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
‘가능한 미래’를 성찰하는 문학
한국소설에서의 ‘전망’ 문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과 ‘전망’의 문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를 포함하여 304명의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일년의 시간이 지났다. 마땅히 구조했어야 할 수많은 생명을 잃은 참극을 맞았지만, 사고 후 일년이 넘도록 진상규명이 요원하기만 한 답답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힘들게 마련한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정부는 다시금 객관적인 조사를 봉쇄하는 시행령을 만들어 유족들을 포함한 국민의 분노와 실망을 거듭 불러일으키고 있다. “진상규명은 치유의 전제”1)라는 간절한 전언이 무색할 정도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평범한 이 물음은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재적 위치를 세심히 살피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백낙청(白樂晴)은 “제때에 전환을 이루지 못할 경우 나라가 어떤 혼란과 난경에 빠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2)이 바로 세월호사건의 교훈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사건은 분단체제의 특수한 제약에 묶인 우리 사회가 민주화 시기라는 결정적인 시대전환의 국면을 통과하고도 대전환에 이르지 못한 역사적 상황을 확인시키는 뚜렷한 징표다. 분단체제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남북 각기의 내부조건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 등이 맞물린 복잡한 구조’이기 때문에 그 모든 방면에서 진전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현재 한국사회가 처해 있는 혼란과 교착을 제대로 극복하기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기의 현실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한 미래’로의 전환을 사유하는 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에서 절실하고 긴요한 과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현재의 체제를 전복적으로 열어서 사유함을 의미하며, 이는 현실에 잠겨 있는 모순과 교착을 직시하는 작업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그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전망’의 인식과 연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문학사를 돌아본다면, 시대의 방향을 가늠하는‘전망’이 강렬하게 호명되었던 가장 가까운 시기는 1980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는 ‘불의 시대’라고 명명될 정도로 사회 전분야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뜨겁게 분출되었던 시기다. 80년대의 한국문학은 그 시절이 품은 뚜렷한 특성만큼 선명한 슬로건을 통해 자신의 시대적 특성을 알려왔다. 1987년 6월항쟁을 분기점으로 한 노동자주체 문학의 본격화와 여기에서 1990년대로 연결되는 후일담문학의 일부는 80년대를 상징하는 핵심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문학과 더불어 그 어느 시대보다 전위적이고 정치적인 상상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1980년대의 문학은 상투적인 해석들도 만만치 않게 거느리고 있다. 전망의 인식 문제가 그중 하나인데 작품 결말에 표현되는 미래지향성이 낙관적인 도식으로 연결된다는 통념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통적인 서사의 탐색 및 새로운 미학적 실험의 경향들이 공존함에도 이 시기의 문학은 민중주의 지향과 노동계급의 주체화, 낙관적인 전망의 형상화라는 선명한 틀로 일반화되곤 한다.
이 글에서는 1980년대 문학의 특성을 규정하는 단선적 논의들이 지닌 문제점을 살피면서 당시 소설들에 형상화된 주체의 전망 문제를 중심으로 80년대 문학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탐색해보려고 한다. 문학작품에서 전망의 인식 문제는 80년대 문학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최근의 문학지형에서 전망은 현실의 복합적인 층위를 파악하기 위해 더욱 필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강렬한 상징을 머금고 있다고 평가되는 소설일수록 작품 속에 형상화되는 미래적 전망의 문제는 풍부한 복합성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윤정모(尹靜慕)의 「밤길」(1985)과 홍희담의 「깃발」(1988) 및 신경숙(申京淑)의 「외딴 방」(1988)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3)
2. ‘민주화’세대 담론의 한계와 전망의 잠재성: 윤정모의 「밤길」
