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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0회

알제리 국부, 벨라

알제리 독립의 순간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이끈다. 시대는 영웅을 선택하고, 영웅은 시대의 소명을 받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대의 소명에 충실한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 여기 알제리에 바로 그러한 영웅이 있다. 130년간의 식민지라는 치욕을 씻어내는 처절한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시대의 영웅, 알제리의 국부의 이름은 벤 벨라다. 벤 벨라와 거의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그의 인생 여정을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는 인생의 아이콘으로, 선배로, 스승으로, 닮아야 할 사람의 표상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어왔다. 그 형상을 소박한 글이나마 그려내어 전하는 것이 산 자의 몫이요,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는 1918년 12월 25일 알제리 서북부 지중해 연안 오랑(Oran)주의 자그마한 마을 마그니아(Maghnia)의 무슬림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해 부친의 한 친구 집에 기거했다. 아직은 어린 그였지만 도시에 와 농촌보다 더 심한 인종차별을 느꼈다. 1937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징집되어 프랑스 마르세유 주둔 141알프스보병대 중사로 입대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2년 후 제대하지 못하고 1940년에야 제대할 수 있었다. 1943년 동맹국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그는 다시 군에 징집되었고, 모로코를 거쳐 이탈리아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군인으로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5월 8일, 알제리 전국 대도시에서 동시에 군중시위가 일어나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경축하면서 식민주의 철폐와 민족독립, 국내 경제 개선 등을 촉구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세티프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4만 5,000여명의 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처참한 유혈사건은 벤 벨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군대에 남아달라는 상사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향 마그니아에 돌아온 후 메살리 하지(Messali Hadj)가 이끄는 ‘민주자유쟁취승리당’에 입당했다. 대중의 독립 요구가 날로 거세지는 가운데 승리당 내부에서는 분쟁이 격화되었다. 메살리 일파는 선거를 통해 민족독립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벤 벨라 일파는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벤 벨라는 1947년 승리당 내에 ‘특별조직’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했고, 그 구성원들은 자진 자금과 무기를 모으고 농촌에 진출해 비밀리에 활동하고 조직을 발전시켰다. 1949년 기층당원들의 발의에 의해 승리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당의 결정에 따라 벤 벨라가 당 정치기구의 책임자와 ‘특별조직’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52년 2월 알제 우체총국을 습격할 때 벤 벨라는 경찰의 추적을 피했으나 한달 뒤 변절자의 고발로 그만 알제 주택에서 체포된다.

법정에서 논리정연한 웅변으로 프랑스의 범행을 낱낱이 고발한 벤 벨라는 8년 구금 판결을 받고 프리다 감옥에서 복역했다. 1952년 3월 말 그는 탈옥에 성공한 뒤 배를 타고 프랑스로 도피해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에서 몇달간 은거했다

 

당시 인접한 모로코와 튀니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고무된 승리당은 1953년에 대표자대회를 열어 비교적 명확하게 반제투쟁을 목표로 한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고, 이듬해 3월에는 당 내에서 벤 벨라를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이 ‘단결과행동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8월, 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단결과행동혁명위원회’는 여러 당파들을 연합했고 이후 이 연합체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민족해방전선의 조직하에 1954년 11월 1일 전국적인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전국적인 무장봉기에 당황한 프랑스당국은 가혹한 군사적 탄압을 가하는 한편, 각종 회유·기만책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잡으려 시도했다. 당국은 벤 벨라를 미행한 끝에 1956년 초 카이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그를 발견하고 시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일신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카이로와 트리폴리, 로마, 마드리드 등 도시들을 오가면서 갓 불지핀 독립항전을 진두 지휘했다. 1956년 8월 벤 벨라는 민족해방전선의 최고기관인 ‘알제리전국혁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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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벨라(오른쪽)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1962년 쿠바.

 

1962년 5월 27일 알제리전국혁명위원회는 트리폴리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벤 벨라와 그 지지자들과 임시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벤유세프 벤헤다와 페르하트 아바스 사이에서 엄중한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회의에서 벤 벨라 파가 제시한 강령이 비록 벤유세프 벤헤다 파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다수의 지지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정식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이 바로 ‘트리폴리 강령’이다. 그해 7월 3일 알제리 임시정부는 일방적으로 알제리 독립을 선포하고, 벤헤다 등 임시정부 성원들이 알제에서 정부 요직을 선점했다. 이에 벤 벨라는 7인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전선 정치국을 발족해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전시 알제리해방군 참모장이던 우아리 부메디엔 등의 지지를 얻게 되자 벤 벨라의 위상은 크게 달라져 임시정부의 일부 관료들과 군부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었다.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벤헤다 일파는 8월에 알제리를 떠나버렸고, 벤 벨라와 그가 주도하는 정치국이 임시정부를 장악했다. 이어 9월 25일에 열린 알제리 제1기 제헌국민회의는 알제리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내각을 조직하고 벤 벨라를 총리로 임명했다.

 

알제리가 1962년 10월 8일 UN에 108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직후 벤 벨라는 알제리는 국제무대에서 중립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일주일 후 그는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를 만나 신생 알제리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구했을 뿐 아니라, 카스트로를 대신해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대한 미국의 점령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귀국 후에는 프랑스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 군사기지를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1963년 9월 8일 알제리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통과시켰는데, 헌법에는 알제리가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고 대통령제를 실시하며 민족해방전선이 유일한 정당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9월 16일 벤 벨라가 민족해방전선의 제청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64년 4월 16~24일에 진행된 민족해방전선 1차 대표자회의에서 벤 벨라는 총서기로도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와 장기간 군을 지휘하던 우아리 부메디엔과의 갈등이 알제리 독립 후 심화되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부메디엔은 1965년 6월 19일 쿠테타를 일으켜 벤 벨라를 체포했다. 이로써 벤 벨라는 생애 세번째(1965.6.19~1979.7.3)로 구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벤 벨라는 출옥 후 10년간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생활 중 잠시 귀국해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출마할 계획을 세웠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그 후로는 국내 정치와는 일체 관계를 단절하고, 몇군데 민간 국제단체에만 관여했다.

 

그는 2012년 4월 11일 숙환으로 알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세.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일주일 동안 애도 주간을 선포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대통령은 유가족에게 보낸 조전에서 “오늘 알제리 민중은 한 사람의 위인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와 명민한 안광으로 알제리의 자유의 길을 밝혔으며, 현대화한 알제리를 건설했습니다”라고 고인을 애도했다.

 


 

* 정수일 여행에세이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는 총 30회로 온라인 연재를 마칩니다.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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