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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읽을까

안선재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5.15 ⓒ 안선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