근래 1980년대와 관련된 사회문화 연구들은 민주화운동세대4)가 지닌 80년대적 문화경험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국가폭력의 기제와 이에 대항하는 정치담론의 구성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피는 일련의 논의들은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전망의 시대라는 표상 속에 80년대를 못박아놓는다. 이 논의에 따르면, 1980년대의 문학과 문화가 이념적인 공동체의 구성과정을 보여준다면 역설적으로 1990년대의 문학과 문화는 이에 맞서는 자유롭고 내밀한 개인의 욕망을 부각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들은 대체로 87년체제의 이념적 억압성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6월항쟁을 기점으로 한 87년체제가 그 자체로 머금고 있는 한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이 ‘민주화’세대 담론의 특수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5)
천정환(千政煥)은 민주화운동세대의 회고 에세이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국가, 대중, 지식인 남성 등의 주체가 80년대에 대한 세대기억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집중적으로 살핀다.6) 그는 80년대를 돌아보는 일부 지식인들의 세대기억이 정치의 양극화와 기억투쟁의 이데올로기화, 진영화에 맞닥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일부 386세대 지식인의 회고담이라는 제한적인 텍스트에서 도출한 논의들을 80년대의 ‘세대기억’으로 일반화하는 과정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이 글에서 1980년대는 억압적인 관념의 시대로 단순화되며, 상대적으로 결론에서 제시되는 90년대 문화정치의 기억은 여러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으로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관련 논의들이 답습해왔던 시대단절론적 분석과 더불어, 한 사회가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하는 주체의 탄생을 부각하는 사회이론의 문제점들이 함께 깔려 있다.7)천정환은 글의 말미에서 80년대와 90년대 세대의 상투적인 구분선과 민주화운동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제시하지만, 집단적인 이념과 개인의 욕망이라는 오래된 틀 속에서 이러한 해체의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천정환에게서 강조되는 ‘민주화’세대론의 문제는 김원(金元)의 논의8)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와 강조된다. 김원은 1970년대와 변별되는 1980년대 문학의 정체성으로서 민중문학, 노동자계급문학의 정체성을 특별히 강조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80년대 세대의 정체성을 ‘장기 80년대’로 명명하면서 현재까지 연장하는 긴 시간대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는 1980년대의 주체를 ‘과잉정치주의’ ‘낙관적인 주체의 억압성’ 속에서 해부한다. 70년대와 변별되는 80년대의 집단주체는 다시 90년대의 개인주체와 대립되고, 이와 차별되어 2000년대 이후에는 사회적 소수자가 주목받아야 할 주체로서 드러난다. 현재 지형에서 나타는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실천적 기록, 즉 불안정노동, 청년노동자, 여성노동자에 관한 르뽀 텍스트를 부각하는 것은 의미있는 지점이지만, ‘80년대’가 현재의 기원인 동시에 ‘억압적인 자원’으로서 상대화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일정한 도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김원의 글은 ‘계급주체’로 80년대의 정체성을 고정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글이 경계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담론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도 한 시대 속에 특정한 ‘주체’를 발명하는 제도적 기제에 중점을 두는 담론틀로는 분단현실로서의 80년대 한국사회가 걸머지고 있는 제약조건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기 어렵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문학이 폭넓게 사유한 민중중심주의는 특정한 세대론이나 계급주체에 묶이지 않는 다양한 흐름으로 작품에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로 윤정모의 「밤길」을 읽어볼 수 있다. 시민군인 요섭과 김신부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마지막 날 광주를 빠져나와 항쟁의 진상을 알리러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항쟁현장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80년대 전반에 씌어진 광주체험 소재 소설의 상당수가 보고의 기록조차 자유롭지 못한 검열과 공포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밤길」이 지닌 증언문학으로서의 성취는 한결 두드러진다.
