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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성의 힘

정홍수

지금 이곳의 로제타 이야기를 기다리며

정홍수 | 문학평론가

소문으로 듣던 좋은 영화를 뒤늦게 접하고 그 단순성의 힘에 놀란 적이 적지 않다. 내겐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오나 대만 감독 허우 샤오셴의 영화가 특히 그러했다. 두 사람의 ‘쉬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살아간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몸으로 그냥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그 느낌은 소설가 공지영의 언어를 빌린다면 ‘인간 혹은 세상에 대한 예의’를 환기시키는 영화의 깊은 시선에서 오는 것 같았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로 표현된 이런 단순성이 쉽게 도달한 지점일 리는 없을 것이다. 삶의 모순과 복잡성을 오래 헤아리고 견뎌낸 인간적 예술적 실행의 성실한 누적이 그 쉽고도 깊은 화면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최근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만든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알려진 대로 각각 1951년과 54년생인 이 형제 감독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빈민 거주지역이나 파업 현장, 공장 등을 돌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으로 그들의 영상작업을 시작했고, 86년에 극영화로 옮겨왔다. 노동자나 도시 하층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들의 오랜 관심은 극영화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극한의 상황에 선 인간의 윤리적 선택이라는 좀더 무거운 주제와 화학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듯하다. 아들을 죽인 소년범과 마주선 아버지의 고뇌를 다룬 <아들>(2002)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의 아이를 불법 입양조직에 팔아먹는 소매치기 부랑아의 이야기인 <더 차일드>(2005)가 올초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는 서둘러 달려가기도 했다. 이들 ‘인간 구원 연작’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 <약속>(1996)과 <로제타>(1999)를 뒤늦게 본 것이 얼마전의 일이다.

그런데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오즈나 허우 샤오셴과는 또다른 맥락에서 단순성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가령 <로제타>의 경우를 보자. 이 영화는 로제타라는 십대 후반의 소녀가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찾아헤매는 이야기다. 이들 형제의 영화가 늘 그렇듯 카메라는 주인공 로제타의 등뒤나 얼굴에 바싹 붙어서서 시종 흔들리며 인물의 호흡과 시선, 움직임을 따라간다. 관객은 많은 것을 보거나 들을 수 없다. 씩씩거리며 뛰어다니는 로제타의 숨소리와 함께 한겨울의 추위 속에 분노와 불안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최소한의 상황묘사가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카메라는 좀체 로제타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요구는 쉽고도 분명하다. 관객은 주인공 로제타의 자리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호흡과 시선으로 영화 속 사건과 시간을 겪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요구는 결국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관객을 윤리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불편을 감수하고 극단적 클로즈업의 이물감이나 좁은 시야의 답답함을 조금씩 견디다보면 도시 외곽의 캠핑촌 트레일러에서 알코올중독에 빠진 엄마와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십대 소녀의 삶이 너무도 아프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20세기 말 서유럽의 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후기자본주의의 노동현실이 이렇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견습기간이 끝났다고 일방적으로 해고통보를 받는 로제타. 그녀는 와플 한조각과 수돗물로 배를 채우면서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보지만 일자리는 없다. 헌옷을 수선해 팔고 캠핑촌 관리인 몰래 물고기를 낚아 두 모녀의 먹을 것을 마련한다. 와플을 파는 청년 리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와플 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된 로제타. 청년의 집에 초대받아 토스트 몇조각의 초라한 만찬을 대접받던 로제타가 사양하던 맥주 한병을 단숨에 들이켜는 장면은 생존의 벼랑에 서 있는 한 인간의 자존과 허기를 더없는 구체성 속에서 보여준다. 그날 리케의 집 한켠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얻게 된 로제타는 담요를 덮고 누워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일자릴 구했어. 난 일자릴 구했어. 넌 친구가 생겼어. 난 친구가 생겼어. 넌 정상적인 삶을 산다. 난 정상적인 삶을 산다. 넌 시궁창을 벗어난다. 난 시궁창을 벗어난다. 잘 자. 잘 자.”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되는 로제타. 밀가루 포대를 껴안고 일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녀는 이제 다시 시궁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부터 다르덴 형제 특유의 윤리적 시련의 드라마로 치닫는다. 로제타가 빠뜨린 낚시 도구를 건져주려던 리케가 물에 빠져 진흙바닥에서 허우적댄다. 로제타는 그 순간 철조망 너머 숲속으로 뛰어간다. 도와달라는 리케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숨가쁘게 들려온다. 30초쯤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나뭇가지를 꺾어들고 리케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며칠 뒤, 로제타는 몰래 자신이 만든 와플을 팔던 리케의 비리를 사장에게 알리고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왜 그랬냐고 따지는 리케에게 그녀는 절규한다. “날 때려. 일자리를 구하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마음의 지옥에서 맴돌고 있던 말을 토해낸다. “네가 물에 빠졌을 때 꺼내주고 싶지 않았어.”

그랜드캐니언이라는 아름다운 주소에서 사는 소녀.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저편 숲속의 낡은 트레일러가 술을 얻기 위해서라면 몸까지 파는 엄마와 함께 그녀가 사는 거처다. 구두를 벗고 장화로 갈아 신어야만 갈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벗어나 도시 이쪽의 주소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외면할 수 있는 걸까. 소녀 로제타가 던지는 질문은 절박하고 처절하다. 그리고 단순하다. 그러나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트레일러로 돌아온 로제타는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건다. “더이상 일하러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관리사무소로 가서 취사용 가스통을 교환해 온다. 가스통은 로제타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인다. 리케가 스쿠터를 타고 다가오고 그녀는 리케에게 돌을 던지며 운다. 가스통 위에 쓰러져 우는 로제타를 리케가 일으킨다. 로제타는 흐느끼며 리케를 본다. 로제타의 견딜 수 없는 시선, 영화는 여기에서 갑자기 끝난다.

후기자본주의 세계의 실업과 가난의 현실과 도스또옙스끼적 윤리의 곤경이 하나의 예술적 질문으로 선명하다. 얼핏 콜럼버스의 달걀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왜 지금 이곳에선 로제타의 이야기를 만나기 힘든지 부끄러움 속에서 자문해본다. 혹, 다들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06.12.19 ⓒ 정홍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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