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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트 듀보이스 『아이티혁명사』

백영경

우리는 모두 ‘흑인’이다

– 로런트 듀보이스 『아이티혁명사: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 삼천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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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아이띠

 

아이띠(Haiti)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먼 나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바로 바다를 건너 이웃한 꾸바와 비교해도 아이띠는 낯선 나라이며, 고작해야 기아와 질병, 지진 참사를 통해 구호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향한 원정에서 잠시 들렀던 히스빠니올라 섬이라고 하면 차라리 들어봤다 싶을 수도 있을 터이나, 아이띠혁명은 역시 생소하다. 아이띠혁명을 아는 소수의 사람이라고 해도 프랑스 본국에서 혁명이 한창이던 1791년 까리브 해의 어느 식민지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봉기는 아슴푸레한 사건이기 쉽다. 모든 프랑스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선언을 이루어낸 것 역시 아이띠혁명의 성과로서보다는 프랑스혁명의 성과로서 인식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모두 아이띠혁명의 후예들이다

 

그러한 사정은 지리적으로는 아이띠와 멀다 할 수 없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그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학계에서조차 아이띠혁명은 그간 그 의의에 합당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아이티혁명사: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박윤덕 옮김)의 저자 로런트 듀보이스(Laurent Dubois)는 말한다.

 

아이티혁명의 충격은 엄청났다. 역사상 성공한 흑인 혁명의 유일한 사례로서, 아이티혁명은 18~19세기의 정치적·철학적·문화적 흐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이티혁명은 온갖 피부색을 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시민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영원토록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폐지의 핵심적 부분이었고, 따라서 인권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초를 닦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24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라는 것이 듀보이스의 주장이다.

 

사실 이 책이 아이띠혁명에 관해 한국어로 소개되는 첫 주요 저작은 아니다. 범아프리카운동을 주도한 C. L. R. 제임스가 아이띠혁명의 주역 뚜쌩 루베르뛰르(Toussaint Louverture)에 대해 1930년대 시점에서 기술한 『블랙 자코뱅』(한국어판 필맥 2007) 역시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들의 혁명이자, 1804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수립된 사건으로서의 아이띠혁명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블랙 자코뱅』과 듀보이스 저작의 차이는 전자가 혁명을 상당히 낭만화하고 당시 자본주의적 축적의 근간을 이루던 노예제도에 균열을 가져온 저항으로서 영웅적으로 그리는 데 비해, 후자는 아이띠혁명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 성격과 여러가지 딜레마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듀보이스에 따르면, 아이띠혁명은 이후 전세계 흑인들의 투쟁에 희망과 영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흑인이라는 게 누구인가도, 혁명 이후의 삶도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띠가 겪은 운명은 이후 탈식민시대의 식민지들이 겪게 될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세계의 복수자들

 

다소 밋밋한 번역서의 제목과는 비교되게 원제는 ‘신세계의 어벤져스’(Avengers of the New World), 즉 ‘복수하는 사람’이다. 듀보이스는 이런 복수를 낳게 한 것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사건이 아님을 강조한다. 혁명 이전 아이띠의 프랑스식 지명인 쌩도맹그(Saint-Domingue)를 비롯한 까리브 해의 식민지들은 담배와 인디고, 커피와 설탕의 생산지로서 거대한 부의 원천이자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술과 도박을 할 수 있는 까바레와 함께 마리 앙뚜아네뜨와 루이 16세가 등장하는 밀랍박물관을 갖출 정도의 문화적 활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식민지는 혁명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원한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떼죽음 당한 원주민들에게도, 그리고 처형과 과로, 고통으로 또는 매우 드물게 나이가 들어 죽은 노예들에게도 식민지는 묘지였다.(31면)

 

노예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죽은 이의 시신을 묻었다. 그래서 한때 노예였던 자들의 시신은 한때 자유민이었던 자들의 시신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 때로는 자연의 힘도 죽은 자들을 한 곳으로 인도했다. 강력한 폭풍우가 몰아친 1787년에는 홍수가 나서 (…) 작은 공동묘지의 무덤들까지 파헤쳐 놓아 시신들이 바다로 떠내려갔다. 어쩌면 그 바다는 대서양 횡단에서 살아남지 못한 아프리카인들에게 거대한 묘지였는지도 모른다.(32~33면)

 

본국과 다른 상황을 감안하지 않는 빠리의 권력자들에 대해서 쌩도맹그의 노예주들은 자율권을 원했고, 부를 가진 유색자유인들은 시민권을 갈구하였으며, 노예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아이띠혁명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적어도 제국의 권력에 대한 도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의 일소, 그리고 노예제의 종식이라는 세가지 차원이 혼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수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적대와 연합은 단지 인종적인 구분선을 따라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쌩도맹그에서 일어난 반란을 그저 백인에 대한 폭력적 보복이라거나 무질서로 보고자 하는 시각도 있지만, 듀보이스는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프랑스혁명의 기초를 닦는 데 한몫했고 마침내는 혁명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프랑스혁명을 능가”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목표는 프랑스혁명이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논리적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것이었으며, 그래서 이들이 1793년 당시 프랑스와 동일한 삼색기를 사용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아이띠인들은 ‘흑인’이다

 

그러나 혁명을 무산시키기 위해, 또 인종적인 편견에 기반을 두고 유색인들에게 가해졌던 무차별적인 폭력은 점차 백인들을 새로운 공화국에서 배제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결국 1803년 만들어진 새로운 깃발에서 흰색은 자리를 잃고 적색과 청색, 두가지 색의 깃발이 아이띠의 상징이 된 것이다. 1805년 헌법은 이제 모든 아이띠인들이 ‘흑인’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선포하였으며, 다만 프랑스와 노예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종의 일원으로 환대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여 그들의 흑인 개념이 단지 피부색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아이띠의 빈곤과 참상을 낳은 것은 혁명이었다. 전쟁 과정 자체가 섬을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고, 10만 이상의 주민들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대서양 연안에서 아이띠의 혁명이 노예들의 희망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 만큼 아이띠를 뒤흔들려는 열강들의 탄압도 그치지 않았고, 미국의 침공을 겪기도 하였다. 프랑스가 마침내 아이띠를 인정했지만, 그 댓가로 요구한 배상금은 아이띠를 빈곤과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점에서 아이띠의 역사는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독립 후에 겪고 있는 저발전과 종속의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모두 ‘흑인’이다

 

아이띠의 역사를 통해서 깨닫는 중요한 사실은 결국 지금 눈에 보는 현실을 만들어온 힘들에 대해서 끝없이 뒤집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피부색을 경계로 한 갈등이 아무리 심각하고, 피부색에 따른 차이가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이 인종적 구분선은 역사의 산물이지 그 원인은 아니다. 백인과 흑인, 뮬라또로 인종구성이 복잡하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사회적 갈등이 심한 현실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현재 아이띠의 빈곤한 현실을 두고 인종 탓을 하거나 특정 종교에 원인을 돌릴 수는 없다. 200년 정도의 역사여행만으로도 지금 그 아이띠가 바로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을 가장 철저하게 믿고 실행하고자 하였으며, 보편적인 인권의 개념을 선취하고자 했음을, 비록 이루지는 못했으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을 공유하는 한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띠혁명의 후예일 수 있을 것이며, 이 책은 우리 역시 ‘흑인’이 되자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문화인류학

2014.8.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