광주항쟁의 기록을 처음으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지만 지금까지「밤길」에 대한 평가는 이 소설에 잠겨 있는 지식인의 부채의식과 소명의식을 해석하는 데 집중되어왔다. 특히 신부의 내면을 표현하는 모호한 심리서술의 방식은 1987~88년을 거쳐 출현한 각성된 계급적 시선의 노동소설들과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미완적인 것으로 평가되곤 했다. 그러나 현재의 관점에서 읽을 경우 이 소설이 머금은 전망의 세계는 쉽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초조함과 비관적 상황의 암시로 인해 한층 복합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소설에서 학살현장의 끔찍한 모습은 신부의 내면적 기억을 통해 파편적으로 제시된다. 건물을 점거한 진압군이 신호탄과 최루탄을 번갈아 쏘아대던 장면, “차단된 도로에 곤봉을 든 그들” “바닥에 몸을 뉘지도 못하고 바리케이드에 걸려 있던 그 주검” “자색 등꽃으로 떨어진 주검들이 여기저기 검은 피가 되어 둥둥 떠올”랐던 모습은 신부가 현재 걷고 있는 고요하고 아득한 ‘밤길’의 풍경과 대조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한다. 동료들이 있는 현장을 빠져나와 자기만 도망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한 요섭은 “우리 집안엔 대대로 비겁자가 없었다……”(310면)라고 괴로워하며, 신부 역시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였단다”(312면)라고 말하며 요섭을 달랜다. 얼핏 보면 불필요한 하소연처럼 보이는 요섭의 가문 이야기와 종교적인 메시지로 정치적인 전언을 대신하는 신부의 이야기는 소설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다급하고 절박한 항쟁의 기록을 드러내는 독특하고 암시적인 방식인 셈이다.
일상의 무심한 풍경과 격렬한 정치의 현장이 얽혀 있는 지점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심리적인 고뇌는 거듭되는 회의와 곤경으로 포착됨으로써 사실성을 더한다. 동지들을 현장에 남겨놓고 온 자책감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거리에서 만나는 일상의 모습은 그 평화로움으로 인해 한층 잔인한 모습으로 체감된다. 경운기를 모는 농부가 “신부님, 빛고을에 난리가 났다면서요?”(305면)라고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는 광주의 현장이 얼마나 철저하게 은폐되고 고립되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걷고 있는 ‘밤길’ 역시 목적을 달성하리라는 기약이 없는 불투명하고 아득한 파국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추기경을 만나고 수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정부 요인에게 면담을 구한다고 해서 이 사태의 해결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요섭의 회의적인 물음에 신부는 “그래, 요섭아.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단다. 그래도 우린 가야 해. 가기 위해 출발했으니까”(307면)라고 답할 뿐이다.
결말을 짐작하기 어려운 불안한 길을 향해 떠나는 신부와 요섭의 모습은 이들이 각자 간직한, 혹은 공유한 전망의 세계가 투명한 예시로만 채워지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눈앞에 현시하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향해 이들은 걷고 있는 것이다. 아감벤(G. Agamben)의 비유를 빌리면, 이들이 나누는 전망의 세계는 잠재태로서의 전망이며,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곧 역량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감벤은 삶의 순간마다 새롭게 겪고 이해한 것 속에서 “매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다면 “현실 그 자체는 공통된 역량의 경험인 것”이라고 말한다.9) 지식인의 복잡한 부채의식과 동지를 남겨두고 왔다는 죄책감이 증언을 하러 가야 하는 소명의식과 뒤얽히는 이 복잡한 순간이야말로 이들에게 다가온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어서 일어나거라. 너의 임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신부는 요섭을 안아 일으켰다. 요섭은 한참 만에 무겁게 일어났다. 신부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기 시작했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316면)
