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

신경숙과 한강의 최근 소설에 부쳐

 

 

조연정 曺淵正

문학평론가.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순진함의 유혹을 넘어서 구조적 폭력 시대의 타나톨로지(thanatology) 등이 있음. yeoner@naver.com

 

 

우리 시대의 초라한 사랑

 

사랑에는 갈망과 고통뿐이라고 명민한 자들은 말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저 둘 사이를 오가며 유형(exile)의 밤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테지만, 확실히 우리는 사랑이 초라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서지기 쉬운 허상에 불과하니 진정한 사랑 역시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 철학자들을 탓해야 할까. 사랑으로부터 낭만적 신화를 거둬내고 사랑을 성적 욕망의 미사여구로 전락시킨 정신분석학자를 원망해야 할까. 아니, 연애와 결혼이라는 상호계약의 제도가 사랑의 혼란스러운 본질을 안전하게 길들여버렸다는 사회학자의 진단을 경청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학자라면, 실존의 허무보다 생존의 불안이 압도적인 이 시대의 불행을 증언하며 낭만적 사랑의 여유는 사치일 뿐이라고 단정할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우리는 더이상 사랑을 통과하며 형언할 수 없는 숭고를 감지하거나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가 힘들어졌다. 『사랑의 단상』의 첫 페이지에서 롤랑 바르뜨(R. Barthes)는 사랑을 ‘심연에 빠져들기’(sabîmer)로 비유했었다. “절망 또는 충족감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라짐의 충동,” 알 수 없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승인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해져버린 듯하다. 사랑은 이제, 가벼운 즐거움을 주는 방식으로 어디에나 있고 충동에의 희생을 강요하는 형태로는 아무데도 없다. 진정한 사랑의 파토스는 이미 가벼운 욕망으로 산화되거나 견고한 제도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너무 비관적인가.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현대의 근본주의”1)라고 말한 울리히 벡(U. Beck)조차도 사랑을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사랑은 ‘위험사회’의 불안을 견디게 해주는 세속종교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만남 알선 싸이트의 괴상한 광고 문구는 안전한 쾌락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 사랑의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알랭 바디우(A. Badiou)는 말한다. 사랑이 일종의 계약이나 욕망의 회의적 운동이 되어버린 상황에 맞서 바디우는 위험과 모험을 창안하고 ‘삶을 재발명’하는 사랑을, 동일성의 만남으로 종결되지 않고 차이의 구축으로서 지속되는 사랑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 철학의 고유어들을 활용해 말해보면,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선언’을 통해 ‘사건’으로 등재되고 ‘충실성’과 더불어 상황의 ‘진리’를 만들어낸다. 사랑은 결국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2)이며 이같은 사랑을 통해 느끼게 되는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증거”3)이다.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바디우가 어쩐지 시대착오적 낭만주의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사랑을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정의하는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둘의 만남을 하나의 관점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낭만적 신화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타자와 더불어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게 되는 흔치 않은 체험이기에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랑을 하나로의 완결이 아니라 둘의 변화가 진행되는 ‘최소한의 꼬뮤니즘’으로 상정한다. 그에게 사랑은 타자를 매개로 홀로 진행되는 단순한 육체의 즐김도 육체 너머를 상정하는 아름다운 환상도 될 수 없다.

바디우의 이같은 ‘사랑예찬’을 참조하자면, 사랑이 초라해진 이 시대에서 우리는 표피적이고도 순간적인 감각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저 즐거운 삶을 만들어볼 수는 있을지언정, 타자와의 성실한 만남이 주는 기쁨도,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만져보는 행복도, 결국 자기 삶을 재발명하는 보람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숭고한 사랑이 대체로 불가능하고 가능하다 해도 조롱받기 십상인 이 시대에, 여전히 고전적 방식으로 사랑을 생각하는 소설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무질서한 인생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사랑에서 찾고, 서로 소통할 수 없어도 사랑은 가능하다고 믿는 소설들은, 어쩐지 어색하지 않는가. 자기 삶의 기율만을 따르며 여전히 ‘진정성’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 작가들의 이야기로 읽혀야 할까. 혹은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오히려 사랑의 힘으로 횡단하려는 악전고투로 읽혀야 할까.4) 신경숙(申京淑)의 『모르는 여인들』(문학동네 2011)과 한강(韓江)의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을, 사랑이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이 시대의 현실과 더불어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들로 읽어볼 수는 없을까.

 

 

모르는 육체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우정을 구별하기 위해 육체적 관계의 유무를 따지곤 한다. 그런데 이같은 통속적인 방식에 결정적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바디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