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민경 崔珉景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2006년 진주가을문예 신인상과 2009년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장편소설 『나는 할머니와 산다』 『십자매 기르기』 『마리의 사생활』 등이 있음.

storycmk@naver.com

 

 

 

내 첫번째 거위

 

 

종현은 공고를 나왔고 2개월 정도 전공과 무관한 마술을 배웠다. 졸업한 뒤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 서너군데 취직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동안 직업을 갖지 못한 채로 지내다 뜬금없이 동물원에 취직했다. 정규직은 아니고 사육 보조 아르바이트였다. 하루 종일 테마파크를 돌면서 짐승 우리에 물과 사료를 채워놓거나 분변을 치우는 잡다한 일을 했다. 가끔은 사육사 대신 비단구렁이를 목에 걸고 아이들과 사진 촬영을 하거나 관람객들이 만져볼 수 있도록 원숭이, 당나귀, 염소 들을 우리 밖으로 끌고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한동안 괜찮더니 최근에 일이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기에 오늘 밤은 6개월 장기근속 축하 파티를 열기로 했다. 실은 파티는 구실이었고 소맥이 마시고 싶었다. 우리는 각자 퇴근길에 맥주와 소주를 사 가지고 오기로 약속했다. 나는 페트병에 든 참이슬과 케이크를, 종현은 테라와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돼지족발을 주문한 뒤 상을 펴고 그 위에 케이크를 놓았다. 긴 초를 하나 꽂으니 허전해서 그보다 짧은 초 세개를 빙 둘러 꽂았다. 전등을 끄고 초에 불을 켤지, 초에 불을 붙이고 전등을 나중에 끌지를 진지하게 의논하다가 그냥 아무렇게나 하자고 말해버렸다. 그럴 거면 그냥 하지 말까, 하기에 아니야 특별한 날이니까 촛불은 켜야 해, 하고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반응해주었다. 결국 종현이 전등 스위치를 내리는 동안 내가 초에 불을 켜기로 했다.

축하해, 종현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사이에 둔 채 내가 말했다. 종현은 쑥스러우면서도 당당한 표정으로 입김을 세게 불어 촛불을 껐다.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나서 케이크는 상 한쪽으로 치우고 술병을 올렸다. 소맥을 섞기 전에 테라를 한모금 마셨다. 야, 종현아. 종현은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를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거 맛있다. 맛있어서 눈물이 나. 설탕 입힌 딸기보다 테라가 백배 천배는 맛있다 종현아. 종현은 딸기를 꿀꺽 삼키고 나서 방긋 웃었다. 아기처럼 웃었다. 고마워, 선미야.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고맙다니까 됐다는 생각으로 소주를 맥주잔에 부었다. 이렇게 하면 3대 7이 된다? 쇠젓가락으로 컵의 밑바닥을 툭 치니 천천히 거품이 올라왔다.

우리는 가끔씩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술을 마셨다. 마실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몸을 떨었다. 주문한 돼지족발도 잊은 채 케이크를 안주 삼아 마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족발은 우리를 잊지 않아서 제때 도착했고 마침 술이 떨어져서 종현이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갔다 왔다. 오는 길에 허니버터칩이랑 바나나랑 김치사발면도 사 왔다. 잘했다. 잘했어. 종현이 똑똑하구나. 나는 정확하게 말했고 종현도 정확히 알아들었다. 족발도 먹고 김치사발면도 먹고 바나나도 하나씩 나눠 먹으니 몹시 배가 불렀지만 소맥은 계속해서 마실 수 있었다. 술이 남아 있어서 우리는 잠들 수가 없었다. 종현이 ‘고객들’ 얘길 해달라고 해서 오늘의 진상은 누구였냐면,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존나 힘들겠네, 우리 누나.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심각하게 말하니 한없이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선미야, 내가 마술 보여줄까? 종현이 졸린 눈으로 말했다. 제발 그것만은, 하는 심정이었지만 술김이라 그냥 허락해버렸다. 그 즉시 종현이 침대 밑에 넣어둔 박스를 끌어당겼다. 하얗게 뭉쳐진 먼지와 함께 끌려 나온 상자는 뚜껑이 닫혀 있었다. 그것은 종현의 철 지난 환상 혹은 잡스러움의 무덤 같았다. 그냥 귀신 이야기나 하면서 놀면 좋을 텐데 종현은 굳이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우와, 이게 얼마 만이야. 감동한 얼굴로 마술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종현을 지켜보기만 했다.

