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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박소란

용목 선배께
―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를 읽고

 

 

누군가가 100죄송해요, 선배. 어려운 숙제를 피하려 일부러 꾀를 내어 이런 편지를 씁니다. 

사실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우리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지요. 한 대여섯번쯤 될까요. 출판사 송년회 같은 왁자한 술자리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눈 것을 포함해 우리가 만난 것은 고작 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 정식으로 마주 앉아 어떤 대화를 나눈 것은 단 한 차례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대체로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채워졌던 일. ‘tattoo’라는 부제를 단 시 「나비」에도 등장하는, 선배의 “왼쪽 어깻죽지”에 새겨진 “가을 새벽에 산을 오르는 호랑이”를 함께 구경하며 웃었던 기억 정도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용목,이라는 단정한 이름과는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크고 화려한 문신을 선배는 뒷몸 가득 지니고 계셨지요. 몇해 전 먼 이국에서 새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어떤 일이 선배로 하여금 그런 것을 몸에 새기게 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차마 자세히 캐묻지는 못했지만, 혹 캐물었다 하여도 예의 농담으로써 얼렁뚱땅 답을 미루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 시집을 받아든 것은 지난여름의 일입니다. 그저 그뿐인 우리 사이에도 어떤 우정이 있을 수 있다는 듯, 살뜰히 서명한 시집을 보내주셨더군요. 감사했습니다. 역시나 묵직하고 단단한 시집이었어요. 어떤 책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 든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실은 훨씬 전부터 저는 이 시집을 읽고 있었지요. 책이 되어 나오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 계절의 신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예지 좌담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일찍이 인쇄용 PDF 파일을 받아 읽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복사집에 가서 직접 프린트를 한 다음 한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구겨진 A4 뭉치였을 뿐인데, 저는 그것의 알 수 없는 무게감에 압도되었습니다. 네,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를 아는 누가 봐도 ‘잘 쓴 시’들이었으니까요.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러 쓴 시들이었으니까요. 더욱이 이 시집은 ‘슬픔의 책’이 아닌가요. 시집 곳곳의 슬픔들은 하나의 강력한 힘처럼 느껴졌습니다. 선배를 추동하는 힘 말이지요. 선배는 어느 순간 그런 슬픔에게로 이끌리듯 가서는 최선으로 그것을 껴안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슬픔에의 열망이 시를, 시인을 모조리 집어삼킨 것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시인의 강고한 노력으로 하여 더없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채색되어 있었지요. 슬픔을 그린 방식에 대해, 앞선 좌담 자리에서 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화법(畫法)을 빌려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다빈치가 ‘모나리자’ 등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스푸마또’(sfumato) 기법 말입니다. 대상을 펜으로 스케치하는 대신 붓으로 여러번 덧칠함으로써 작품의 신비감과 생동감을 극대화하는 방식. 선배는 이 시집에서 시의 구조나 표현을 ‘덧칠’하듯 치밀하게 잇고 또 엮어내었는데, 슬픔을 에두르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의 손쉬운 흐름을 경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지요. 밤, 눈(눈사람), 비, 새, 가을, 낙엽(단풍), 창 같은 전통적 서정의 결을 고스란히 지닌,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익숙하다 싶은 시어들조차도 시적 신비를 잃지 않는 모습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시인이 활자를 상대로 펼치는 ‘아름다움에의 고투’처럼 여겨졌습니다. 시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알알이 맺힌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채로, 강하게 이끌렸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어쩌면 이처럼 아름답게 살려내었나 하는 감탄. 때때로 이미지가 시를 견인한다 싶을 만큼 강렬한 비유적 이미지들이 잇따라 등장하는데, 개중에는 자칫 과도하다 싶을 만한 구문이 전혀 없지 않았음에도, 그 모두가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깊은 사유를 담보로 한 것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시집을 아껴 읽는 이유, 그러니까 지금 이 편지를 쓰게 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뭐랄까요, 시집을 읽는 내내 전에 없던 한 사람의 선명한 얼굴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지금의 이 삶을, 살아 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기어이 삶 저편의 무엇이 되고 말겠다는 듯 한껏 뭉그러진 혹은 깨어진 사람의 얼굴 말입니다. 그의 가슴을 열면 다름 아닌 죽음이, 선득한 빛의 무덤들이 가득했지요. “일상이라는 죽음”(「나는 알고 있거든」)을 살아가는 한 사람은 그저 매 순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하얗게 사라지고 싶”(「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다고, “살아 있는 느낌,/그것이 너무 싫다고”(「호수공원」)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샌가 저는 이런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고 있더군요. “더 어두운 색, 더 어두운 색……” “그는 단지 더 어두운 색이 필요했다”(「더 어두운 색」)나 “차갑고 어두운 곳을 생각하면 차갑고 어두운 곳이 생기겠지,”(「차갑고 어두운」) 같은 문장들. 