「밤길」이 품은 전망의 잠재성과 풍부함은 어둡고 불안한 밤길의 공간과 그 속에서 뒤섞이는 간절한 소명의식이 함께 포착되는 데서 비롯된다. 요섭과 신부가 서로의 불안과 공포를 달래고 나누며 걸어가는 길은 문학작품 속의 ‘전망’이 개인의 실존적 차원의 문제인 동시에 타인과 함께 관계되고 공유되는 문제임을 알려준다. 이들이 현실적으로 목격하는 파국과 불안은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역량의 가능성을 매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1980년대 문학을 가로지르는 총체성과 전형, 전망 등의 용어 역시 상투적인 맥락에서의 현실반영성을 거부하는 복합적인 용어로서 재탐색되어야 함을 상기하게 된다.10)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전망의 의미 역시 80년대 문학이 시작되는 억압과 검열의 참혹한 현실을 되새기는 동시에 도래하게 될 1987년 6월항쟁의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3. ‘노동하는 개인’이 꿈꾸는 세계: 홍희담의 「깃발」과 신경숙의 「외딴 방」
6월항쟁 이후 노동소설의 성과로 거론되는 홍희담의 「깃발」, 정화진의 「쇳물처럼」(1987), 정도상(鄭道相)의 「십오방 이야기」(1987), 방현석의 「새벽출정」(1989) 등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선명한 대립관계 속에서 형상화되며 불합리한 사회현실에 대항하는 뚜렷한 주제적 지향성을 표현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품은 뚜렷한 ‘각성의 전망’이 이후 유사한 형식으로 모사되는 문제점은 비평과 창작에서 모두 고민스럽게 생각한 부분이었다. “계급현실에 대한 구조주의적, 정태적 파악이 전제된 기계적 창작방법론으로 전락”11)할 우려와 “노동자계급의 이념에 기초한 민족문학이 그 진전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미적 질곡”12)에 대한 고민은 당시의 비평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담보하는 ‘계급적 전위’의 눈만으로는 포착 가능하지 않은 복잡다단한 현실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1980년대 당대 현실에서 노동자의 계급성을 내세우는 새로운 세대의 문학이 처했던 정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백낙청의 글13)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백낙청은 1987년 6월을 전환점으로 민족문학의 새 단계가 열린다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6월항쟁을 바라보는 통합적인 시야를 제안한다. 이 글이 중산층적 시각의 문제, 민족해방과 통일을 급진적인 관점으로 보는 견해, 남한사회 내부의 계급모순을 중시하는 입장 등의 세 시각을 새롭게 종합하는 입장으로서의 분단체제론을 제시한 것은 노동계급의 관점에 매여 있는 일부 80년대 소설과 비평을 비판적으로 읽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특히 “분단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민중권력의 상대적 성장만이 아닌 결정적 승리까지를 기대하는 태도”14)가 갖는 한계에 대한 지적은 6월항쟁 이후만을 특권화해 새로운 문학적 거점으로 삼은 당대의 급진적 담론들에 대해 철저한 자기점검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낙청의 논의는 70년대 문학의 창조적 성과와 연속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80년대 고유의 문학성이 무엇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1980년의 현실을 1987년 이후 각성된 노동자계급의 시선으로 뚜렷하게 매개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홍희담의 「깃발」 역시 그 의의와 한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본격화한 노동운동의 조직적 전개에 대한 낙관적 진단과 노동자 중심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렬한 지향성을 담아낸 이 소설은 당대 노동문학이 이루어낸 중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물론 「깃발」의 성과가 가능해지기까지는 70년대 말기부터 나타난 노동자 수기와 르뽀 등의 증언문학이 큰 밑거름 역할을 했다.
「밤길」이 포착한 시대적 전망이 지식인의 번뇌와 갈등 속에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비해 「깃발」이 보여주는 광주항쟁의 해석 방향은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지식인 주도의 항쟁이 노동자 및 기층민중 주도의 항쟁으로 넘어가게 되는 국면이다. 소설의 극적 서사 중 중요한 갈등을 이루는 인물은 도피자로 그려진 윤강일과 도청에 남아 끝까지 싸움을 지속한 형자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중심 투쟁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형자가 순분에게 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내세우는 노동자계급 우위의 지향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다.
“분수대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야. YWCA는 언제든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리고 도청은……”
“도청은?”
순분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형자가 도청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지.”
