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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새겨진 미국사 이야기

한기욱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vs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

원작이 뛰어날수록 영화가 실망스런 경우가 많은데, 코먹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동명소설을 코언 형제(Ethan and Joel Coens)가 각색·감독한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No Country for Old Men)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빼어난 영화라고 생각된다. 아카데미 4개 부문을 비롯하여 온갖 상을 휩쓸었으니 평가는 충분히 받았는데, 이게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집어말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의 번역부터 혼란의 소지를 준다. 예이츠(W. B. Yeats)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 제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옮겨놓은 것은 ‘대략난감’한 노릇이다. 노인을 박해하는 신자유주의 구호 같기도 하고 무슨 철학적인 화두 같기도 하다. 게다가 소설의 번역본을 펴낸 출판사는 보도자료에서 “왜 노인인가? 누가 노인인가?” “왜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던지면서 ‘철학적’인 읽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고 하소연할 법한 인물은 중심화자로 등장하는 보안관 벨(Ed Tom Bell)이다. 그는 멕시코와 인접한 텍사스 고향 땅에서 젊었을 때부터 보안관으로 근무하며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독백은 1980년에 이르러 멕시코-미국의 국경지역에서 마약거래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황량해지는 범죄자의 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령 첫 장면에서 벨은 14살짜리 소녀를 살해한 젊은 살인자가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살인을 계획해왔다는 사실을 담담한 어조로 전한다. 한 엄마가 갓난애를 쓰레기 분쇄기에 집어넣었다는 신문보도도 들려준다. 그러니 텍사스의 고향 땅이나 크게는 미국 땅이 보안관 벨처럼 ‘영혼’의 중요성을 믿는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되는 것이다.

누아르와 스릴러의 요소

이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장르적 특성은 스릴러이지만 비평가에 따라서는 이 영화를 ‘텍사스 누아르'(Texan noir) 혹은 ‘서부 누아르'(Western noir)로 분류하기도 한다. 미국 서부 혹은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죄사건임을 부각하는 것이다. 영화의 긴박감은 국경지역에서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마약거래와 관련된 240만달러를 손에 넣은 모스(Llewelyn Moss)와 그를 뒤쫓는 멕시코 마약조직원들과 살인청부업자 쉬거(Anton Chigurh)의 용의주도하고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에서 나온다. 이들을 한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두 사람의 행동을 해석할 관점을 제시한다. 마약과 돈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피비린내나는 폭력의 현장이나 냉혈한 킬러들의 각축전이 실감나게 와닿는 것은 누아르와 스릴러 장르를 노련하게 다루는 코언 형제의 치밀한 연출력 덕분일 것이다. 가령 극적 전개를 예고하는 효과음이나 음악을 절제하거나 아예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살인과 폭력의 실감을 투박하고 묵직하게 전달하는 수법이 그렇다. 코언의 스릴러는 조미료를 치지 않아 재료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쉬거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누아르나 스릴러의 묘미와 더불어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쉬거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의 출현이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가축도사용자 삽입 이미지살용 압축공기총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비정한 내면에 조응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모스가 물질적 탐욕에 나포되었음에도 순진한 카우보이 영혼을 잃지 않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면, 쉬거는 이를테면 휴머니즘의 경계를 넘어선 초인 혹은 기계나 괴물 같은 인간이다. 쉬거야말로 보안관 벨이 혀를 내두르는 영혼을 결한 듯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들의 화신과도 같다. 쉬거는 마약과 돈, 탐욕의 그물망 속에 살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자기의 원칙대로 산다. 그렇기에 한때 동업자 킬러였던 웰즈(Carson Wells)는 쉬거를 ‘원칙을 지닌 사람'(man of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쉬거의 이런 면모는 약국 앞에 세워놓은 차량을 폭파시켜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서 약국에서 유유히 약을 챙겨간다든지 총상 입은 자기 몸을 수의사가 짐승 다루듯 사정없이 다루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인간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법칙에 종속되는 하나의 유기체적 자연물일 뿐이며, 인간의 몸은 짐승의 몸과 다르지 않다. 쉬거가 가축도살용 압축공기총으로 사람들을 소 잡듯이 간단히 죽이는 장면이 무시무시한 것은 이런 인간 이전의 동물적·물리적 차원이 실감나기 때문이다. 쉬거가 한 허름한 주유소의 주인에게 동전의 앞뒷면을 맞추게 하여 운명을 결정짓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특히 섬뜩한데, 쉬거가 냉정하고 살벌한 도살업자의 역을 빈틈없이 해낸다면 주유소 주인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소처럼 자기의 죽음을 예감할 때의 공포를 탁월하게 연기해낸다. 이 작품이 흥미 위주의 누아르나 스릴러를 넘어서는 것도 쉬거라는 인물 속에 미국과 미국인의 미래상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쉬거는 근대 서구 백인의 의식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악한인 것은 미국사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대목으로 여겨진다.

서부극의 전통과 경계의 해체

이 작품과 관련되는 또 하나의 장르는 서부극이다. 이 작품이 모범적인 서부극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선인이 악당을 제압함으로써 잠시 위태로웠던 질서를 복원하는 권선징악적 서부극의 전통, 특히 백인 보안관이 나쁜 인디언들을 벌주는 인종주의적인 ‘냉전’ 서부극의 틀을 완전히 뒤엎는다. 어떤 종족인지도 알 수 없는 악당 쉬거가 끝까지 살아남아 모스의 아내까지 처단하는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런데 서부극의 효시로 평가받되 이런 흑백논리적 서부극과는 차원이 다른 쿠퍼(James Fenimore Cooper)의 《가죽각반 이야기》(Leatherstocking Tales)와 비교하면 이 작품에 새겨진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쿠퍼의 소설에서 깊디깊은 우정을 나누는 백인 사냥꾼 내티 범포(Natty Bumppo)와 인디언 추장 칭가츠국(Chingachgook)과는 달리 백인 사냥꾼 모스와 신원을 알 수 없는 킬러 쉬거는 서로의 숨통을 겨누는 적이다. 백인 정착촌의 문명사회를 등지고 황야로 들어가는 내티 범포의 행적이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문명사회의 확장과 서부 개척의 역사를 일러주었다면, 이 작품에서 모스의 행적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모스는 쉬거에게 쫓겨 부상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예전에 범포가 칭가츠국과의 우정을 나누면서 서부의 황야를 누비는 행위가 곧 미국의 변경을 개척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이제 모스가 쉬거의 가차없는 추격에 쫓겨 국경을 넘는 행위는 미국의 서부에 건설된 변경들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약조직의 멕시코인 하수인들에게 졸지에 죽임을 당하는 모스의 초라한 최후도 한때 광활한 서부 황야를 호령하던 미국의 예전 선조들과 달리 서부의 미국인들이 현재 직면한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는 1980년경부터 부쩍 늘어나는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의 마약범죄 사건을 누아르와 스릴러의 양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다루면서도 새로운 미국인의 등장과 최근 미국 역사의 미묘한 변이까지 감지하는 비범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2008.3.19 ⓒ 한기욱

* 사진 출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thecoens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