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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스크러튼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유희석

한국의 ’합리적 보수’는 어디에?
―로저 스크러튼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더퀘스트 2016

 

 

kuykty경험적 보수주의에서 배운다 

 

‘경험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라는 경구가 있지만 정작 기억할 점은 실수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약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 1944~ )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약으로 돌린 지식인인지는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그의 지적 관심이 ‘아우슈비츠’로 표상되는 이성의 광기에 대한 비판적 해체보다 서구문명의 보존‧계승으로 확실하게 기운 데는 그 자신의 경험/실수가 크게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68혁명세대로서 빠리의 학생 소요사태를 몸소 체험하고 동구권 공산주의의 관료적 폐해를 목격한 스크러튼이 역설하는 서구의 성취 내지 가치는 이제는 상식으로 통용된다. 그것은 “각자가 뜻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기회, 사람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정한 법의 확실성, 특정 이해당사자들이 멋대로 점유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공유재산으로서의 환경의 보호, 대/학교를 형성해온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문화, 대표자를 선출하고 법을 통과시키는 민주적 절차”(6면, 번역은 필자의 것임) 등이다. 하기는, 우리가 엄동설한에도 ‘촛불’을 계속 들고 있는 것 역시 그런 상식들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해서가 아닌가. 

 

총 13장으로 구성된 이 저작에서―원제는 How to be a Conservative이다―보수주의는 국가와 가정에 대한 사랑(=충성), 문화적 유산/전통과 가치의 보존‧계승, 시민적 결사 및 종교의 자유 등과 밀접하게 결부된 세계관이다. 기독교에 근거한 서양문명의 성과를 거의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그의 논조가 불편할 수는 있지만 “과거를 지키면서 현대적이어야 하고, 전통을 지키면서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16면)에 토를 달기는 어렵다. 그가 에드먼드 버크를 따라 사회를 “망자들과 현재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제휴 관계”(40면)로 인식하고 그런 관계를 상생의 차원에서 발전시켜야 하는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과 사명을 다각도로 역설하는 대목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를 비롯한 온갖 전지구적 병폐들이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에 대한 책무를 방기함으로써 발생한 것임을 절박하게 직시하고 행동하는 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문제는, 실제로 어떤 정책이 실행될 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으레 다툼이 일어나고 그런 다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수든 진보든 핵심은 역시 정책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실력이고, 그 점은 요동치는 현 정국에서 우리도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편’을 자임하는 스크러튼이 세계현실을 통찰하는 안목은, 대안까지는 몰라도, 구체적이고 날카롭다. 이슬람세계의 종교적 일방주의/근본주의와, 바람직한 공동체의 비전이 결여된 다문화주의의 실상, 평등주의로 황폐화된 공교육의 실태 등을 꼬집을 때 그렇다. 기업결사가 시민결사를 압도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약점들에 대한 비판은 좌우를 떠나서 새겨들을 바 있고, 브렉시트(2016.6.23)에 관해서도 이 사태가 단순히 영국의 파당적 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대중의 오판이 초래한 헛소동만이 아니고 저마다 고유한 사정이 있는 유럽 각국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려는 유럽연합의 구조적인 권력이 작용한 결과임을 미루어 짐작게 한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보수주의의 얼굴

 

이 저작에서 특히 논쟁적인 부분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의 뇌관이랄 수 있는 난민과 망명에 관한 논의다. 수호해야 할 핵심 가치로 빗장을 건 조국과 가정,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개방성 및 관용의 정신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과연 어떤 현실적 대안을 담보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령 스크러튼은 유럽연합의 뿌리를 뒤흔드는 작금의 난민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함을 지적하면서―“거부된 난민도 없고 망명 신청자도 거의 없던 시기”(191면)인―1951년에 비준된 제네바협약을 문제삼는다. 그같은 제도적 장치도 현재 유럽연합의 상황에 맞게 손보지 않고서는 난민에 대한 해법을 찾기 어려우리라는 진단이다. 대안을 모색하는 보수주의자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영토와 국경이 보증하는 국가의 주권에 대한―세계화의 흐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그의 단호하고도 배타적인 입장에는 물음표가 달린다. 국제연합(UN)의 상당수 회원국들이 자국민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주권국가의 요건에 미달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신랄하게 적시하는 문장도 그러하다. 그같은 요건은

