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염무웅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창비 2021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멈추지 않는 간절함
박철 朴哲
시인 bch2475@nate.com
“그래도 그렇지…… 천이두 선생처럼 60년 동안이나 문단을 지켜온 어른의 타계에 중앙문단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에 찾아보니, 전라북도의 지역신문들 이외에 소위 중앙지로서는 오직 『세계일보』만이 천 선생의 부음(訃音)을 짤막하게 기사로 다루고 있다.”(23면)
젊은 문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할 한 작고(作故) 문인과의 개인적 친분에서 아쉬워하는 말이 아니다. 회심 가득한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우리 문학의 현주소와 저자의 남달리 세밀한 시선, 오늘날 언론의 민낯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는 복잡다단한 원류와 지류들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읽기 가볍고 편하지만 그러나 매우 간곡하며 진지한 책이다. 김윤수 선생의 정릉 집 방문기에선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민기가 놀러 왔다가 기타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45면) 올해 50주년 기념으로 후배들로부터 헌정 음반을 받는 「아침이슬」의 그 김민기가 맞나 싶을 정도다. 이렇듯 1부의 교유록은 역사적 인물과 장면들이 수다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수많은 문제적 거장들이 어떻게 생성·변모하며 마침내 ‘작품만 남기고’ 장렬하게 사라지는지가 아스라하다.
저자가 「머리말 대신에」에서 밝혔듯이 3부의 글들은 이전 산문집에 실린 원고들을 보완하여 재수록한 것이다. 우리는 본격 담론에 해당하는 이 묵직한 글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동서 냉전의 종식, 독일 통일의 교훈, 그리고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과의 관계 정립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이 논지들은 당연히 한반도 평화라는 하나의 본류에서 만난다. 저자가 이 글들을 다듬어 굳이 다시 옮겨온 의중이 분명해 보이는 부분이다.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의 문집 『미국 외교 50년』과 구소련 정치가 고르바초프의 자서전 『선택』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케넌의 글은 최근 선거 국면에서 불거진 ‘미 점령군’ 발언 논란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저자는 아직도 그가 배후에서 동아시아 관계를 조종하고 있는 듯한 섬뜩함을 느낀다.(214면) 한편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서독 대통령이었던 폰 바이츠제커의 회고록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를 따라가는 대목에서는 한반도 평화 정착과 분단 극복을 위한 저자의 멈추지 않는 고심과 전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주변국과의 교착 상태가 반복되는 상황에 시민단체의 역할이나 민간 교류의 지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독일 기독교의 역할이었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의 날이 오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바이츠제커는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의 통일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된 것이 아니며 평화롭게 합의된 것입니다. 독일 통일은 민족의 자유와 유럽대륙의 새로운 평화질서 정착을 목표로 하는 유럽 역사발전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우리 독일인들은 기여코자 합니다. 우리 통일은 이에 봉헌합니다.”(231면, 재인용) 독일 기독교총연합회는 우리의 한기총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치적 중립은 바라지 않더라도 극단의 분열 조장과 분단의 배후 세력으로 군림하는 한국의 종교단체나 툭하면 서울이나 국가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이상한 정치가가 판을 치는 것을 떠올리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물론 3부의 대부분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발표된 글이라 지금의 현실과는 다소 변화한 측면도 있다. 권헌익·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 와다 하루끼 교수의 『북조선』의 글을 마지막에 인용한 「가장 가까운 나라의 아주 낯선 풍경」에서 저자는 북한을 “바깥의 관찰자들로 하여금 ‘유격대국가’ ‘극장국가’ 또는 ‘가족국가’(이문웅) ‘신유교국가’(김성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게 했던 이 나라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256면)라고 말한다. 크게 봐선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대외관계뿐 아니라 북한 내부구조의 통치 문제를 들여다보면 김정은이 이 극장국가에서 새로운 형태의 연출과 디자이너로 어느정도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조부가 실현하려다가 사망으로 좌절된 ‘중국·대만 경제교역 모델’의 재실현도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으며 남한 정부가 케넌식의 배후 조종을 여하히 극복하느냐가 더욱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북한이 2차대전 말기의 일본과 닮은 부분이 많다는 과거 와다 교수의 평가 역시 조심스럽게 지켜볼 일이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1일까지 지속된 어림잡아 연인원 1600만명의 집회에서 집단지성의 작동은 모든 우연과 창의를 온 세계가 놀란 전대미문의 평화혁명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355면)는 저자의 서술처럼 사상 유례없는 촛불혁명은 평자에게도 남다른 미완의 혁명으로 살아 있다. 근년 정치권에 대한 답답함을 헤아리면 애초에 그들에게 촛불의 완성을 기대한 자체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낙관적 실책이 아니었나 싶다. 촛불 이후 정치개편을 실기함으로써 거의 실종 직전이었던 극우세력이 기사회생하는 기회를 주었고 이는 언론·검찰 개혁을 비롯한 적폐청산의 실패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한반도 평화도 낙관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무리 양보하고 되짚어보아도 정계개편의 실기는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즐거운 인생」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날 약속 없이 소설가 황석영을 만난 건 그래도 휴대전화가 통한 덕분이었고, 우연히 마주친 시인 김용택을 인사가 끝나자 금방 놓친 건 파도처럼 물결치는 인파 때문이었다”(354면)라는 희극적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뒤의 현실은 저자가 교우를 나눈 60~70년대의 토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인류는 진보하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상투적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자는 통일을 위한 준비는 장밋빛 ‘낙원’이 아니라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독일 시인 비어만(W. Biermann)의 조언을 책의 제호로 삼았다. 지옥에 머물지 않기 위한 노고는 결코 지옥을 외면하고 돌아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다 하다 이제는 마스크까지 쓰고 나서야 하는 환란 중에도 꺾이지 않는 노 문객의 한결같은 다짐에 어찌 숙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이다.”(3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