애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여성의 목소리를 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3·1운동 때에는 양반부인이 아닌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등이 전면에 등장했다. 여성들은 기존의 젠더규범을 위배하고 집과 학교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진출했다.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누군가의 아내/딸이 아닌 대체 불가의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 성장한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학교, 교회, 직장 등을 기반으로 한 ‘여성 네트워크’를 통하여 3·1운동에 참여했다. 일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최초의 여성의원인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 이후 국내로 들어와 3·1운동을 전국화하는 데 앞장섰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여성들의 네트워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채호의 부인으로 알려진 박자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 동료 간호사들과 독립만세 시위를 모의하고 간호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3·1운동의 결과물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에 ‘남녀평등’의 조항과 임시의정원법에 여성 참정권이 포함된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현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92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여성운동과 신여성 현상은 3·1운동과 무관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주체임을 표방한 여성들의 등장은 젠더 규범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지난한 논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간의 연구에서 여성의 3·1운동 참여는 여성도 민족의 일원임을 증명한 사건으로 여겨져왔으며, ‘한국 민족’이 역사적 실체로 형성됐다는 민족주의 서사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3·1운동을 통하여 공적 영역에 진출했고 남성에 의하여 대변될 수 없는 정치 주체로서 등장했다. 늦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여성사적·젠더사적 해석을 통하여 그간 소외되어온 역사상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예지숙 / 한신대 한국사학과 외래교수

2019.2.27.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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