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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9회

   방명원 선생님이 말했다.
   “제가 출판이나 기금에 대해 너무 무지했네요. 지원금을 받을 때 좀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무척 낙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실은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유학생활이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경제적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막막한 상태였죠. 각산재단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거의 물에 빠졌다가 구출된 기분이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요. 깊이 생각하고 따져볼 여유가 없었어요. 재단 쪽에서 보기에는 감지덕지하며 받아가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죠. 제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습니다.”
   혼자서 해결책을 찾아 분투했을 그를 생각하니 파트너로서 임무를 방기한 듯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부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속을 끓였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만 지금껏 아무런 응답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묵묵부답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돈 때문에 힘을 내서 논문을 마칠 수 있었으니 제가 감사해야죠. 다만 제 어리석음 때문에 푸른서재에까지 폐를 끼치게 되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조심스레 통화 내용을 부장님께 전했다. 지원금을 돌려주겠다고까지 이야기했으나 거부당했고, 이제 우리 쪽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와다 켄이찌 건도 끝이 났으니, 이제 이 문제를 매듭지어 줄 차례라고 말한다 해도 내게 성격이 급하다고는 할 수 없을 터였다.
   “그것 참 곤란하게 하네.”
   부장님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알겠다는 듯 에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조용하지만 분주한 오후의 일과가 시작되었을 때, 부장님이 전화를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툼한 다이어리와 펜을 챙기다가 문득 생각난 듯 내 쪽을 쳐다보았다.
   몇분 후에 내 책상의 전화벨이 울렸다.
   “지향씨, 방명원 선생 원고 들고 대표님 방으로 올라와봐. 지금 바로 와.”
   부장님의 목소리였다.

 

*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나는 첫번째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던 두툼한 교정지 뭉치를 꺼냈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적힌, 내가 초교를 본 파란색 글씨들이 마음에 걸렸다. 이걸 고스란히, 마음의 준비도 없이 대표님이 보시게 되는 것이다. 혹시 내가 교정본 내용이 바보 같으면 어떡하지. 대표님이 종이를 손에 들고 버럭 화를 내면서 나를 나무라는 모습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내가 시험을 치르게 된 거지. 당황스러웠다.
   3층에 올라갔을 때, 대표님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부장님이 서 있었다. 부장님이 내 손에서 원고를 받아 들더니 책상 가운데 빈 공간에 내려놓았다.
   대표님은 벗어두었던 안경을 쓰더니 교정지를 한장 한장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파란색 글씨에 머무를 때는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5분의 1쯤 원고를 읽던 그가 교정지를 덮고 말했다.
   “원고가 별로네. 이 사람 왜 글을 이렇게 써?”
   지극히 무심한 말투였는데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사를 받는 사람처럼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서 있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글이 별로여서 안 되겠어.”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고는 원고를 부장님 쪽으로 밀어두었다.
   “지향씨, 먼저 내려가 있어.”
   부장님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 교정지를 껴안고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부장님이 회의실에서 나를 호출했다. 나는 다시 교정지를 들고 회의실로 갔다. 커다란 테이블 끄트머리에 부장님이 앉아 있었다.
   “대표님이 글이 별로라고 책을 못 내겠다고 하시네.”
   나는 부장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제야 뭔가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의 의견이나 기분을 완전히 배제한 채.
   “게다가 원고를 받아서 조판을 하고, 초교를 본 건 우리로서는 인력을 들인 것이고 그 일의 댓가로 월급이 나가는 건데 그 비용도 선생님이 보상을 하셔야 할 것 같아. 이런 얘기까지 지향씨가 직접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알고 있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가슴이 조여 들었다. 이렇게까지 될 일이었나? 나는 좀 늦어지고 잡음과 불화가 있을지라도 결국은 해결책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번에도 너무 순진했던 걸까? 상대방에게 귀책사유가 있다 해도 이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게 부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리석은 탓에 세상이 돌아가는 엄연한 룰을 잘 모르는 것인지. 나는 누군가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두 팔에 힘을 주어 교정지를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