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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8회

알제리전투, 자초지종 _ 1

민족해방전선의 탄생

 

1966년 이탈리아의 질로 폰테코르보가 감독한 영화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는 많은 반응과 논란 속에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알제리인들의 치열한 독립 투쟁(1954~62)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냈으며, 영화의 배경은 우리 일행이 직접 다녀온 알제의 카스바 구역이다. 이곳에서 프랑스 점령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간의 쫓고 쫓기는 처참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영화의 첫 장면은 고문과 살육으로 시작된다. 프랑스 영화 관계자들은 항의의 표시로 시상식에서 집단 퇴장했다. 영화는 삽시간에 전세계에 알려졌고 상영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나 상영 여부와 형식은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예 상영이 금지되었고, 어떤 나라에서는 크게 환영 받으며 편집 없이 원 상태로 상영되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구미에 맞게 일부를 편집하기도 했다.

영화는 물론이고 역사 연구 등의 성과로 알제리 전투의 진상은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그 자초지종을 많은 부분 함께 해오며 지켜본 사람으로서 필자는 책무감과 반세기가 훨씬 넘어 그 현장을 한번 둘러보게 된 소회를 담아 자세하게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알제리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과 풍부한 지하자원, 그리고 근접성 등을 감안해 프랑스는 근대에 들어와 알제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1830년 프랑스는 10년간 ‘검과 쟁기로 알제리 정복을 완성한다’라는 계획을 세우고 야금야금 알제리 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찰스 10세는 프로몽 장군에게 3만 원정군을 주고 1830년 7월 알제리 연해지대를 점령했다. 1834년에는 알제리가 프랑스 속지임을 선언하고 군사통치를 시작하였다. 1871년에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한 주로 예속시키고 총독을 파견하여 알제리 정복 10개년 계획을 완수했다.

총독 통치를 이어오던 프랑스는 1905년에 돌연 사하라사막 지역을 점령하고 알제리 전역에 대한 식민통치를 단행한다.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민정책을 내놓으며 유럽인들을 이주시켰다.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 이주민이 1850년에는 13만에 불과했으나 1911년에는 68만으로 급증했으며, 1960년대 독립 전에는 유럽인이 전체 인구의 35%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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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스 베르네가 그린 1937년의 콩스탕틴 점령 모습.

 

알제리 식민화 과정에서 프랑스는 종족 간 차별정책으로 단합을 막고 귀중한 지하자원을 무자비하게 약탈해갔다. 알제리인들은 착취당하며 빈곤과 불평등 속에서 고통받았다. 이로부터 탈피하려는 투쟁이 바로 알제리 독립전쟁이다. 1830년 점령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100여년간 알제리인들은 끊임없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고 자주적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앞에서 살펴본 압둘 카디르의 항쟁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알제리인들은 국제적인 반파시즘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리하여 미국·영국·프랑스는 전후에 알제리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종전 후 미국과 영국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틈을 타서 프랑스는 약속을 묵살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47년 벤 벨라를 비롯한 젊은 청년들은 ‘민주자유승리운동’(MTLD)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무장봉기와 혁명정부 수립을 위해 전국에 연락망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년 후 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었으나 핵심인 벤 벨라는 체포되지 않고 1952년 카이로로 피신했다. 내부 조직 정비를 끝내고 벤 벨라를 비롯한 일부 구성원들이 1954년 ‘단결과행동혁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혁명위원회’는 그해 11월 1일을 전국 민중 봉기일로 결정하고 대중적 기반을 더 확장하기 위해 이 위원회의 이름을 ‘민족해방전선’(FLN)으로 바꾸었다. 각계각층의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포섭하여 민족해방전선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장해나갔으며, 사회주의 공화국 창설을 투쟁 목표로 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프랑스는 외부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외무장관을 카이로에 급파해 나세르 대통령에게 지원 중단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세르는 독립은 역사의 불가피한 추세라고 하면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를 계기로 알제리 독립투쟁은 이집트라는 확고한 지원군을 얻었으며, 나세르는 아랍의 지도자이자 민족영웅이라는 면모를 아랍세계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1954년 11월 1일 봉기일 새벽, 전국 30여개 곳에서 ‘전선’ 산하의 민족해방군은 일제히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지도부는 카이로를 통해 봉기 소식과 더불어 해방전선과 해방군의 공동선언문을 선포했다. 봉기 후 해방군은 우선 지중해 연안의 대(大)카비르 산악지역과 튀니지와의 접경지대인 오레스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그 범위를 점차 넓혀나갔다. 공포에 질린 식민 당국은 5만 주둔군을 동원해 근거지를 포위하는 한편, 본국에 지원군 급파를 요청하였다. 1955년 말까지 20만의 병력이 증강되었으며, 프랑스군은 비행기와 탱크 등 현대적인 무기를 총동원하여 해방군을 섬멸하려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해방군은 소모전을 피하고 지형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소규모 분산 작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안겼다. 1956년 초에 이르러 해방군은 정규 병력 15만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민병(民兵) 11만 5,000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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