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온라인 연재

36회

마지막 달에는 종합병원에서 교통사고 전문 정형외과로 옮겨 시간을 보냈다. 퇴원하고 당장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주소를 직접 써넣어야 할 때, 그는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적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형이 한 여자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쨌든 서울에서 버티고 싶었다.

“섭섭하다, 야. 내가 설마 그 돈을 나를 위해서 썼겠냐.”

합의금 조로 회사에서 돈을 받고, 또 그것을 일방적으로 삼켜버리고서도 형은 당당하게 굴었다.

“다 널 위해서야. 여기저기 인사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내가 안 그랬으면 얌마, 말도 마라.”

퇴원 직전에야 마지못한 듯 민규의 병실에 찾아온 형은 그 얘기를 하면서 별안간 목소리를 낮췄다. 형에 의하면, 원래 법대로 하면 그는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했다.

“야, 그 사건 인터넷뉴스 댓글엔 뭐라는 소리도 있는 줄 아냐? 그 차값 물어내고 건물파손 복구해주려면 너 인생 X 됐다고. 평소에 파킹맨들, 남의 차라고 운전 막 함부로 하던데 고거 참 쌤통이라는 댓글도 많아.”

민규는 형의 말에 정색을 하고 대응할 여력도 없었다. 결국 고시원을 예약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연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만이 그가 고려한 요소였다. 지연은 그사이, 그와 함께 일하던 까페를 그만두고 새로운 곳에 다니고 있었다. 퇴원을 할 때 지연이 도와주러 왔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겨우 양해를 구하고 나왔다고 했다. 지연이 까페를 그만두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그는 미안했다.

“아냐. 무슨.”

지연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웃었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일할 것도 아니었는걸. 나도 빨리 정착할 일을 찾아야지.”

그녀가 다니게 된 곳은 여성의류를 파는 인터넷쇼핑몰이었다. 민규에게는 프랑스식 제과를 전문으로 하는 베이커리 까페보다 한층 더 미지의 영역으로 느껴지는 세계였다. 지연은 처음에는 물류배송팀에서 하루 다섯시간씩 근무하기로 했는데, 막상 출근해서 며칠 일했더니 몇시간씩 더 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럼 내내 포장만 하는 거야?”

“처음 며칠은 거의 그랬지. 근데 이젠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꽤 여러가지를 해. 어차피 쇼핑몰 일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더라. 이젠 CS팀 바쁠 땐 가끔 전화도 돌려받고.”

CS팀이란 고객 응대를 하는 부서를 말한다고 지연은 설명해주었다.

“사무실 안에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라. 그냥 그 시간 동안 거기 푹 스며들어 있게 돼.”

일이 맘에 든다거나 재미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지연의 표정에서 그렇다는 것이 자연스레 묻어났다. 민규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종의 소외감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난 몰랐는데 내가 이쪽 일에 꽤 잘 맞나봐. 포장도 첨에 초보자라고 밝혔거든. 그런데 다들 거짓말 같다고 해. 손끝이 야무지고 빠르다고. 어저께는 CS 전화 한통 당겨 받았는데, 한 손님이 배송 받은 블라우스가 자기 사이즈가 아니라고 막 구구절절 얘기하는 거야. 어차피 사이즈 교환 가능하다고 해도 그냥 막무가내로 계속.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냥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간간이, 속상하셨겠다고 추임새 넣어준 것밖에 없거든. 그런데 글쎄 그 손님이 나더러 너무 친절하다고 그러잖아? 얘기 들어줘서 너무 고맙대.”

전에, 지연은 일터에서의 일을 시시콜콜 늘어놓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규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골목 안쪽의 고시원 건물에 도착했다. 일층엔 건강보조식품 판매점이, 이층엔 당구장이 있는 건물이었다. 택시비는 지연이 빠르게 치렀다. 건물 앞에서 민규는 지연에게 이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될까. 지연은 말끝을 흐렸다.

“하던 일을 덮어두고 오기는 했어.”

지연은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민규는 거기 선 채로, 그녀를 배웅했다. 지연에게 절룩거리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짐이라고는 당장 입을 옷가지 몇개와 병원생활에서 얻은 자질구레한 짐들이 든 쇼핑백 하나가 전부였다. 짐을 내려놓고서 그는 곧바로 사고 직전에 살던 집에 찾아가보았다. 사장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요원했다. 지하철역까지 시험 삼아 걸어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왼쪽 무릎에 규칙적으로 힘이 빠졌다. 자신의 몸이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서 이렇게 거리를 걷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유롭다는 마음도, 바깥공기가 달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걱정과 불안들이 그의 머릿속을 짓눌렀다.

예전에 살던 때처럼 로비에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복을 입은 젊은 경비업체 직원이 단번에 그를 제지했다. 이곳에 거주하던 때는 한번도 당해보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