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제8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상실의 세계와 세계의 상실

신경숙론

 

 

이재영 李在榮

1963년 대구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현재 베를린자유대학 독문학 박사과정. tugend21@yahoo.co.kr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항상 집으로.

─노발리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우리는 가속적인 변화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속도는 우리 시대의 표징이다. 속도의 황홀함에 매혹된 시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며, 생산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생산을 충족시키고 있다. “같은 강에서 두 번 같은 물결을 탈 수 없다”는 고대의 구절에서 우리는 더이상 강의 같음과 수위의 균형을 연상하지 않는다. 변화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만 있는 것이며, 용도를 잃은 과거는 신속하게 폐기된다. 목적에 대한 질문과 성찰은 약점의 징후로 간주되고, 가치는 오직 계량될 때에만 존재를 인정받는다. 전체에 대한 근심을 저버린 마끼아벨리주의자들, 그들이 우리 시대의 군주들이며 전위들이다.

신경숙(申京淑)의 소설들은 이러한 시대의 지배적인 흐름과 궤를 달리한다. 신경숙 소설들에서는 시간이 지속적으로 과거의 개입을 받고 있으며, 전망 대신 회상이, 기대 대신 상실이, 생성 대신 몰락이, 빠름 대신 느림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시대정신과 정반대 쪽을 향하고 있는 신경숙 소설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성격과, 그 세계 안에서의 문학의 위상을 고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상실의 세계

 

신경숙의 소설들은 부재로 충만하다. 인간간의 소통과 신뢰, 몸과 감각의 일부, 고향의 집,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 어떤 목소리, 젊음, 영원성, 그리고 나의 자리가 비어 있다. 부재하는 것이 내게 가치있는 것일 때, 부재는 단순히 어떤 것의 없음에 대한 의식을 넘어서 상실 혹은 기대의 감정을 낳는다. 상실감은 이미 존재했던 가치있는 것의 부재를, 기대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치있는 것의 부재를 향한다. 나아가 이러한 부재가 도달될 수 없는 것을 향할 때, 상실과 기대는 슬픔과 결합되어 동경으로 전화된다. 복구와 구현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동경의 강도는 현재의 고통 및 공허감과 비례한다.

시간을 축으로 삼았을 때, 신경숙 소설세계의 출발점은 강렬한 동경이다. 권태롭고 갑갑한 고향을 벗어나 도시로 가고 싶은 마음이다. 어릴 적, 가볍게 날고 있는 것들을 사랑하던 신경숙이 도시에서 놀러 온 친척에 대해 느꼈던 선망은 작품에서도 “산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보일까?”(『풍금이 있던 자리』 144면)1라는 기대로 표현된다. 그러나 고향을 고통의 공간으로 경험하는 「지붕」(『강물이 될 때까지』)의 여자가 철새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이런 기대는 처연한 갈망으로 상승된다. 이런 갈망의 극한을 지시하는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외딴 방』의 쇠스랑이다. 무료한 고향을 떠나 도시의 큰오빠에게로 가는 것이 꿈인 소녀는 현실과 소망의 괴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러나 도시에 도착한 후에도 동경은 잦아들지 않는다. 여전히 새는 날아가기에 아름다우며, 「직녀들」(『풍금이 있던 자리』)의 P는 늘 여기가 아닌 저기에 대한 말을 하고, 『깊은 슬픔』의 화연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며,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당신’에겐 언제나 저 멀리 있는 것이 이긴다. 그러나 동경은 미래와 세상 바깥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 고향을 더 강렬하게 지향한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풍금이 있던 자리』)의 이숙은 사라졌다는 이유로 공룡에 집착하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고향은 이제 빈번히 이상화되며, 연어로 상징되는 회귀욕망은 인간의 본질로 파악된다. 전통은 모래 발자국을 해독함으로써 길을 찾아낼 줄 아는 지혜로운 것이고, 고향은 어느 상황 속에서라도 내 편이 돼줄 것 같은 무한정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의 처소이자 어머니의 삶으로 대표되는 본원적 진실의 터전이다. 과거는 자아와 세계의 분열 이전의, 의미로 충만했던 시대로 된 것이다.

반면 도시는 이런 고향을 파괴해온 잔인한 유혹과 강제로 그려진다. 눈물을 흘리며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은 폐허 같은 빈집들이다. 도시의 부화(富華)는 농민들을 정체감과 빈곤감에 빠뜨리고, 고향은 지긋지긋한 곳이 된다. 가족의 재산을 몰래 팔거나 공금을 들고 달아나는 오빠들,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어머니가 향하는 곳도 도시다. 도시의 눈부신 속도를 실감하게 하는 기차는 고향의 한가운데를, 수많은 아이들의 목을 자르고 지나간다.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철로는 도시의 폭력이었으며, 이별과 죽음을 낳는 금기의 자리였다.