(…)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 거야.”(49~50면)
형자의 목소리를 빌려 표현되는 노동자 중심의 단호한 현실해석은 이 소설의 계급적 지향성을 고스란히 투사한다. 현장에서 퇴각한 무력한 지식인으로 그려지는 윤강일과 대조적으로 도청에 끝까지 남아 산화하는 형자의 모습은 이 소설이 품은 노동자계급 우위의 현실인식을 선명하게 나타낸다. 그 점에서 「깃발」이 그린 지식인과 노동자, 소시민의 모습이 유형적 인물에 경사되고 있다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15)
「깃발」의 서두에서 형상화된 폭력과 학살이 생생한 현장감을 지니는 데 비해 인물들이 거듭 자신의 노동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청에서의 장면은 소설의 극적 긴장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린다. “투쟁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순분이 “그래. 끝까지 책임지는 것만이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대답하는 장면(64면)이라든지 도피에 지친 윤강일이 “커다란 획이 확 그려지고 지나갔어”라고 말하자 순분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라고 말하는 대목(72면)은 노동자의 정체성과 연관된 강한 전망이 오히려 인물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망은 인물들의 삶이 지닌 잠재적 역량을 투사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일찍이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총체성을 두고 말한 바 있는 ‘비판적 범주’의 의미를 ‘전망’의 개념과 연관해 생각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제임슨은 아도르노(T. Adorno)의 논의를 경유하면서 “총체성은 긍정적 범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판의 범주”16)임을 강조한 바 있다. 총체성의 완전함에 부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총체성에 굴복하지 않거나 총체성에 저항하는 것 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개별화의 잠재태가 될 수 있는 것을 구원하든지 또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지도록 돕고 싶어하는 과정”17)에 총체성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총체성이 지닌 비판적 범주의 성격을 전망과 연관한다면 소설 속에서 계급적 정체성에 맞는 인물들의 다짐과 각오는 전망의 진정한 기능과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형화된 정체성에 저항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다르게 뻗어나갈 가능성을 차례로 이끌어내는 것이 비판적인 범주로서 전망이 지니는 효과이다. 「깃발」에서 형상화된 노동자들의 삶은 도식적인 유형화의 한계를 노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틀에 모조리 흡수되지는 않는 ‘개별화’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
지식인과 노동자 간의 과도한 차별과 노동자 중심적인 목적론적 서사를 동반하는 아쉬움을 주면서도 「깃발」은 항쟁의 현장과 노동현실의 세부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그려내는 덕목을 보여준다. 도청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광장 건너편 상무관에서 목도한 시체들 앞에서 흐느끼는 사람들과 결의를 다짐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대한 세심한 포착은 이 소설이 지닌 현재적 감동을 훼손하지 않는다. 더불어 진압군과 대결하는 항쟁의 한복판이 아니라 패배 이후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감동이 배가된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앞날을 감지하기 어려운 일시적인 공허상태에서 잠재되어 있던 삶의 형태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난리를 겪고 난 후라 잼도 안 만드는가보다. 빨리 토마토가 익어야 될 텐데……”(57면)라고 걱정하며 리어카를 끄는 순분 어머니라든지 결국 공장에 나가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맞게 되는 탄압과 암흑의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힘들어하는 순분과 그 친구들의 면면이야말로 이 소설이 담아낸 단순하지 않은 ‘생활’의 모습이다. 항쟁의 현장에서 하나로 결집된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분노했고 증오까지 하”는(59면) 모습을 거쳐 현실을 깨닫는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순분과 친구들이 도피한 윤강일을 재회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관념적인 지식인으로 비난받던 윤강일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항쟁 이후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그 어떤 증언과 기록의 세계 못지않게 활력있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편 「깃발」에서 그려진 여성노동자의 삶과 곤경은 신경숙의 단편 「외딴 방」에서 유대마저 파괴된 고립의 비극으로 포착된다. 1980년대를 돌아보는 신경숙 소설의 본격적인 작업은 장편 『외딴 방』(문학동네 1995)을 통해서 풍부하게 풀려나오지만 단편 「외딴 방」이 품은 80년대 소설의 시대적 의미 역시 따로 살펴볼 만한 흥미로운 대목들을 지니고 있다. 「외딴 방」은 「깃발」에서 노동하는 ‘순분이들’이 겪는 삶의 풍파과정을, 개인적 실존이 두드러지는 삶의 미세한 단면으로 붙잡으면서 독특한 일상의 풍경을 창조한다. 이 소설에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자책은 “전철보다 먼저 앞질러” 가는 “통증”(304면)으로 현현한다. 