상자 안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그건 그 자체로 마술 같았다. 종현이 애써 내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다 본 것 같았다. 그러니 그냥 잘까, 하고 말하진 못하고 웃으면서 앉아 있었다. 종현은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원색의 플라스틱 컵, 핑크색 깃털, 보풀이 인 연두색 테니스공, 반투명한 정육면체 안에 든 주사위, 잘린 엄지손가락 모형 같은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 이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 잊어버린 것 같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내 앞에 검은색 플라스틱 뚜껑을 들이댔다. 잘 봐, 선미야. 그러면서 또다른 검은색 플라스틱 받침대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이건 닭이야. 종현이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 닭이구나. 쓰다 만 지우개처럼 생겼지만 닭이라고 하니 닭인가보다 했다. 자세히 보면 표면에 닭이 새겨진 것에 불과했지만 닭은 닭이었다. 남은 소주를 맥주잔에 부어 단숨에 들이켠 뒤 돼지뼈에 붙은 살을 뜯으니 닭이건 돼지건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내가 이걸 달걀로 바꿀 거야. 종현은 들고 있던 검은 플라스틱 뚜껑을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뚜껑은 엄지와 검지로 집어야 할 만큼 작은 사이즈였다. 뚜껑을 닫고, 마술사들이 흔히 하는 현란한 손동작을 선보인 뒤, 다시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안에 달걀이 있고, 달걀은 지우개똥만큼이나 작고 조잡한 플라스틱이었고, 나는 어머,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하고 외쳤다. 내 반응에 종현이 크게 웃으면서 이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내 양 손바닥 위에 카드 한장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마술쇼를 하게 되면, 하고 중얼거리며 카드가 놓인 내 손바닥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 마술쇼의 주인공은 네가 될 거야.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거렸다. 종현이 손을 뗐을 때 카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건 아마도 소맥을 너무도 많이 마신 탓이겠지만,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져서 자리에 눕고 싶어졌다. 아, 더 할 수 있는데. 보여줄 게 많아. 종현이 카드를 촤라락 넘기며 호기롭게 말했다. 나는 종현을 빤히 쳐다봤다. 귀엽네, 우리 종현이. 종현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곤 바닥에 널린 것들을 미련 없이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누나…… 나 사랑하지? 침대에 누운 종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건 한번 하자는 뜻이었고, 두번도 할 수 있고 세번도 할 수 있는데 결정적으로 종현이 너무 못해서 하기가 싫었다. 원래 못하는 애들이 밝히는가 싶을 만큼 서툴렀다. 그런데도 뭘 했다고 땀을 그렇게 흘려대는지 끈적한 땀방울이 내 이마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얼마나 진저리를 치는지 종현은 모른다. 그런 걸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속으로만 생각했다. 벌써 눈이 감기기 시작했는데 종현이 옆에서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고 그것을 억압하면 어쩌고, 보채듯이 중얼거렸다. 야, 종현아. 졸다 말고 종현을 나직이 불렀다. 어, 누나. 왜, 뭐, 한번…… 다급한 얼굴로 내게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그러니깐…… 남자는 원래 그렇다? 여자랑은 달라, 하고 또 시시한 소리를 해서 나를 웃겼다. 실컷 웃고 난 뒤 남은 케이크는 내일 먹자,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 밤을 보낸 뒤에도 우리는 정시 출근을 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아직 늦지는 않았는데도 늦었네, 늦었어 하며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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