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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록앤롤」과 체코 벨벳혁명

이정진
이정진

이정진                            

무슨 내용이길래 제목이 대뜸 ‘록앤롤’인가? 록앤롤(로큰롤)이라는 단어는 저절로 커다란 느낌표처럼 외치듯이 읽게 된다.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격변기에, 미국에서 출현한 흑인민속음악에 기초한 이 새로운 유형의 대중음악은 전세계로 전파되어 각국의 사회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그런 흐름 속에서 음악을 동력삼아 ‘문화혁명’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운동도 출현했으며, 실제로 음악의 힘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변혁이 앞당겨진 빛나는 역사의 순간들도 존재했다. 록앤롤의 시대가 저문 지 한참 되었지만, 지난 세기의 집단적 경험에 근거하는 록앤롤의 신화는 상당히 퇴색했을지언정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해오고 있다. 대중음악이 소비재(=팝)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꼰대’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런 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염원은 주기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데뷔 당시에 자주 밥 딜런과 견주어졌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경우가 너무나 두드러지는 사례라면, 한국에서는 나처럼 1960년대를 동경하는 아저씨 음악 팬들이 지금처럼 주류화되기 전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 대해서 (거의 의무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을 록앤롤 신화의 호소력을 증거하는 흥미로운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떤 작품이 이런 제목을 감당하기로 했다면 일단 록앤롤 신화를 존중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무런 단서도 달지 않은 이 육중한 제목 자체가 관객과의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다. 2000년대 들어 「유토피아의 해안」(2002) 3부작을 필두로 지성사를 소재로 하는 역사극으로 창작방향을 선회했지만, 스토파드는 자신을 일약 연극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로젠크렌츠와 길더스턴은 죽었다」(1967) 이래로 오랜 기간 기발한 극적 설정과 지적인 언어유희로 명성을 쌓아온 극작가였다. 그는 현대연극의 여러 기법적 흐름을 흡수한 바탕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반영하는 다채로운 관념적 주제를 극화하되, 일관되게 여러 관점과 가치들을 상대화하는 데 몰두하는 작풍을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고, 다수의 비평가들은 그의 예술적 선조로 그 유명한 비평적 잠언들과 함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1895)에서 보이듯 쉼없이 쏟아지는 말장난으로 통념이나 지배적인 가치를 조롱하던 것을 즐기던 오스카 와일드를 꼽곤 했다.

 

ⓒ국립극단

ⓒ국립극단

 

그러니 톰 스토파드 작 「록앤롤」(2006)은 불안하면서도 흥미로운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관극 후의 일차적인 소감은 다행스럽게도 제목이 낚시는 아니었구나,라는 것이었다. 더 다행스러운 사실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근 변화하고 있기는 해도 긴 창작경력 동안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기본적인 성향을 지나치게 억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확실히 스토파드적인 복합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 결과 록앤롤과 록앤롤로 대변되는 1960년대의 유산에 대한 입체적인 논의의 장을 제공한다.

 

