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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의 고기나 뇌 이상의 무엇이라면

안희연
안희연

안희연

지난주 어느 회의 자리에서의 일이다. 스마트폰이 몸의 일부처럼 여겨지고 웹상의 정보로 사유의 회로가 형성되곤 하는 요즘의 분위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뇌과학’이라는 테마가 잠시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조금 장난스럽게 과학에 대한 불신이랄까, 일종의 거부반응을 잠시 내비쳤는데 내용인즉 이러하다. 나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랑하고 모든 사물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과 우주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과학은 인간의 행위를 뇌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일축하지 않느냐, 나는 인간의 삶이 좀더 신비로운 것이라고 믿고 싶다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철학자라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나는 뇌가 아니다』(열린책들 2018)의 출간 소식을 전하며 즐거운 독서를 기대하는 것으로 회의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잠시 반성을 했다. 어쩌면 내가 삶을 너무 ‘신비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어졌는데, 그건 내가 철학이나 문학의 대척점에 과학을 놓아두고, 근거 없이 미워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회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친구는 『위대한 설계』(까치글방 2010)의 역자 후기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면서 “희연의 과학에 대한 인상을 어느 정도 바꿔줄 수 있는 역자 후기가 아니냐”라는 말을 건넸다. 이 책에서 스티븐 호킹은 과학에서 흔히 제기되는 ‘어떻게’가 아니라 더 깊은 수준의 ‘왜’라는 질문을 건네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책은 웬만한 철학서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것 등의 문장들은 과학에 대한 나의 알맹이 없는 반감을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나는 “과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의 짧은 대화 역시 웃으며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내 안에 질문은 남았다. 왜 나는 뇌이기를 거부하는가.

 

그리고 자연스럽게 몇몇 책을 찾아보게 됐다. 역시나 과학적인 인간은 못되는 통에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은 신경외과 전문의 폴 칼라니티의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 2016)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터뷰집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디자인하우스 2015) 같은 책이었다. 의사라고는 드라마 「하얀거탑」의 장준혁 같은 냉혈한만 떠올리던 나에게 폴 칼라니티는 웬만한 시인보다 더욱 문학적인 인물로 다가왔는데, 대학원 재학 시절 ‘월트 휘트먼’을 가지고 쓴 논문 「휘트먼과 인격의 치료」에 매겨진 애매한 평가가 특히 그러했다.* 그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이유도 “삶의 의미, 정체성, 죽음과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하는 분야”(96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인간의 뇌가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는 기관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삶에는 과학으로 포섭되지 않는 나머지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의사처럼 보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뇌이지만 뇌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회의 자리에서 이야기되었던 책 『나는 뇌가 아니다』도 기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섬세하게 내용을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에 반했다. “인간 정신이란 40헤르츠 진동수 구역의 동기화된 뉴런 점화일 뿐”(16~17면)이라는 논증에 반하며, 비물질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태도는 나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좀더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도 보다 윤리적인 차원으로 질문을 이어가게끔 하는 좋은 텍스트였다. 인간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의 잔인성에 분노하고 내가 느끼는 공포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한에서만 나는 간신히 인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멋진 책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가 정육점의 고기나 뇌 이상의 무엇이라면, 그것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내가 내면 혹은 마음이라고 불러왔던 장소는 그저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 목적어를 늘 알고 싶고 찾고 싶다. 내게 주어진 삶을 일장춘몽처럼 여긴다거나, 신비주의자의 태도로 삶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여러모로 난제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인간의 영원한 미스터리라는 듯, 함께 고민하는 책들을 더 살펴볼 수밖엔.

 

 

* 폴 칼라니티는 문학을 사랑한 의학도였다. 영문학 석사과정 당시 “나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즉 ‘인간의 관계성’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뇌와 신체 그 자체의 생리적인 명령에 따라 일어나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열정, 갈망, 사랑 등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언어가 신경 세포, 소화관, 심장 박동의 언어와 연관되는 뭔가 복잡한 방식이 틀림없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61~62면)라고 여기며 휘트먼에 관계된 논문을 썼으나 “문학 비평뿐 아니라 정신의학과 신경과학의 역사가 섞여 있어 정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63면)는 평을 받게 된다. 그는 결국 자신은 문학도와 맞지 않음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의 삶 전반이 녹아 있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안희연 / 시인

2018.9.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