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지금 러시아에선 무슨 일이?

소비에뜨 노스탤지어와 기억의 정치학

 

 

이문영 李文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저서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 『톨스토이와 평화』 『평화를 만든 사람들: 노벨평화상 21』(편저) 등이 있음. peacemoon@snu.ac.kr

 

* 이 글은 2017년 12월 13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회의 ‘North Korea in Transition’에서 발표한 원고 “Soviet Nostalgia in Post-Soviet Russian Pop Culture”의 일부를 요약, 보완한 것이다. 본문 중 노스탤지어 관련 내용은 졸고 “Nostalgia as a Feature of ‘Glocalization’: Use of the Past in Post-Soviet Russia,” PostSoviet Affairs, vol. 27, no. 2 (2011), 「탈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노스탤지어 비교 연구」, 『슬라브학보』 26권 2호(2011)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1. 21세기 러시아를 배회하는 유령,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학술행사와 전시회가 열리고 많은 기념서적이 출판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정작 러시아는 어떨까. 21세기의 러시아인은 혁명을,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소련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소련이 무너진 지 채 십년도 되지 않은 1990년대 중반 이미 러시아 땅에서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가 대중적 현상으로 관찰되기 시작했다. 때로는 회상과 그리움이라는 정서적 반응으로, 때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재성찰의 방식으로, ‘소련’은 탈사회주의 러시아의 문제적 키워드로 부상했다. 이후 이 현상은 해가 갈수록 위력을 더해, 현재 ‘제국 부활’ ‘유라시아주의’와 더불어, ‘체제 전환 이후 러시아’를 요약할 3대 키워드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그것은 러시아 대중정서의 근간이자 문화산업의 키워드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혁명의 본원이자 탈사회주의화의 진앙이었던 러시아에서 목도되는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현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상식으로 정착했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체제나 이념보다 변화에 완고한 ‘정서, 가치, 태도의 집합체’로서 러시아인의 ‘문화적 자기규정’에 이 현상은 어떻게 반영되는가. 또 소비에뜨 노스탤지어를 통한 과거의 소환은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차례대로 내려보고자 한다.

 

 

2. 1990년대 러시아의 소비에뜨 노스탤지어

 

(1) 브레즈네프, ‘좋았던 옛 시절이여!’

그리스어 ‘노스토스’(νόστος, 귀향)와 ‘알고스’(άλγος, 그리움)의 합성어인 노스탤지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기인한 슬픈 심정’을 뜻한다.1 명백하게 ‘공간’ 범주로 출발한 이 개념은 실제 활용에 있어서는 자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쓰이곤 한다. 이때 ‘고향’과 ‘과거’, 즉 공간과 시간의 치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실’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린 시절.

중요한 것은 노스탤지어를 현재화하는 메커니즘도 ‘상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여러 학자의 지적처럼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현재의 이해()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법이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하는 것은 “현재 앞에서의 너무나 깊은 당혹감”이다.2 특히 익숙한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급격한 사회변동의 시기, 정치적·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 속에 많은 사람들은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현재로 소환하는, 즉 노스탤지어를 현재화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노스탤지어 속에 환기된 시공의 이상성(想性)은 현재 부재한 가치체계를 대신해 현실을 판단하는 척도이자 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되며, 더 나아가 바람직한 미래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따라서 그 표면적인 과거지향성과 달리 노스탤지어는 자기재정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과 같이 매우 실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갖기 마련이다. 노스탤지어가 이념 및 가치체계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전환기 사회에 특징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에 인 노스탤지어 붐의 메커니즘도 바로 이와 같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변동의 초기, 즉 뻬레스뜨로이까부터 체제 전환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노스탤지어는 결코 대중적 현상이 아니었다. 당시 대중적 정서를 지배한 것은 ‘어제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기대’였고, ‘깊은 당혹감’이 아니라 ‘절실한 희망’이었다. 과거는 그리움이 아니라 단절과 개혁의 대상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과거와 단절을 선언한 이때가 과거에 대한 고증과 복원이 러시아 역사상 가장 활발히 진행된 시기라는 사실이다. 접근이 금지됐던 문서보관소가 열리고 매스미디어의 기능이 정상화되면서, ‘기억하기’는 역사학자만의 과제가 아니라 일반대중의 일상이 되었다.

과거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의 대상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 시기, 즉 노스탤지어가 대중적 정서를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99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시스템으로의 편입이 국가 위상의 바닥 모를 추락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경제위기가 계속되면서 개혁의 기대가 환멸로 변한 때다. 이제 대중에게 중요한 가치범주는 ‘변화’와 ‘개혁’에서 ‘안정’과 ‘질서’로 이동하고, 민주주의의 자율성보다 ‘강한 손’(strong Ostalgie and the Politics of the Future in Eastern Germany,” Public Culture 18:2, 2006, 363면.

  • Ю. Левада, “Человек ностальгический: реалии и проблемы,” http://ecsocman.hse.ru/data/
    330/985/1219/02levada-7-13.pdf; Г. Зборовский и Е. Широкова, “Социальная ностальгия: к исследованию феномена,” СоцИс, No. 8, 2001, 34면.
  •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