작품의 가장 중심적인 극적 줄기는, 지난 세기 후반 체코에서 록앤롤이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반체제운동을 결집시키는 과정을 추적한다. ‘더 플라스틱 피플 오브 유니버스’라는 이름의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는 (어찌 보면 사소한) 영어로 된 밴드 이름 등을 지키기 위해서 정부의 밴드 면허증을 포기하고 비밀장소에서 기습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활동하면서 헌신적인 소수의 팬들과 함께 여러차례 경찰의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 ‘프라하의 봄’에도 가담하지 않을 만큼 철저한 탈정치를 표방한 터라 그들의 곤경은 예술적인 스캔들 정도로 치부되다가 점차 그들의 ‘탈정치적인 대의’의 중요성에 소설가 하벨을 비롯한 체코 반체제 진영이 깊이 공감하여 구명운동에 나서게 된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은 영국 유학생 출신이자 이 밴드의 열렬한 팬인 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 록앤롤 마니아와 전형적인 반체제 인사인 그의 친구 페르디난드가 ‘프라하의 봄’ 이래로 변화하는 국면마다 체코의 정세를 두고 각자가 헌신하는 대의를 옹호하며 첨예하게 펼치는 논쟁은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중의 하나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밀도 있는 사유가 전개되는 한편으로 논쟁이 거듭되면서 체코의 정치적 현실에 눈뜬 얀의 인간적·정치적 각성이, 그리고 끝으로 둘의 상호이해가 극화된다. 처음에 실질적인 정치적 효과를 끌어내지 못하는 페르디난드의 정치활동을 도덕적 과시로, 더 나아가 반체제활동 일반을 어떤 규칙 속에서 펼쳐지는 지배권력과의 정치적 게임이라고 폄하하던 얀이지만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밴드가 구속되었을 때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페르디난드 또한 스타일에 대한 그 밴드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지배권력에 가하는 부담과 그들이 추구하는 종류의 자유가 위축되는 상황의 위험성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얀은 페르디난드와 함께 ‘77헌장’에 서명하게 되는데, 바로 이후 벨벳혁명으로 이어지는 체코 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는 문건이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 같은 헌법적 권리의 실현을 강조하는 77헌장의 기조는 바로 ‘더 플라스틱 피플 오브 유니버스’의 구명운동을 거치면서 도출된 정치노선이었다. 이렇듯 이 작품은 록앤롤 신화를 떠받치는 가장 인상적인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를 공감어린 태도로 그리고 있다.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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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또다른 한축을 담당하는 인물은 뜻밖에도 교조적인 골수 맑시스트 맥스이다. 그는 얀이 캠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지도교수였고 얀이 체코로 돌아간 후에도 맑스주의자로서의 명망을 활용하여 종종 체코를 방문하면서 얀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캠브리지와 프라하를 오가는 이 작품의 구성상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이 인물의 쓰임새가 극 초반에는 이런 인물형의 전형으로서 은근한 풍자에서 때로는 노골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국한되는 듯하다. 록앤롤을 팝으로 부르는 이 구세대는 당연히 대중음악 질이 떨어지는 독일로 이민 갈 수 있는 기회를 지나쳐버렸다는 제자의 농담(?)도 이해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프라하의 봄에 대한 그의 너무나 전도된 인식이다. 소련군의 주둔을 목도하면서도 체코의 자유화 운동을 소비에트 이념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며 격노하는 것이다. 한 인상적인 대사에서 “그럭저럭이라도 이론과 현실 간에 정합성이” 존재하기를 희망한다고도 토로하는데, 그는 현실을 설명할 이론적 모색을 하는 대신 허황하게도 현실이 이론에 들어맞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적·이념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품위는 지켜나간다. 제자 얀을 통해 체코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고, 죽음을 앞둔 고전학자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유물론이라는 신념(이라기보다는 자기만족적인 지적유희)을 철회하는 등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멸종을 앞둔 공룡”으로서 무력감과 패배감을 삭이며 삶을 견디는 이런 그의 모습은 서늘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관객들의 공감을 확보한 그는 극 말미에 배치된 긴 파티 장면에서 1960년대 세대들과 1960년대에 대한 의미를 두고 맞선다. 이 장면이야말로 체코 플롯과 균형을 맞추며 이 작품에 역사적 시각의 폭을 가져다준다. 다들 술에 취해 어지러이 여러 말들이 오가는 중에 여전한 맥스의 교조주의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더 두드러지는 것은 이번에는 1960년대 세대들의 자기모순과 오만함이다. 이때 막 벨벳혁명을 거치고 20년 만에 자신이 사랑하는 영국을 방문한 얀과 한때 히피꼬뮌에도 참여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맥스의 딸 에스메는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들이다.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인간들인 에스메의 전 남편 나이젤과 그의 새로운 배우자인 캔디다야말로 자신들을 역사의 승리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아무런 단서도 달지 않고 자기 세대가 1960년대에 세상을 바꾸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확인한 터이다. 그 둘은 모두 저널리스트들로 대중들의 저급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자극적인 기사로 명성과 부를 얻었다. 앞서 나이젤이 바로 벨벳혁명을 취재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니는 사건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심은 너무나 협소하다는 것이 거듭 밝혀지며 그는 취재원 얀에게 오로지 서유럽인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깃거리(=돈)만을 찾는다. 그래도 나이젤이 좀 점잖은 경우라면 캔디다가 칼럼이랍시고 쓰는 글은 노골적인 인신모독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최신 칼럼이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였지만 지금은 은둔자 생활을 하는, (자기 세대의 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드 배럿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통렬한 아이러니이다. 이들과 대비될 때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맥스의 인간적인 미덕이 돋보이게 되며, 더불어 1960년대를 “어른들이 애들로 꾸미고 놀았던” 때라는 그의 다소 과격한 발언도 무게가 실리게 된다.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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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공연평인데 연출에 대해 간략히라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공연이 3시간에 육박하며, 위의 꽤 자세한 요약으로도 다 정리되지 않은 여러가닥의 플롯이 전개되는 대작을 무리없이 연출한 공연이라는 것이 전반적인 인상이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맥스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좀 불충분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위의 정리는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원작을 읽은 기억이 반영된 것이고, 실제 공연에서는 갈수록 두께를 더해가는 얀에 비해서 맥스는 극 초반의 위엄을 잃고 주로 감정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평면적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래서 공연의 한 정점이 되어야 할 ‘파티 장면’이 극적 긴장을 자아내지 못하고 약간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받았다. 지성사적인 맥락을 전제하는 토론부분이 편집된 탓이 클 것인데, 한국관객들이 쉽게 쫓아가지 못할 그런 대목의 처리를 놓고 제작진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한국의 모든 예술장르를 통틀어 신빙성 있게 입체적으로 형상화된 지식인 캐릭터가 드물기도 해서 이 인물의 형상화에 참고할 만한 모델을 찾기 어려웠으리라는 사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이왕 이만한 규모와 수준의 작품을 무대화하기로 한 마당에야 적절한 타협을 택하기보다는 새로운 선례를 제시하는 도전을 하는 쪽이 어땠을까 싶다. 재공연시에 고려했으면 하는 주문이다.

 

이정진 / 문화평론가, 서울대 강사

2018.12.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