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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선우은실

나는 불쌍하지 않다: 타인의 실존으로 가능한 개인의 실존에 대하여
―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꾸리에 2016

 

 

rtjjtrtj요즘의 연민

 

많은 사람들에게 ‘나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 나쁜 상황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얼마간 외면하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건이 결국 자신의 일은 아니라서, 타인을 동정하는 일로 일정한 견해를 대신하려고 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특정 사안에 대해 타인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행위로 자신의 일정한 견해를 대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은 어째서 타인을 연민하는가? 또 누군가를 동정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대하여 타당성을 얻는 일이 가능한가?

 

세월호사건과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건을 거치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헬조선’을 절감하게 된 시점에서 ‘연민’이 흔해졌다는 것은 주목해볼 만한 일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피해자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남발했으며 동정은 면죄부라도 되는 듯이 팔려나갔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사건의 피해자 및 유가족에게, SNS에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성폭력을 고발하는 피해자에게 서슴없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불쌍한가. 어떤 ‘동정’은 타인을 ‘타자’로 고립시키며, 타인이 그 존재를 주체적으로 실존할 수 있게 하는 ‘자유’를 침해한다. 예컨대 세월호사건 희생자 및 유가족에게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안하고자 하는 대상은 실은 화자 그 자신은 아닌가?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 타인을 연민의 대상으로, 가여움의 자리에 강제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이후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성폭력 사건 자체만 놓고 피해자가 ‘불쌍하다’고 말하는 건 ‘쉬운’ 반응이다. 쉬운 ‘연민’은 피해자를 약자의 자리에 고착시킬 혐의가 있다.

 

세월호사건에 대한 ‘쉬운 동정’ 내지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자유 침탈의 모습, 인간으로서의 여성 존재의 자유 침해에 관한 고찰 등의 측면을 바라봄에 있어서 ‘인간 존재’와 ‘자유’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논점을 두 키워드로 압축시켜 볼 때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모든 사람은 혼자다』(박정자 옮김)가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성찰은 현재의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처지를 살피기에 유익하다. 이 에세이는 개개인의 존재가 위협받고 또 점차 불투명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인간적 격려이자 고찰의 장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헌신의 함정

 

개인은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늠하고 판단하여 마침내 불행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만큼의 자유를 가지지 않는다. 실존의 필수적 조건인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온다. 나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하므로 타인이 원하지 않는 ‘연민’을 제공하는 것은 결코 그를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연민’이란 결국 연민의 대상을 위해 수행된다기보다도 그것을 행하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 엄밀히 말해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을 증명하고 위안 받으며 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행해지곤 한다. 이런 ‘연민’은 다른 주체가 ‘불쌍함’의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 자리에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 주체의 의미를 손상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민’은 한 주체를 실존하게 하는 자유를 훼손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는 보부아르가 말하는 ‘헌신’의 함정과 흡사하다.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압제(壓制)”(97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타인이 원하지 않은 ‘헌신’을 제공한다. 그것이 자기의 기획이었음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헌신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가령 우리는 세월호사건이 주는 슬픔을 통과하며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헌신’은 스스로에게 댓가를 주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그러나 ‘헌신’의 대상이었던 유가족들은 우리에게 동정과 연민을 부탁한 적이 없다.

 

한편 이런 식의 ‘헌신’도 있을 수 있다. 세월호사건을 이렇게 애도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있으니 다른 일에 조금 무감해도 괜찮다는 보상으로서 연민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 문제, 여성 문제, 세월호사건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처사와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이는 결국 ‘인간 문제’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가 ‘세월호사건’을 경유해서 표출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위안삼아 다른 ‘인간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 또한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타인의 존재 자유를 희생하는 것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타인을 위한 슬픔은 진정 있을 수 있는가? 슬픔은 오롯이 개인을 위한 슬픔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기적 ‘헌신’과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일 뿐이다. 이때의 ‘슬픔’은 보부아르가 저작을 통해 말하는 실존주의적 윤리와 긴밀하다. 슬픔은 개인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고, 오로지 개인적일 때에만 진정으로 슬픔일 수 있다. 타인의 슬픔이 나의 그것과 다름없음을 아는 개인주의는 실존주의에 가깝다.

 

나와 타인의 실존을 위하여

 

보부아르에 의하면 내가 당신을 이토록 가엾게 여기고 있다는 연민 혹은 헌신은 타인을 향한 기획일 수 없다. 타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타인은 나의 기획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타인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타인이 한 주체의 기획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곧 인간 존재는 일정한 ‘관계’ 안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과 일정한 ‘관계’를 갖는 개인을 의미있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 맺은 타인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라도 다른 존재와 일정한 ‘관계 맺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삶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의 자유를 인정해야만 내 삶의 자유 또한 보장될 수 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에 의해 증명되고 나의 자유 또한 타인의 자유를 증명한다. 서로는 서로의 실존을 위한 상보적이고 필수적인 관계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의 선명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끝없이 선택하며 자신을 내던진다. 이 과정에는 오롯이 자신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있음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진다. 곧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연대’의 가능성을 품는다. 개인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비례하여 그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불안 또한 선명해지므로 더욱 ‘관계’ 맺음을 포기할 수 없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각 개인의 실존을 지향하면 된다. 페미니즘을, 휴머니즘을, 그리고 개인주의를 지향하면 된다. 그러한 개인의 의지가 모여 살아지는 것, 그것이 실존이다. 

 

선우은실 / 문학평론가

2017.1.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