주인공이 열여섯살 청춘 때 겪은 희재언니의 죽음은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골목골목 겨우내 녹지 않고 있던 그 빙판”(285면)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서른일곱개의 방이 있던 그 집”, 지방에서 올라온 주인공이 오빠가 함께 처음 서울살이의 살림을 꾸리고, ‘동남전자주식회사’로 출근하며 야학을 다니던 시절, 한집에서 기거하던 희재언니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지금 그 여자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나는 이 글을 쓴다”(286면)라는 고백으로 누설되지만, 주인공은 이 기록이 끝날 때까지도 희재언니의 삶을 완전한 형태로 복원하지는 못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과 희재언니가 꿈꾸었던 개인적 삶의 열망은 순분이들이 꿈꾸는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옥상에서 빨래를 헹구다 처음 만난 희재언니와 ‘나’는 매일 반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을 함께 보고 방에서 같이 잠도 자고 이야기도 하며 각자의 꿈 이야기를 나눈다. 전화교환원이 꿈이었던 희재언니는 마당이 있는 2층집에서 살고 싶은 꿈, 이백만원이 모이면 동생에게 주고 결혼을 하리라는 꿈을 ‘그럼 게임’을 통해 토로한다. 하루하루 쉼없는 성실한 노동 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꿈의 세계는 정작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완강한 현실의 세계와 차갑게 대조된다. 희재언니가 꿈꾸었던 ‘다른 세상’은 학교도 그만두고 더욱 가혹한 노동의 조건에 노출되는 불행 속에서 끝내 실현되지 못한다. 이 고통스러운 꿈의 세계는 청춘의 시절이 지나간 후에도 주인공에게 “이후 오랫동안 다락방 천장이 무너지는 꿈”(305면)으로 나타난다. 희재언니와 주인공이 공유했던 그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꿈의 세계가 단순히 개인적인 소망으로 멈출 수 없는 것은 90년대 이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존재하는 ‘외딴 방’의 무수한 익명의 개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깃발」과 「외딴 방」에서 ‘노동하는 개인’이 꿈꾸는 이 세계의 전망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슬로건을 새롭게 읽게 만든다. 「외딴 방」에서 흘러나온 희재언니와 나의 꿈은 「깃발」이 보여준 여성노동자들의 삶이 드리운 고립과 소외를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했다. 그런 점에서 「깃발」과 「외딴 방」은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개인의 실존적 삶과 공동체의 전망이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4. ‘가능한 미래’를 성찰하는 문학
가장 투명하고 뜨거운 이념적 공동체를 제시한 것처럼 보였던 1980년대에도 문학이 보여주는 전망의 세계는 단단하고 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윤정모의 「밤길」에서 전망은 눈앞에 주어지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는 세계, 현실 속에서 부정되기 때문에 더욱 사유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요섭과 신부가 떠나는 불확실한 여정은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역량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전망은 5월 광주의 기억에 대한 침통한 응시를 바탕으로 도래할 6월항쟁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87년 6월항쟁의 의미에 직접적으로 호응한 작품은 홍희담의 「깃발」이다. 「깃발」이 보여주는 노동자의 각성과 연대는 선명하고 당위적인 전망으로 현실 속에 기입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과 충돌하는 노동자의 생활세계를 부분적으로 살려놓는다. 신경숙의 「외딴 방」은 「깃발」이 채 다루지 못한 여성노동자들의 비관적인 고립의 삶과 내밀하고 감성적인 일상세계를 감각적인 문체로 포착한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80년대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시대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삶과 밀착하는, 가능한 미래를 찾아가는 문학적인 전망을 필요로 한다. 지난 일년 동안에는 그러한 절박한 현실에 응답하는 증언과 기록들이 공동의 작업을 통해 출간되었다. 추모시집 『우리가 모두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 2014)와 문인들의 에세이를 담은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 테마 소설집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예옥 2015), 정혜신(鄭惠信)·진은영(陳恩英)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창비 2015) 등이 그 예이다. 세월호 관련 담론뿐 아니라 광주서사를 포함하여 80년대 한국문학이 품은 다양한 정치적 상상력은 오늘의 한국문학의 미래적인 전망을 성찰하는 데도 중요한 자원으로 연결되고 있다. 80년대의 역사적 기록을 현재화한 성취작으로 공선옥(孔善玉)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 2013)를 포함하여 한강(韓江)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이기호(李起昊)의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 성석제(成碩濟)의 『투명인간』(창비 2014) 등을 들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터져나오는 절박한 기록들,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시선, 미래를 향한 강한 소망 등이 개인의 일상적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을 통해 문학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무수한 질문과 탐색을 계속해간다. 문학이 미래를 성찰한다는 것은 선명하게 완성된 그림을 예언하는 일이 아니다. 문학적 전망의 의미 역시 막연하게 살고 싶은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세계가 은폐하거나 잃어버린 삶의 귀중한 조각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서 만들어진다. 미래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현실의 체제를 벗어나 좀더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지게 됨을 전망의 의미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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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혜신·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창비 2015, 95면.
