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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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민 尹在敏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4. 1985년생.

shoobidoo@daum.net

 

 

 

힙스터의 정치학: 그녀에게 쇼파르를 (許)하라

김사과론

 

 

OCCUPY THE REAL

 

미국 청년들이 주도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묘한 이름의 시위야말로 2011년 서구세계에서 벌어진 가장 주목해야 하는 사건임에 분명하다. 청년들은 점령 장소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정치적 구호와 카니발적 일탈이 기괴하게 뒤섞인 이 새로운 형태의 시위는 어느 철학자의 적확한 언급대로 싸구려(cheap)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하는 불안한 시위임에 틀림없다. 노심초사했는지 그는 덧붙여 말한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인 것이다.”1)

이러한 언급은 이번 월가 시위의 중심에 있는 힙스터(hipster)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쿨’한 흑인문화를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영위하는 백인’을 뜻하는 말이었던 힙스터는 이런저런 문화적 어원변화를 겪다 2000년대 들어 ‘스키니진, 무기어 자전거, 유럽식 담배, 미국식 장식품(예를 들어 나이키 마크), 질 좋은 차와 커피, 인디음악, 독립영화 등을 즐기며 아는 척하기, 아닌 척하기, 주류에서 벗어난 대안문화, 냉소, 실없음, 쿨함을 추종하는’2) 실없고 나약한 비주류 중산층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해 오늘에 이른다. 이에 더해 2000년대의 힙스터들은 주류에 저항하는 급진적 정치의식을 지니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을 현실세계의 정체(政體)와 연관시키는 데 무능력하거나 무기력하며 이를 문화적 원한감정(ressentiment) 따위의 상상적 소비로 대체한다. 요컨대 이들은 자신을 온전한 주체로 아로새길 유의미한 상징계적 맥락을 잃어버린 채 상상적으로 주어진 기호만 소비하며 의미의 의미화 자체를 거부하는, 최신판 포스트휴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발 딛고 사는 세계란 과연 어디일까. 아무것도 의미화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유하는, 2000년대 힙스터들의 이 기괴한 세계야말로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슬라보예 지젝이 모든 미국인들을 초대했던 바로 그곳, 실재계의 사막이다.3) 세상의 모든 상징과 상상이 이루어지는 불가해한 토대이자 상징계의 불가해한 구멍으로서의 바로 그 실재계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000년대의 힙스터들은 앞 세대가 아로새긴 역사의 음각에 굴러떨어진 채 실재계의 사막을 겉도는 유목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이 일으킨 월가 시위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소거당한 채 실재계로 추방당한 이들이 이 실재계의 궁극적인 소유를 선언하는, 새로운 시대의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들은 상상과 상징이 누비는 공간이자 이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실재’가 자신들의 유일무이한 무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의 힙스터들은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힙스터들이여, 당신들이 점령하고자 하는 것은 케케묵은 월스트리트 따위가 아니다. 드디어 구질구질한 실재계에서의 십년만기 주택담보대출 파기를 선언할 때가 도래했다. “실재계를 점령하라(Occupy the real)!”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이 역동적이며 윤택한 기적의 땅, 서울에도 실재계를 겉도는 힙스터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때론 역사의식이 부재한 시대의 쓰레기로, 무한한 가능성이 숨겨진 방황하는 청춘으로도 불리지만, 아무런 몫 없이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상상적으로 정치와 문화를 소비하는, 실재계의 몫 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2000년대 뉴욕의 힙스터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

기괴한 정념과 폭력에 끊임없이 휘말리며 희망도 목적도 없는 삶의 악무한을 반복하는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을 탐구하는 것은 2000년대 한국의 힙스터를 탐구하는 데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사과는 자신의 소설에서 외롭고 고립된 서울의 힙스터들을 호명해왔다. 이 글은 그 외로운 호명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 될 것이다.

 

 

배설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열증적 히스테리를 마구잡이로 세상에 배설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기인하는 상상적 환청을 통하거나(「영이」), 고추장의 매운 맛에 집착하며 친구를 괴롭히거나(「과학자」), 열등감에 사로잡혀 친구를 죽이거나(『미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불안들은 아무런 내외적 정합성 없이 갑작스럽게 어느순간 배설된다.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깜짝 놀란 이나는 할머니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나의 손을 깨물었고 또다시 깜짝 놀란 이나가 두손으로 할머니의 목을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열개의 손가락에 힘을 주자 할머니의 얼굴 빛깔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이나는 평소 자신의 팔이 발레리나의 팔같이 길고 미끈하다고, 그중에서도 프리마돈나의 팔로서 젤로 늘씬하고 우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런 팔로 할머니의 목을 조르고 있으니 발레리나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표정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져가고, 이나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4)

 

길을 지나가다 우발적으로 차에 깔린(이 자체도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할머니를 발견한 이나는 우발적으로 할머니를 살해한다. 이나가 할머니를 죽인 이유 따윈 소설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나 자신조차 자기가 왜 할머니를 죽였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정합적 판단능력이 결여된 금치산자처럼 말이다. 더욱 난감한 사실은 할머니를 죽인 이후의 일이다. 이나는 마치 할머니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