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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9회

남자는 금요일 저녁이면 휴게소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토끼들에게 줄 배추와 당근을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다. 평일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과일을 팔았다. 트럭에 딸을 찾는다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토끼들이 그렇게 많이 먹는 줄 몰랐어요. 먹성이 무서울 정도로.” 남자는 토끼가 귀여워서 먹이를 준 게 아니었다. 그 먹성이, 먹는 입모양이, 징그러워서 먹이를 주었다. 전단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남자는 이런 나쁜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고. 당신네 행복은 언제까지 가나 보자고.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남자는 화가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날 때마다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토끼한테 당근을 던져주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와서 물었어요. 사과를 줘도 될까요? 하고.” 남자가 먹이를 줘도 된다고 말했더니 아이가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꺼냈다. 소풍 가는 중이에요. 아이가 3단 도시락의 맨 위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맨 위 칸에는 과일이 있었다. 아이는 그중 사과 두조각을 꺼내 토끼들에게 주었다. 자세히 보니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였다. 토끼가 사과를 다 먹는 걸 본 다음 아이는 안녕, 하고 토끼에게 인사를 한 뒤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날 이후로 남자는 팔다 남은 사과를 토끼에게 주었다. 토끼 모양으로 깎아서. 사과 한알에 여덟조각의 토끼가 나왔다. 남자는 여덟조각의 크기가 같도록 신중하게 반을 가르고 또 반을 갈랐다. 토끼 앞에서 토끼 모양의 사과를 만들다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칼질을 잘해 토끼의 귀가 쫑긋하게 보이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형민은 어머니가 예전에 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고, 그때 사과를 그렇게 깎아 안주로 내곤 했다고, 남자에게 말했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사과는 잘 깎았다. 사과를 얇게 저며서 꽃 모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걸 만들 때 어머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저는요. 사과를 생각하면 늘 마늘향이 떠올라요.” 어린 시절 남자의 집에는 칼이 한자루뿐이었다. 과도라는 것은 없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 칼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마늘종볶음을 하고, 김치를 썰었다. 그 칼은 아무리 씻어도 마늘냄새가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과일을 깎으면 모든 과일에 마늘향이 배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자는 일부러 마늘을 썬 칼로 사과를 깎아 먹었다. 그걸 먹으며 부엌에 서서 울었다.

남자는 처음에는 사과만 깎다가 나중에는 당근으로 장미 모양을 만들었다. 장미 모양으로 깎은 당근을 토끼에게 주며 아내에게 꽃 한송이 선물해본 적이 없는 자신을 비웃어보기도 했다. 장미 모양으로 당근을 깎다 나오는 자투리들은 남자가 먹었다. 토끼처럼, 입을 일부러 작게 하며. 남자가 형민에게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왼손 손가락에 칼로 벤 흉터가 여기저기 보였다. “이제 장미는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딸이 사라지고 난 다음 딸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들은 못해준 것만 기억난다고 하는데 전 그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아무 기억도.” 사과를 깎고 당근을 깎는 동안, 남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장면만 떠올랐다. 네 식구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넷 다 반팔을 입은 걸로 봐서는 여름인 듯했으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아내가 생일 선물로 사줬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번 입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넷이 길을 걷다 둘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내가 딸에게 다가가 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입바람을 불었다. 아내가 아이 키에 맞춰 무릎을 구부리던 순간. 딸이 손으로 눈을 비비려하자 아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아이의 손등을 치던 순간. 그 풍경이 남자의 머릿속에 하염없이 맴돌았다. 그 장면은 남자에게는 어떤 감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남자는 하루에도 수십번 그 장면을 되돌려볼 수 있었다. 형민에게도 그런 풍경이 하나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한 말이네. 딸이 형민에게 말했다. 언제 어디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말을 하며 잡고 있었던 형민의 손을 놓았다는 것만 기억났다. 딸이 형민의 손을 잡기 위해서 손을 올려야 했으니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였을 것이다. 딸과 대화가 어긋날 때면 형민은 그 말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보았다. 내가 뭐라 말했기에 딸이 그렇게 대꾸를 했을까, 하고.

남자가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딸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딸의 외투에 있던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책상 서랍 속 의미 없는 물건들을 물티슈로 닦고, 딸이 읽은 책을 따라 읽고, 딸이 쳐둔 밑줄을 노트에 적어보고, 딸이 한 낙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헤아려보았다. 그의 아내는 세수를 하고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딸은 어디 갔을까? 하고. 그러다가 내 딸은 누구일까? 하고 질문을 바꾸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그러다보니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거울을 자꾸 보고 있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대요. 나조차 나를 모르는데 나는 누구를 찾아다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대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화장실 거울을 깼다. 자기도 아내처럼 그렇게 될까봐 무서워서. 그후로 아내는 베개를 들고 딸의 방으로 건너간 후 다시는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자가 말했다. 형민은 솔직히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저도 그 부분에서는 병신이거든요.” 형민은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전단지 뒷장에 약도를 그렸다. 강차장의 문방구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 한번 이쪽 동네로 과일 팔러 가거든 여길 가보세요. 막걸리를 사달라고 하면 사줄 거예요.” 형민은 말했다. 문방구 주인은 자기처럼 바보라 대답을 못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양조장을 하는 친구가 있어 위로주는 사줄 수 있을 거라고. 남자가 지도가 그려진 전단지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형민에게 말했다. “우동 한그릇 하실래요?” 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민과 남자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우동을 먹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우연히 같은 자리에 합석한 사람처럼. 우동을 다 먹은 다음 둘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형민은 환승정거장으로 가서 집으로 가는 표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