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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9회

알제리전투, 자초지종 _ 2

알제리 독립의 순간

 

바로 이 무렵 필자는 카이로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알제리 형제들의 투쟁 낭보를 매일같이 접하며 함께 흥분하고 축하하던 게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에 떠오른다. 전공과 관련해 아랍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길 게을리할 수 없었는데, 당시 제3세계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택한 나라는 오로지 알제리뿐이었다. 그 현장에 대해 깊은 동경과 존경심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이로에서 알제리 소식을 듣는 순간순간, 흥분에 앞서 어떤 시대적 사명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아프리카를 위한 설욕심(雪辱心)과 궤를 같이하면서 점차 하나의 이념으로 굳어갔다. 이를테면 감성이 지성으로 승화한 셈이다.

 

민족해방군의 초기 무장투쟁에서는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으며, 강력한 지도 핵심과 명확한 정치강령이 결여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날로 막중해지는 전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족해방전선은 1956년 8월 제1차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17명의 정식위원과 17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최고 정치군사 지도기관인 ‘알제리전국혁명위원회’를 발족했다. 회의에서는 또한 ‘민족해방전선 강령’을 채택했는데, 강령에는 알제리혁명의 성격과 전쟁 목적, 정전 조건 등을 명확히 규정했다. 전쟁 목적은 프랑스 군대의 패퇴, 프랑스의 알제리 내 경제시설 파괴였고, 정전 조건은 프랑스당국이 알제리의 완전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고 민족해방전선이 알제리 국민의 유일한 대표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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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알제리의 프랑스 군인들.

 

1956년부터 1958년까지의 2년 사이에 알제리민족해방군이 바야흐로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유감스럽게도 알제리민족해방전선 내의 일부 지도자들은 민중의 봉기 참여 정도를 과도하게 평가한 나머지 정치적·군사적 지도 문제에서 실책과 오류를 범해, 유격전을 편다는 전술 방침을 포기하고 정규전만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 민족해방전선은 제때에 경험과 교훈을 새기고 유격전에 집중한다는 전략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민족해방전쟁이 승승장구하고 있던 1958년 9월 19일, 카이로에서 페르하트 아바스(Ferhat Abbas)를 수반으로 하는 알제리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알제리해방전쟁을 총괄하는 임시정부의 수립은 해방전쟁 승리의 신호탄이며 알제리 독립국가 건설의 발판이다. 알제리 국민은 물론 알제리 해방투쟁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으나 이는 전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필자는 임시정부 수립 한 달을 앞두고 귀국령을 받아 급히 베이징에 돌아왔고, 중국 외교부의 서아시아-아프리카사(司)에 인사 조치되었다. 알제리 문제를 주관하는 부서였기에 신나게 일했다.

 

알제리 민족해방 무장투쟁은 종주국 프랑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해방군은 매일 200여차례씩 주요 도시들에 불의의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수십만의 인명 피해를 입고, 80억달러 이상을 탕진했다. 갈수로 더 깊은 곤경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1958년 한해 여름에 다섯번이나 알제리를 오가면서 여러가지 강온 양면의 술책을 꺼냈다. 그러나 알제리 게릴라 투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은 없었다.

급기야 드골은 1959년에 알제리에 자결권을 주겠다고 선언하고는 정전 담판을 제의한다. 1960년 6월, 프랑스와 알제리민족해방전선 간에 담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가 내세운 일종의 방패막이였다. 테이블에 앉아 정전에 대해 논의하는 바로 그 순간 프랑스 당국은 대대적인 군사 행동을 은밀히 진행하며 병력을 80여만으로 늘리고는 ‘요충지를 고수하고 전면적인 봉쇄를 단행하라’는 새로운 전략 방침을 내려보냈다. 내륙(사하라사막)에 길이 3,000km, 너비 1km의 대형 전략 도로를 건설하고, 주요 도시와 원유산지 그리고 알제리-튀니지, 알제리-모로코의 변방을 철저하게 봉쇄하도록 했다. 사실상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를 테이블로 불러내 시간을 벌면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여 탈출구를 찾으려는 식민제국다운 얄팍한 속셈이었다.

이러한 정세에 대비해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전장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담판 투쟁’을 겸행한다는 전략에 따라 프랑스의 몇차례 공세를 제압하고, 영토를 분할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한편으로는 파업이나 시위 같은 비폭력투쟁을 통해서도 식민 당국과의 담판 투쟁에 힘을 실어주었다. 궁지에 몰린 드골정부는 1959년 10월 알제리의 자결권을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이어 1962년 3월부터 프랑스 동부의 에비앙에서 알제리 임시정부와 정전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에서 프랑스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새로운 합법적 정치조직’임을 인정하고 알제리가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 여부를 결정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같은 달 18일에는 알제리 국민의 자결권과 알제리 국가의 독립 및 주권을 정식 인정하는 ‘에비앙협정’을 체결하였다.

 

알제리는 1962년 7월 3일 완전 독립을 선포하고, 7월 29일에는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130년간의 지긋지긋한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식시켰다. 이 위대한 승리로 알제리는 아프리카 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항쟁과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쟁취한 빛나는 선례를 남겼다.

필자는 1959년 11월 중국과 모로코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중국 외교부에서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모로코는 이집트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두번째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국과 모로코 간의 전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은 알제리 정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인접국 모로코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지원하기에 최적지였으니 말이다. 전쟁이 정화될 때까지의 3년간은 실로 알제리 형제들과 몸과 마음을 함께한, 평생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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