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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영어강의를 향한 쓴소리

김명환

김명환  | 서울대 교수

지난달 미국 댈러스에서 이민생활을 하던 한국인 부부가 폭우와 엉터리 표지판 때문에 차가 강에 빠져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일부 국내 언론은 정확한 취재도 없이 이 사건을 희생자들의 영어가 서툴러 구조요청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보도하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유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오보는 한국사회가 영어에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지난 4월 인터넷 상의 ‘토플대란’은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한 영어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응시자의 80%가 유학 준비생이 아니라 특목고 진학이나 대학입학시의 혜택을 겨냥한 초중고생이며 수험료가 연 16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조기 영어교육과 해외어학연수,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는 어느덧 한국사회의 낯익은 풍속도로 자리잡았고,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3학년 아닌 1학년부터 실시하는 방안이 나오기도 한다. OECD 국가 중 GDP 대비 사교육비 지출이 최고이며 초중등학교까지 포함할 경우 미국 유학생 수가 인도나 중국을 앞질러 당당히 1위인 대한민국의 사교육 영어시장이 얼마나 큰 규모일지는 가히 짐작할만하다.  

영어광풍 부추기는 대학 영어강의의 실상

그야말로 영어광풍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그런데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이런 흐름을 바로잡기는커녕 부추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갓 대학에 자리잡은 한 신임교수는 학기당 한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계약서 상의 의무 조항을 어겼다가 낭패를 겪었다. 그는 첫 학기 담당과목을 모두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경고를 받았고 다음 학기에 두 과목을 영어로 진행해야 했는데, 그가 유학한 나라는 불행하게도 영국이 아니었다. 선생의 영어능력이 모자란 상황에서 수업진행이 원활할 리 만무하고, 학생들도 영어로 하는 철학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이 어이없는 사례에서 보듯이 요즘 우리 대학의 영어강의 관련 정책이 과연 고등교육기관에 걸맞은 철학 위에 서 있는지 의문스럽다. 한 명문 사립대는 몇년 전에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신임교수가 모든 과목을 영어, 혹은 해당 원어로 강의하도록 강제했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전체 개설과목의 60%를 영어강의로 바꾸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대학 외에도 신임교수에게 영어강의를 의무로 부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기존 교수에게도 영어강의를 의무화하여 영어강의 100%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미국 유학 출신 교수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우리 학문의 편향성은 심화되게 마련이다.

학문의 대미편향과 영어학습에 매몰되는 대학교육

물론 영어강의를 확충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현대 세계에서 아직도 달러가 기축통화이듯이 오늘의 국제어는 영어임에 틀림없고, 수준높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인력에 대한 수요는 매우 크다. 이를 위해 영어강의의 양적, 질적 발전은 긴요하며, 실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교양영어’는 상당수 대학에서 영어강의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우려할 만하다. 영어강의가 투자 없이 무원칙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대학생들에게 사교육으로 영어 실력을 늘리라고 압력을 가하는 꼴이다. 그 결과 영미에서 살아봤거나 특목고나 철저한 사교육 덕분에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춘 경우가 아닌 학생은 학원, 해외어학연수 등을 이용해 영어능력―주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학생활과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어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준높은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일에서 성취될 대학교육의 본모습은 그만 실종되고 만다.

영어 공용화론의 맹목과 허구성

경쟁지상주의 담론의 핵심에 자리잡은 영어능력에 대한 강조는 어느새 질적 변화를 일으켜 아예 지적 활동과 사회생활의 수단을 우리말에서 영어로 바꾸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은 그것을 상징하는 담론이다. 그는 한국의 고등교육 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하며 남들이 생산한 지식을 소비만 한다는 어느 미국 학자의 발언을 논거로 들면서, 영어공용화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한다.(《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삼성경제연구소 2003, 46면) 그러나 한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은 결코 아닐뿐더러, 한국 대학의 질적 도약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영어공용화 하나로 달성 가능한 양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진지하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우리는 외국어를 공용어(公用語)로 강요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해방 후 3년간 미군정의 공용어는 영어였고, 일제강점기도 처음부터 일본어가 공용어였으며 나중에는 일상생활에서마저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소설가 김동인이 외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조선인은 적어도 중등학교 이상 학력이고 일본어를 잘 하는 그들은 외국문물을 우수한 일본어 번역으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우리말 번역을 하려는 노력은 무익하다고 쓴 데에서 그 시절의 실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번역문학〉, 《매일신보》 1935년 8월 31일)

식민지시대의 조선어말살정책과 오늘의 영어 광풍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만, 언어의 선택이 인간 생활 전반과 직결된 총체적인 사안이라는 상식을 환기시켜 준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것이지만, 한국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는 것은 우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어 공용화는 강남의 중상류층이 상징하는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전국민에게 주어져야 현실적 가능성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이는 자유주의자 복거일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무계급사회의 지상낙원을 당장 건설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흡사하다. 이 점을 의식한 탓인지 복거일은 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면 오히려 많은 국민들을 영어의 혜택에서 소외시키는 계급적 자세가 된다는 묘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어쨌든 요즘 일부 상위권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그의 입론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셈이라는 점에서 착잡하기 짝이 없다. 

세계화에 대응하는 문화주체성 세워야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는 명확한 목표 설정과 그것을 위한 조건을 제대로 갖춰가며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대학에서 꼭 거쳐야 할 지적 훈련을 제한된 영어구사력 향상을 위해 속절없이 희생할 위험이 크다. 영어강의 도입의 당위성이 큰 영어영문학과에서도 영어강의로만 수업을 편성하면 많은 문제가 따를진대, 학생의 전반적 수준이나 학생간의 편차, 전공 분야의 특수성을 막론하고 영어강의만이 살길인양 밀어붙이는 일만큼은 재고되어야 한다. 충분한 준비와 투자가 없이 영어로 수업을 한다면, 학생들은 영어도 늘지 않고 수업 내용도 못 따라가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외국어독해력 향상은 수업이 우리말로 진행될 때 종종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될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쉽게 납득이 간다.

영어의 문제는 단순히 외국어 습득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이냐는 전망과 연결된 심각한 사회적 쟁점이다. 명심할 일은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대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도 우리 나름의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면서 우리 역사에 뿌리박은 학문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비이성적 영어열풍은 어떤 성격의 세계화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회적 갈등만을 심화시킬 것이다. 세계화와 공동체의 주체성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이 글의 일부는 필자가 《안과밖: 영미문학연구》(2007년 상반기, 창비)에 게재한 시평 〈대학의 영어강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내용을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 필자.

2007.7.10 ⓒ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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