그간 인접국들에 매우 심각한 위협을 가해온 북한 같은 나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는 사실 주권체가 아니라 악당들이 장악한 징집군대다. 권력은 법은커녕 대의정부에 의해서도 행사되지 않는바, 그것은 보스정치와 혈통이 보완하는 일당독재 기구로써 강제된다.(187면)

북이 이렇다면 ‘그게 나라냐’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작년 10월말부터 ‘이게 나라냐’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외치고, 또 들어온 우리 처지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남과 북이 도긴개긴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을 향한 ‘평등한 푸념’보다는 도대체 어찌하여 한반도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를 냉철하게 성찰하는 자세일 것이다. 스크러튼에게 결여된 것도 그 점인 듯하다. 북한이 어떻게 “징집군대가 아니라 미치광이 가족이 장악한 포로수용소”(각주63) 같은 국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사실 전무한 정도가 아니다. ‘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협력”을 “북한 주민들이 아무런 희망 없이 지내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책략쯤으로 해석하고 그런 협력을 “독재정권에게 주는 또 하나 의 선물”로 단정하면서, 북한 주민이 겪고 있는 궁핍을 “그들이(북한 주민들이―인용자) 압제자들에게 맞설 힘뿐만이 아니라 상호신뢰가 없는” 반증으로 단죄하는 선까지 나아간다.(187~89면) 합리적 보수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인 조심성과 사려깊음은 어디로 갔는가. 문제는 북의 왕조적 세습체제요 기득권층이지 설마 북의 문제로 머리를 맞댄 국제사회의 협력이나 굶주린 북한 인민들이겠는가. 우리와 직결되는 사안 하나만 거론했지만 이 저작을 통독하며 저자 역시 자신의 ‘실수’에서 충분히 약을 구하지는 못한 지식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 

 

망가진 보수주의를 수리하려면

 

그런 의심의 근거들을 세세하게 추적할 여유는 없다. 다만, 원제인 ‘보수주의자가 되는 법’을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로 옮기고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라는 부제까지 추가한 한국어판의―한국의 현재 정치 국면을 염두에 둔 듯한―의중에 대해 몇마디 덧붙인다. 

 

“망자들과 현재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제휴 관계”로 인간사회를 인식하는 이들을 진보와 보수로 편 가르는 짓은 부질없다. 보수와 진보는 역사적 현실에서 얼마든지 의미가 바뀔 수 있는 상대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써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 좌우로 포진한 진보와 보수의 존재는 물론이고 구분 자체도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분단체제 특유의 제약조건들이 엄존함을 고려한다면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차이와 공통점은 더 엄밀히 사유해야 할 사상사적 논제가 된다. 단적으로 헌법 제1장 제3조, 즉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는―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가정(假定)이었을 뿐인―문장을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받아들였나. 해석의 차이에서 생산적인 공론의 장을 만들기는커녕 제각각, 때로는 터무니없이, 오독해오지 않았나. 우리 헌법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일 듯한 이 조항을 진보와 보수 중 누가 더 오독했는가는 앞으로도 토론이 요구되는 쟁점일 것이다. 다만, 진보도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약시에다가 난독증 증세까지 겹쳐서, 금강산 관광 중단에 이어 개성공단 폐쇄라는 자해행위조차 서슴지 않은 장본인이 바로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득세한 보수진영이라는 사실만은 짚어두어야겠다. 

 

목하 ‘촛불정국’에서 문해 능력이 뛰어난 합리적 보수의 존재가 더없이 절실한 것은, 이들이 가세하지 않는 한 한국현대사에서 거의 줄곧 승자로 군림해온 보수주의의 왜곡과 타락상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스크러튼의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일독에 값한다. 물론 통독하면서 발견의 기쁨보다는 ‘합리적 보수는 과연 어디에?’라는 의문이 앞서기는 했다. 하지만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요건들을 탐구하는 이 저작에서 되새겨볼 바는 적지 않다. 스크러튼이 영국을 포함한 영어권 국가들의 시민을 주된 독자층으로 상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새’도 그중 하나다. 분단체제의 현실을 직시하여 그에 합당한 정치적 대응전략을 강구하지 못하는 한 진보세력의 건강한 성장은 물론이고, 민망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한국의 보수들을 수리할 합리적 보수의 등장도 가망없는 일이라는 진실 말이다.

 

유희석 /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문학평론가

2017.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