「공동체」라는 시의 몇몇 부분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다음 틈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어떤 죽음이 행여 지워지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다 결국 “죽음의 수집가”가 되어버린 마음. 죽은 자의 빈자리로 가 기꺼이 그가 되어 누우려는 마음. 그것은 기어코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내가 돌아보”도록, 또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나는 돌아보”(「모래시계」)도록 만들었지요. 대체 이토록 도저한 죽음은 애초에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2008년 7월 11일 대학병원”(「게으른 시체」)에서 만난 ‘아버지의 시체’의 것일 수도, “바다라고 불리는 익사자들의 거대한 무덤”(「얼음은 깨지면서 녹는다」) 혹은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공터에서 먼 창)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하나의 시체에 꼭 하나의 죽음만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그해 안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의 죽음이 곧 도처의 죽음이 된다는 것을 누군가의 죽음을 한번이라도 목도한 이라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삶의 매 순간, 매 공간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 모든 게 시체”라는 섬뜩한 사실을. 그런 속에서 기꺼이 ‘죽음의 수집가’가 된 이는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은 자의 “육체가 되어 있”(「 게으른 시체」)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감정에 대해서라면 저도 조금은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의 삶을 얻었다는 생각. 그런 괴상한 자책 속에, 도무지 살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낸 적이 저도 있지요. 살아도 살고 있는 줄을 몰랐던 그때, 그럼에도 저는 온전히 살았습니다. 어쩌면 제법 잘 살기까지 했습니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 마음 같은 것으로. “미안하다, 나는 밥을 먹는다”(「그리고 날들」) 중얼거리며. 죽음 뒤에 살아가는 일,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입으로 집어넣어 씹고 삼키는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 언젠가는 죽은 자의 이름과 생일로 문신을 하리라 결심했었습니다. 선배 식으로 풀자면 “죽음이 붙어 있”는(「나비」) 호랑이 가죽 같은 것. 또 이따금은 죽은 이가 나타나는 꿈을 꾸며 울었지요. 결국에는 “모래로 부서지”(「모래시계」)고 마는 꿈. “실패한 꿈”(「진흙 반죽 속에서 조금씩 내가 되어 걸어 나오는 진흙 인간처럼」)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시집을 읽으며 선배와 제가, 우리가 어쩌면 비슷한 경험과 느낌을 통과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감히 했습니다. “죽음이 분명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이곳으로부터” 쉽사리 “돌아가지 못할”(「게으른 시체」) 사람 말입니다. 끊임없이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후라시」) 물어야 하는 형벌에 처해진 사람. 혹자는 이를 두고 죄책감이나 윤리, 심리적 결벽 같은 번듯한 용어를 들어 숭고하다 찬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다 영민하게는 시대적 징후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요. 어느 것도 틀리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선배로서는 그리 기껍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는 다만 버티기 위해, “일상이라는 죽음”을 견디기 위해 쓰셨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쓰는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마음을 다해 숱한 문장을 쓰고 또 써도 결코 그 마음을 닮은 하나의 문장조차 제대로 완성해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는 일. 그런 절망의 순간만이 선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이 집에서 사십년째 잠들고 있지만,//나의 시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스위치」)은 것. 아직, 아직은……. 이 진행형의 감정만이 과장 없는 진실일 것입니다.

 

한권의 시집에 대해 어쩌면 너무 주변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시를 너무 감정적으로 읽었다, 또 멋대로 해석했다 탓하실 것 같아 다시금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그렇지만 너무 깊이 자책하진 않겠습니다. 이는 그저 한통의 편지일 뿐이니까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인가? 저는 더듬거리며 답을 미루었지요.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시가, 좋은 시인이 너무 많다고. 그래서 그중 어떤 것이 가장 좋은 시다 골라 이야기할 수는 도무지 없겠다고. 다만 여태 내가 서랍 깊숙한 곳에 두고 오래도록 아껴 읽어온 시는 이런 시가 아닐까. ‘지금 이 시는 내 마음을 알고 있구나, 내 결핍을, 결락을 알고 있구나’ 느껴지는 시. 그런 시 앞에서는 해제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어쩌면 선배는 누군가에게 이미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기회가 된다면, 이 한마디만은 조심스레 전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선배와 선배의 슬픔을 얻어먹고 한층 넉넉해진 저는, 저와 같은 독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우리”(「우리라서」)이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슬픔의 적자(嫡子)인 선배가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최선으로 아플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박소란 / 시인

2018.1.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