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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8회

“그러면 먹습니까? 동물들이.” 누군가 다가와 형민에게 말을 걸었다. 형민이 뒤돌아보니 피켓을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저기 안 보여요? 토끼가 있네요. 저쪽엔 기린이 있고.” 형민이 농담을 했다. “토끼 이름은 당근이랑 배추였어요. 내가 지어줬죠.” 남자가 형민의 옆 벤치에 앉았다. 그 벤치는 등받이가 악어 모양이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피켓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형민에게 전단지 한장을 내밀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나요?” 형민은 전단지를 보았다. 이영아(실종 당시 21세). 실종된 날짜를 헤아려보니 2년 하고도 5개월이나 지났다. “어쩌다가……” 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휴게소에서요. 그날이 엄마 생일이어서 서울에서 같이 자취를 하는 언니와 내려오는 길이었어요. 그때 단풍철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대요. 여자 화장실이 어찌나 붐볐는지 몇몇 할머니들이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암튼, 둘째가 화장실에 간다고 들어갔는데, 큰애는 그저 사람이 많아서 늦어지는 줄 알았다는데, 그리곤 끝이었어요.” 영아는 둘째 딸. 공부를 잘해서 늘 전교 오등 안에 들었던 딸.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학에 입학한 딸. 과 수석을 해서 부모님 등록금 걱정도 덜어준 딸. 남자는 말했다. “내가 트럭을 몰고 과일 장사를 하는데, 근데 술 취한 손님들한테도 속인 적이 없었어요. 만취한 사람들한테는 일부러 썩은 과일을 섞는 사람도 있거든요.” 남자는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두 딸이 반듯하게 자라준 것이라고 믿었다. 아내가 둘째 딸을 출산한 날, 남자는 공장 화재로 큰형을 잃었다. 싱크대나 신발장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큰형이 공사현장을 떠돌며 목수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차린 공장이었다. 조카들이 태어나면 아이용 의자를 만들어서 선물하던 형이었다. 일곱명의 조카들. 일곱개의 의자를 만드는 동안 큰형은 선을 다섯번 봤고 다섯번 차였다. “큰형의 기일과 딸의 생일이 같다는 사실이 참 괴로웠어요. 그래서 딸의 생일에 케이크 한번 안 사갔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민은 생각했다. 이제 아내의 생일마다 딸의 실종을 떠올려야 하는구나, 하고. 형민은 다시 한번 전단지를 들여다봤다.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다. 형민은 전단지를 반으로 접으려다 말았다. 그러면 사진 속 얼굴이 반으로 접힐 것만 같아서. 아빠의 앞에서는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형민이 남자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단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핸드폰을 그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휴게소 건물로 달려가 커피와 유자차를 주문했다. 음료수 두잔을 들고 돌아와보니 남자가 형민이 먹다 남은 호두과자를 빈 우리에 던지고 있었다. “커피 아님 유자차. 고르세요.” 남자가 커피를 골랐다. “제가 어제 좋아하는 형님을 오래간만에 만났는데요.” 형민이 유자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고향에서 문방구를 해요. 폐교된 초등학교 앞에서요.” 양조장에서 술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강차장이 찻길 건너 밭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저쪽부터 저쪽까지 전부 우리 집 땅이었지, 하고. 그걸 다 팔아버린 게 자기였다고. 태생이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데다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라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응석받이로 키우는 바람에 강차장은 자연스럽게 말썽꾸러기로 자랐다. 닭을 훔쳐 친구들이랑 구워먹기. 죽은 뱀을 여학생들 책가방에 몰래 넣기. 과일 서리해서 반 친구들에게 공짜 과일 나눠주기. “글쎄, 아버지 밭 무를 몰래 캐서 팔기도 했대요. 리어카 한가득. 그걸 팔아 친구들이랑 서울로 놀러 갔다네요.” 그랬지만 강차장은 누구를 괴롭히거나 때린 적은 없었다. 아버지한테 혼날 때마다 늘 그 핑계를 댔다. 단지 장난만 치는 거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읍내 당구장에 놀러갔다 싸움에 휘말렸다. 강차장이 실수로 옆 테이블에서 당구를 치던 사람의 발을 밟았다. 진지한 걸 싫어했던 강차장은 사과를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 발도 한번 밟으세요,라고. 그 말이 자기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이 강차장의 뺨을 때렸고, 뺨을 맞은 강차장은 그 사람의 가슴팍을 밀었다. 상대방은 넘어지면서 얼굴을 당구대 모서리에 부딪쳤는데 그만 왼쪽 시력을 잃었다. 그 일로 이 땅을 팔았지. 퇴학을 당할 뻔했지만 아버지가 겨우 막았는데 그것도 아마 돈을 썼을 거야. 강차장이 지금은 칼국수집이 된 어느 가게 앞에 서서 말했다. “암튼, 그 일을 시작으로 이상하게도 나쁜 일만 자꾸 생기더래요.” 군대를 갔다 온 다음 강차장은 땅을 팔아 통닭집을 차렸는데, 개업하자마자 바닥에 흘린 기름을 제대로 닦지 않아 손님이 넘어지면서 이가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앞니 두개. 그래서 밭을 또 팔았다. 언덕에 세워놓은 차가 미끄러지면서 길 가던 사람을 치어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고, 동업을 약속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고향땅을 팔았다. “찔끔찔끔. 그렇게 팔았는데 나중에 남아 있지 않더래요.” 형민이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야금야금. 원래 그런 게 무서운 거예요.” 형민은 다시 한번 유자차를 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남자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런 강차장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아내를 만나면서였다. 아내 덕에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딸과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태어났는데 자기랑 너무 닮았더래요. 그게 유독 아들한테만 엄하게 군 이유였대요. 자기처럼 자라지 않도록. 집안의 골칫덩이가 되지 않도록.” 그랬군요. 그랬군요. 남자는 형민의 말을 듣고는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형민은 남자가 중얼거리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랬더니 강차장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남자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형민은 다 식은 유자차를 후루룩 소리 내며 마셨다. 일부러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처럼.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우리로 걸어갔다. “여기에 토끼 두마리가 있었어요. 한놈은 당근을 좋아했고 한놈은 배추를 좋아했죠.”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남자가 빈 우리를 흔들었다. “두놈 다 올겨울에 죽었어요.” 남자가 계속 빈 우리를 흔들었다. 아주 세게. 무너뜨릴 것처럼. 형민이 다가가 남자의 팔목을 잡았다. 그제서야 형민은 남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울면서 남자는 말했다. “경찰은 실종이 아니라네요. 가출이라고. 딸이 사라지고 같은 과를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봤는데, 내가 아는 딸이랑 그 아이들이 말하는 딸이랑, 다른 거예요.” 형민은 남자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남자와 같이 빈 우리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