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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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장편소설 『7번국도』 『꾿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등이 있음. writerKYS@gmail.com

 

 

 

벚꽃 새해

 

 

경주 남산의 사계를 촬영하는 화보집을 의뢰받았을 때만 해도 성진은 거기에 그토록 많은 불상들이, 그것도 목이 잘린 채 남아 있을 줄이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에 봄 풍경을 촬영하러 남산을 찾아갔다가 목이 잘린 채로 앉아 있는 석불을 보고서야 성진은 ‘맞아, 이런 게 바로 폐허의 풍경이었지’라고 새삼 느꼈다. 그렇게 중턱에 있는 상선암까지 올라가 귀부인의 하얀 양산처럼 암자 기와 위로 드리워진 벚나무 꽃그늘을 촬영하는데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LCD 창으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알 만한 이름 옆에 ‘점심은 먹었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새벽에 올라와 그때까지 일하고 있던 터라 밥도 못 챙겨먹은 거 뻔히 알면서 묻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났다. 메시지는 성진이 상선암의 풍경을 마저 촬영할 때까지 두번 더 들어왔다. ‘바빠?’와 ‘전화로 말할까?’ 마지막 문자를 보고 얼른 카카오톡을 열어서 ‘무슨 일?’이라고 썼다. 보내자마자 답장이 돌아왔다. 화면을 보니 ‘내가 예전에 선물한 그 태그호이어, 다시 돌려받았으면 해. 주소 보낼 테니까 착불 택배로 부쳐줘^^’라고 돼 있었다. 보낸 사람은 서정연. 그러니까 요즘 말로 성진의 ‘구여친’. 그렇다면 이런 짓을 ‘진상’이라고 하는 거지. 성진은 중얼거렸다.

그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좀 해보자. 그 시계는 지난겨울, 어느 깊은 밤에 멈췄다. 바로 전날은 대통령선거일이라 함께 모여서 개표방송을 보자며 친구들을 만나 저녁 7시부터 생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밤새 축배를 들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고 주종도 막걸리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위스키로 점점 더 독해지기만 했다. 그리하여 그 시계가 멈출 무렵에는 만취했던 탓에 성진으로서는 무엇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음날 깨어서 시계를 보니, 검정색 다이얼 위에 세개의 침이 예각을 이루며 자정 무렵에 몰려 있었다. 날짜판의 숫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20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계가 멈춘 정확한 시각은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 날, 새벽 125449초였다. 오토매틱이라 그간에도 가끔 시간을 다시 맞추거나 용두를 돌려 태엽을 감는 수고가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5년도 넘었으니 분해소제를 한번쯤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증도 나고 귀찮기도 해서 한동안 시계 없이 다녔다. 그러다 옆동네를 지나오는 길에 시계수리점이 있는 걸 보고 찾아갔다가 30만원에 팔라기에 냉큼 팔아치웠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긴 했지만, 성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정연에게 그 시계를 선물받은 건 2007년이었으니까 그게 벌써 6년 가까이 묵은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도 그는 여자친구가 사준 즉석복권을 동전으로 긁어 5억원에 당첨된 행운아가 그녀와 이별한 뒤 전액을 꿀꺽하는 바람에 소송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5억원에 비하자면 그깐 시계쯤이야…… 하는 마음이 성진에게 없지 않았다. 그렇게 정연과의 옛일을 추억하는데 갑자기 6년 전, 그러니까 우연히 방콕에서 만난 두 사람이 충동적으로 찾아간 고도(古都) 아유타야의 폐사지인 왓 마하탓이 떠올랐다. 그건 아무래도 낮에 남산에서 본 목 잘린 석불 때문이리라. 성진은 목 잘린 석불들을 왓 마하탓에서 처음 봤으니까. 폐허가 된 사원의 한쪽 벽에 일렬로 석불들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목이 잘려 있었다. 신경주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라탄 성진은 그때 방콕 웨스틴호텔 앞에서 만났을 때, 정연이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자신도 빠이와 치앙마이를 다녀오면 그렇게 맑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설핏 잠들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려 성진은 화들짝 놀라며 깼다. 짐작했던 대로 정연이었다. 수면실처럼 고요한 밤기차 객실을 그는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창밖을 보니 어둠 속에서 가까운 빛들은 빨리, 먼 빛들은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정연이 물었다. 성진은 통로 한쪽에 있는 의자를 내리고 앉았다.

“회사 잘렸어? 뭐야, 갑자기. 돈 땡겨 쓸 일이라도 생겼나?”

그가 말했다.

“노총각으로 늙어가니까 촉만 발달하나부지? 내가 준 시계니까 돌려달라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니가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는데, 니가 준 시계니까 돌려달라면 좀 곤란해.”

“왜 곤란해?”

정연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왜냐하면 그건 법적으로 황당한 얘기거든. 민법에 보면 증여라는 게 있어요. 증여도 계약이기 때문에 일단 선물하고 나면, 소유권이 넘어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성진이 목소리를 깔면서 얘기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그렇게 말할 줄 내가 알고 있었지. 그게 무슨 말이냐면, 니가 나한테 선물한 순간부터 그 시계는 법적으로 내 거란 말이야. 돌려달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돌려줄 수가 없어. 민법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한번 찾아봐라. 난 이만 바빠서.”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연이 소리쳤다.

“그 잘난 민법에 내가 죽는다는 얘기는 안 나온대?”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잘난 민법에 내가 죽는다는 얘기는 안 나오느냐고?”

두번이나 같은 설명을 들었건만 성진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전화해서는 과거의 자신은 죽었다는 둥,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둥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시계를 당장 돌려주겠노라고 호언하긴 했지만, 그새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은 아닐까는 불안이 없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성진의 느낌이 별로 안 좋았다. 바깥세상에서는 막 벚꽃이며 개나리며 목련이 터져나고 있는데, 5평도 안되는 시계방 안은 어둠침침한데다가 싸늘하기만 했고, 토요일이라 늦도록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겨우 나온 터라 배도 고팠다. 그래서인지 시계방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