도시에 진입한 후 오히려 동경이 더 강렬해진 것은, 도시가 당초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향보다 더 회피하고 싶은 곳이었음을 반증한다. 실제로 신경숙 소설에서 도시에 사는 화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막연한 두려움에 진저리를 치고 있으며, 일찍부터 삶에 대해 겁을 내게 된 사람들이다. 이는 이 화자들이 도시의 삶에 원활하게 섞여들지 못하고 고립된 이방인의 배제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저들과 섞일 수 있다면”(『강물이 될 때까지』 17면)이라는 선망은 곧 죽을 때까지 삶의 외곽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으로 치닫는다. 세계의 주변을 배회하기만 하는 자아는 혼자라는 인식과 함께 자신을 배척하는 세계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다. 이런 공포는 때로 적의로 변하여 세상에 대한 비정형적인 증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행기의 부적응이 낳는 한시적 좌절감을 넘어서 세계 전반에 대한 두려움, 즉 세계 내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까지 도달한 상태는 어떤 특수한 ‘충격적인 경험’(trauma)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외딴 방』에서의 희재의 죽음이 바로 그런 경험이다.

『외딴 방』은 자아의 구원을 위해 치르는 초혼제였다. 희재의 죽음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놓인 장애였으며 세계를 어두움으로 뒤덮는 폐허였다. 즉 희재의 죽음이 낳은 결과는 세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자아와 세계의 단절이었던 것이다. 희재의 죽음 이후 화자는 타인과의 교류를 일절 거부할 것을 맹세한다. 이런 맹세는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오래전 집을 떠날 때』)에서 숨어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나타난다.

희재의 죽음이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그 근저에서 뒤흔들게 된 것은, 그 죽음의 극단적인 감각적 직접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그녀의 축 늘어진 몸.”(『외딴 방』 2, 229면) 사람 몸의 끔찍한 파괴와, 그 파괴 위에서 창궐하는 죽음의 식욕, 몸의 허망한 물질성, 그 몸에 대한 사랑과 구토의 극단적 동시성, 차단할 수 없는 강렬한 부패의 냄새, 이러한 죽음의 가차없는 폭력적 사실성, 그 죽음의 과정에 자신을 참가시킨 운명의 잔인함과 이해할 수 없음─희재의 죽음은 섬광으로 번뜻 엄습하는 순간의 전율이었으며, 모든 익숙함을 앗아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전복이었다.

이로써 세계를 향한 원근법의 촛점은 죽음과 소멸의 자리에 놓이며, 상실되는 것은 세계 내 사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된다. 세계는 불모의 황무지일 뿐이다. 침몰이 사물의 질서이며 존재란 무(無)로부터의 헛된 도주에 불과하다. 무는 일체의 의미부여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며 조롱한다. 무의 지배 앞에서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이 존재의 허망한 위태로움이 안겨주는 공포에 내맡겨져 있다.

의미가 부재할 때 행동력은 마비된다. 신경숙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무력감과 의욕상실, 공허감, 피곤함, 방심의 상태, 수동성, 우유부단함 등을 보이는 인물을 숱하게 만난다. 이는 세계의 공허에 대한 저 ‘충격적 경험’에서 초래되는 직접적인 반응들이다. 일체의 세계 내적 시도를 불가항력적 위력으로 유린하는 죽음은 신경숙의 작품에 편재(遍在)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사고 혹은 병으로 죽고, 자살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뱃속의 아이들은 유산되거나 사산된다. 죽음은 느닷없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때이르게 찾아든다. “거역할 수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이 불시에 삶에 끼여들었다가 휘이 저어놓고는 잠시 숨는”(『아름다운 그늘』 67면) 것이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강박적 집착은 희재의 죽음이 낳은 충격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이제 상실은 세계의 한 측면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보편적 연관이 된다. 무엇이든 원형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 시간은 오로지 파괴의 과정으로만 인식되며, 생성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보존이나 발전의 원리가 아니라 파괴와 몰락의 원

  1. 이 글에서 살펴볼 신경숙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후로 인용출처는 본문에 책 제목과 면수로만 표시한다. 『강물이 될 때까지』(소설집), 문학동네 1998; 『풍금이 있던 자리』(소설집), 문학과지성사 1993; 『깊은 슬픔』 상·하(장편), 문학동네 1994; 『아름다운 그늘』(산문집), 문학동네 1995; 『외딴 방』 1·2(장편), 문학동네 1995; 『오래전 집을 떠날 때』(소설집), 창작과비평사 1996; 『기차는 7시에 떠나네』(장편), 문학과지성사 1999; 『딸기밭』(소설집), 문학과지성사 2000. 앞의 작품 중 『강물이 될 때까지』는 『겨울 우화』(고려원 1990)의 수정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