2) 백낙청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15면.
3) 인용작품 출처는 다음과 같다. 홍희담 『깃발』(창작과비평사 2003), 윤정모 『밤길』(책세상 2009), 신경숙 『겨울우화』(고려원 1990).
4) 1980년대 민주화운동세대는 ‘1980년의 광주항쟁과 군부독재정권하의 대규모 민주화운동의 경험, 그리고 1987년의 6월항쟁이라는 제한적 성과의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로 정의된다. 박병영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의 정치적 정체성」,『현상과인식』 통권 101호(2007.5) 85면.
5) 87년체제론과 관련된 세부적인 논의자료는 김종엽 엮음 「87년체제론」, 창비 2009 참조.
6) 천정환 「1980년대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대기억’의 정치」, 『대중서사연구』 제20권 제3호, 대중서사학회 2014.
7) 김종엽은 ‘◯◯사회’라는 명명을 통해 한 사회의 특징을 일반화하는 여러 문화이론이 “87년체제가 정체상태에 빠지고 그로 인해 분단체제의 에토스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한 시기에 대한 관찰에 기초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김종엽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34면.
8) 김원 「‘장기 80년대’ 주체에 대한 단상: 보편, 재현 그리고 윤리」, 『실천문학』 2013년 가을호. 김원은 이 글에서 “80년 광주의 이념, 사상, 주체의 파급효과가 1980년 5월에 시작된 것이 아닌, 1979년 파시즘의 붕괴까지 확대되며 동시에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로 종결되는 것이 아닌, 1990년대 나아가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의미”로 ‘장기 80년대’ 주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80년대의 의미에 이렇듯 현재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2000년대의 기록들 속에 80년대가 억압한/배제된 주체들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9)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20면.
10) 리얼리즘 문학이론의 ‘총체성’과 ‘재현’ 개념에 대한 현재적인 해석작업으로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운동으로서의 ‘총체성’」(『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과 김동수 「조금은 기묘한 ‘전형’ 개념의 역사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를 참조할 수 있다.
11) 김명인 「먼저 전형에 대해서 고민하자」, 실천문학편집위원회 엮음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실천문학사 1992, 171면.
12) 김재용 「전형성을 획득하여 도식성을 극복하자」, 같은 책 173~74면.
13) 백낙청 「통일운동과 문학」,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14) 같은 책 127면.
15) 최원식이 지적한 것처럼 항쟁의 초기 주도세력이던 청년·학생·지식인이 무장투쟁기에 대거 이탈하는 과정을 개량주의 또는 투항주의로 매도하는 경향은 “우리 운동의 현실적 요구를 심각히 고려하지 않은 탁상론일 때는 자칫 감상으로 떨어지기 쉬”울 뿐 아니라 “광주항쟁에 대한 기계적론적 파악의 징후가 없지 않”은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 최원식 「광주 항쟁 이후의 문학 」, 『광주5월민중항쟁』, 풀빛 1990; 최원식 『소수자의 옹호 』, 자음과모음 2014, 38~39면.
16)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마르크스주의』, 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0, 434면.
17) 같은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