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외국어로 말 걸기
조해진과 백수린의 소설을 중심으로
이경진 李京眞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속물들의 윤리학」 「앨리스씨를 위한 동정론」 등이 있음. snowbonbon@hanmail.net
최근의 한국소설은 근대문학이 표상하던 국가적·문화적·언어적 지도의 경계를 지우는 데 열중해 있는 듯하다. 예컨대 조해진(趙海珍)의 소설집 『목요일에 만나요』(문학동네 2014)의 「북쪽 도시에 갔었어」를 보자. 이 소설의 공간은 지도상으로는 서울이지만, 그곳은 이방인의 서울, 한국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로서 ‘추방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서울이며, 토론토에서 만난 교포 칼 박을 잊지 못해 머무는 캐나다인 어쳐의 서울이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지도를 서울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확정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백수린(白秀麟)의 소설집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14)의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는 또 어떤가. 이 소설은 아프리카에서 사귄 연상의 프랑스(‘프랑스’라고 명시되지는 않지만) 여인에 대한 한국(이 또한 명시되지는 않는다) 남자 ‘리’의 애증을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에서 ‘리’가 있는 곳은 한국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곳일 고궁이지만, 이곳은 서구와 한국, 또 한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식민지적 욕망이 교차하는 더없이 다국적인 공간으로 나타난다. 명백히 ‘Lee’의 번역인 남자의 이름조차 타자화의 산물이다. ‘리’는 아마도 그의 전 프랑스 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한국어 이름 대신 불렀을 호칭일 것이다.
이천년대 초반 소설에서만 해도 이국의 장소는 한국인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낯선’ 시적 분위기나 ‘이방성’을 불어넣기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는 ‘저기’를 보여주면서 ‘여기’를 말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낯선 풍광 속으로 떠나지만 그들은 ‘여기’의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국’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장식적인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가 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즉 ‘저기’를 보여주면서 ‘저기’와 ‘여기’를 동시에 말하는 문학, 또는 ‘여기’가 더이상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케 하는 문학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레띠(F. Moretti) 식으로 소설의 공간을 지도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아니, 그런 그릴 수 없는 지도가 최근 소설의 초국적이며 혼종적이고 간(間)문화적이며 탈경계적인 공간성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줄지도 모르겠다.
또 한가지 최근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이천년대 초반 소설에서만 해도 뚜렷하던 ‘한국인’과 ‘세계’ 사이의 긴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4년에 발표된 전성태(全成太)의 「국경을 넘는 일」을 보자. 거기에는 한국인, 특히 한국남성이 ‘국경’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경직성과 긴장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소설이 포착한 한국남성은 홀로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배낭여행족임에도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어딘가 뻣뻣하고 강박적인 데가 있다. “국경의 다리 앞에서 섰을 때 박에게 특별한 감회 같은 것은 없었다”라고 하지만 막상 박은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의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 탄흔(彈痕)이 보이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질주하기 시작한다.1) 또한 그는 여행에서 만난 일본여성 나오꼬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빠지고 그녀가 호텔방을 나가버리자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래? 나도 네가 무서워’”2)라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실수를 범한다. 그는 세계 속에서 여전히 한국인(한국남성)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여행 중의 그의 행보는 한국과 외국과의 해묵은 감정적 관계를 반복·재생산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소설을 보면 이런 ‘한국’과 ‘세계’ 사이의 대결구도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사라진 듯 보인다. 예컨대 손보미(孫寶渼)의 「달콤한 잠—팽 이야기」를 보자. 손보미의 소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동일한 분위기와 동일한 맛을 내는 아메리칸 커피체인점 같은 친근하면서도 낯선 인상을 자아내지만, 「달콤한 잠—팽 이야기」의 서두는 머릿속에 소설의 지도를 분명하게 그리면서 읽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만하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팽은 정호가 있는 방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문을 열게!’ (…) 윌리엄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팽은 십대 중반 때 부모님이 사는 보스턴을 떠나 할머니가 있는 런던으로 갔고, 할머니는 그를 윔블던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바로 그 학교에서 팽은 윌리엄을 처음 만났다. (…) 팽이 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정호를 만났고 그와 무척 친해지면서 윌리엄, 팽, 정호는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려다니는 사이가 되었다.”3) 작품 속의 서울이란 공간은 글로벌 메트로폴리스로서 뉴욕이나 토오꾜오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대학 친구들이 만난 레스토랑 “더 브라세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빠리의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일본어 자막을 달고 등장한다. 주인공 ‘팽’의 본명은 “스티븐 길치 킴”이고 그는 한국인 할아버지와 영국인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미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세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조해진과 백수린은 손보미처럼 ‘한국식 단편소설’의 색채를 빼고 영미 번역문학의 색을 입히지는 않지만, 그들 소설은 대체적으로 외국을 대단한 동경이나 두려움 또는 생소함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배수아(裵琇亞) 소설에서처럼 국가정체성과 성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소거한 무국적적인 인물들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선택은 한국인, 한국어라는 정체성에 대한 당위적 요청이 있을 때 도발성과 실험성을 얻는다. 자신을 굳이 한국인이라 의식하지 않고, 한국어에 대한 소속감도 소명의식도 별로 없는 세대,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거나 낯설지 않은 세대, 민족의식에 별다른 관심과 열망을 보이지 않는 세대라면 그런 배수아식의 “이방인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