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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가 담은 것

황정아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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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겨울과 ‘짙푸른’ 여름처럼 한 계절을 색으로 대표하듯이 한 시대를 색깔로 나타내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노란색으로 표현할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색채심리학에서는 노란색의 중요한 특징이 태양과 가장 닮아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치면 통칭 ‘어둠’의 시대로 일컬어지던 과거에 비추어 우리가 이제 희망이 차고 넘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어야 하겠으나, 이 시대의 노란색은 어느 때보다 희망이 필요하다는 역설의 의미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지난해 공연에 이어 4월 3일부터 연우소극장에서 다시 시작된 연극 <노란봉투>(이양구 작, 전인철 연출)는 시민모임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와 함께하는 공연으로,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파업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란 봉투 캠페인’과 이어져 있다. 연극은 노조사무실을 배경으로 60일간의 파업을 끝낸 후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해고와 손배가압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안산시(!) 소재 SM기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람다움’을 위한 선택

 

누구는 파견이고 누구는 정규직이고, 누구는 회사 편에 서고 누구는 파업에 참여했으며, 누군가는 어용노조 가입서에 서명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기어이 고공농성에 돌입하지만, <노란봉투>는 도무지 화해할 수 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선택의 이면에 똑같은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십년 전, 이십년 전, 또 그전의 숱한 세월에 그랬듯이, 이 고뇌의 이름은 여전히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다움’ 역시 한층 풍성한 삶의 지평을 지시하기보다 더이상은 떠밀릴 수 없는 절벽을 연상시키는 점이 한국사회의 정직하고도 부끄러운 좌표이다. 소송의 탈을 쓴 린치에 다름 아닌 손배가압류라는 신종 폭력은 공공의 정치를 난폭하게 짓밟으며 강화되어온 노골적인 돈의 정치를 대표한다. 불과 며칠 전, 진상규명을 저지할 목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내놓으면서 보상금이 8억이네 11억이네 운운한 것과 정확히 동일한 성격의 폭력인 것이다.

 

노란 리본과 노란 봉투가 갖는 연관성은 이 연극 곳곳에 강조되어 있다. 3년 전 파업으로 엄청난 손배가압류에 시달린 끝에 아들을 위해 이번 파업에서는 회사 편에 선 ‘민성’은, 그 아들이 세월호참사로 희생되자 회사에서 목숨을 끊는다. ‘민성’과 형 동생 사이나 진배없던 ‘병로’는 그의 배신에 분노했지만 손배가압류의 소리 없는 폭력을 겪으며 ‘민성’의 짐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넥타이를 대신 매고서 전광판을 오른다. 고통을 사회적 낙인으로 만들어 고립시키는 전략, ‘사람다움’의 기본을 훼손하는 그 전략을 정면으로 돌파했던 데에 노란 리본과 노란 봉투의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는 연대

 

각자 홀로 껴안은 고통을 차마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저마다 내린 결론을 모두가 공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캄캄한 절벽 앞에서 서로에게 마지막 보루는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연극이 내린 연대의 정의인 듯 보인다. <노란봉투>에서 이런 연대는 극으로 재현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를 전화로 연결하거나 파업노동자를 출연시키는 방식으로 실시간 ‘수행’된다. 이 짧은 순간이 관객에게는 연대의 현장성에 개입하는 경험으로 새겨지게 될 것이다.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김재원, 1966)라는 제목의 오래된 시에는 “개화(開花)는 강 건너 춘분(春分)의 겨드랑이에” 있고 “우리의 동면(冬眠)은 아직도 아랫목에서 밤이 긴 날씨”인데 “한겨울 온실에서” 턱없이 마음을 놓았다가 “종로 바닥에” 묶여 나온 “입술 노란 개나리떼”가 등장한다. 무슨 일이 더 일어나든 이 시대를 대표하는 노란색이 지난 시절 “온도에 속은” 개나리처럼은 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은 그것이 온도를 녹이는 연대에서 기원했다는 데 근거를 둔다. 따지고 보면 마음을 짓누를 장면으로 채워져 있을 듯한 <노란봉투>가 실제로 어떤 경쾌함마저 띨 수 있는 것도 시종 그런 연대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자, 여기 노란 봉투가 있고 거기에 무언가를 담아 전달할 수 있지요,라고 권하듯이 말이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5.4.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