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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46회

하영은 학기 초에 은주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개학 첫날, 하영은 실내화를 갈아 신다가 자신의 것과 똑같은 신발이 신발장에 있는 것을 보았다. 16번 칸에 있었다. 누구일까? 그 신발은 하영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것이었는데, 친구들이 즐겨 신는 유명 브랜드가 아니어서 같은 신발을 신은 아이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안 해보았다. 그래서 하영은 16번 학생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은주는 그 신발을 집 앞에 있는 작은 옷가게에서 샀다고 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초록색 티셔츠가 예뻐서 들어갔다가 발견한 신발이라고 은주는 말했다. 짝수 날은 은주가, 홀수 날은 하영이가, 운동화를 신기로 약속했다. 은주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출장을 갔다가 그 건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추락사를 했는데, 그날 밤 뉴스에도 나왔다고 은주는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저장 강박증 환자가 되었다고 하영에게 고백했다. 집에 쓰레기가 얼마나 쌓였는지 나중에는 동생하고 식탁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는 은주의 말에 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우리 아빠는 집을 나갔어. 이 세상이 싫다며 산속으로 들어가버렸어. 그 말은 들은 은주가 그런 사람들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어, 하고 대꾸했다. 산속에서 움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영어사전이나 백과사전 따위만 들여다보는 사람들. 시꺼멓게 그을린 냄비 하나로 밥을 해 먹는 사람들. 은주는 그런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 말이야. 상처받은 남자들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상처받은 여자들은 쓰레기를 모아. 다 그런 건 아닌데 대체로 그래. 그날 은주는 하영에게 떡볶이를 사주었다. 참, 우리 엄마는 이젠 안 그래. 다 나았어. 집도 깨끗하고. 하지만 다른 아이들한테는 비밀이야. 은주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 아버지 얘기도 비밀이야, 하고 말했다. 은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날부터였다. 하영은 이상하게도 은주에게만은 불행한 것들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하영은 불행한 이야기를 지어낼 때마다 그게 진짜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한 희열이 느껴져서 멈출 수가 없었다. 미진이가 은주를 괴롭힐 때 옆에서 동조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래야 거짓말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서. 형민은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등받이를 올렸다. 그리고 베개를 등에 대주었다. “물 가져다줄까?” 딸이 응, 하고 말했다. 물을 한모금 마실 때 저녁 식사가 배달되었다. 하영은 입맛이 없어서 먹지 않겠다고 했다. 형민은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말했다. “그래야 아빠도 저녁을 먹지. 그리고 기운이 있어야 용기가 생기는 법이야.” 그 말에 하영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뭇국에 밥을 두어숟가락 말아 먹었다. 형민이 젓가락을 들고 하영의 숟가락에 깍두기를 올려주었다. 하영이 싫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국에 만 밥만 반찬 없이 먹었다. 형민은 딸이 남긴 밥을 먹었다. 감자어묵조림과 깍두기와 꽈리고추볶음이었다. 그걸 다 먹으니 어느 보호자가 커피를 타서 병실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걸 마신 다음 형민은 옆 침대 할머니에게 물티슈를 빌려 딸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내 딸이 저녁을 조금 먹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니 올 때 딸이 좋아하는 것을 사오라고. 물티슈랑 종이컵도 필요하다고.

형민은 딸에게 자전거 브레이크가 일곱번이나 고장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리막길에서 전봇대를 박기도 했대. 그때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해. 내 인생도 이렇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내리막길을 달리겠구나, 하고.” 형민은 사회자가 보여준 이마의 상처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기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사람은 자전거 사고로 이마에 흉터가 생겼지. 해리 포터처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브레이크를 고장 낸 사람이 친구였다고 해. 자신이 말더듬이라고 놀리던 친구.” 그 이야기를 듣던 딸이 형민에게 물었다. “아빠 이야기야?” 형민은 다시 한번 자신의 이마를 딸에게 보여주었다. 딸이 손을 뻗어 형민의 이마를 만졌다. 형민은 딸이 자전거 사고를 당한 사람이 아버지라고 믿도록 그냥 두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불행해질 때마다 거울로 그 상처를 들여다본대.” 그 말에 하영이 눈물을 흘렸다. 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었다. 그리고 딸이 눈물을 닦을 시간을 주기 위해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비가 오는가 싶어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지만 우산을 쓴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형민은 다시 뒤돌아 딸을 보았다. 수액이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형민은 수액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속도에 맞춰 눈을 깜빡여보았다. “아빠가 고등학생 때 이런 적이 있었어.” 형민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불량배들에게 맞고 있는 친구를 두고 도망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모르는 팝송이 없었다. 집에 LP판이 아주 많았는데, 그래서 카세트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서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했다. 형민도 여러번 선물을 받았다. 그랬는데 그 친구가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있을 때 형민은 못 본 척했다. “그 친구랑 눈이 마주쳤어. 도와줘.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아빠는 무서워서 도망을 갔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다음날 형민은 그 친구에게 편지 한통을 받았다. 거기에는 붉은색으로 비겁자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피로 쓴 글씨였다. 형민은 불량배들보다 그 친구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준 카세트테이프를 버렸다. 내 소중한 친구 형민에게. 테이프마다 그렇게 적혀 있었고, 형민은 버리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볼펜으로 지웠다. “아빠는 그 친구가 무서워서 전학을 가고 싶을 지경이었어.” 그날 밤 형민은 악몽을 꾸었다. 그 친구가 편지를 들고 형민을 계속 따라오는 꿈이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형민은 비슷한 악몽을 반복해서 꾸었다. 항상 다른 사건이 벌어졌지만 마지막에 비겁자라는 편지를 받으면서 끝나는 것은 똑같았다. 형민은 그 악몽을 떨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편지를 받았을 때 그때 형민은 말을 했어야 했다. 미안하다고. 비겁해서 미안하다고. “마지막으로 그 꿈을 꾼 건 언제였어?” 형민의 딸이 물었다. “어젯밤에.” 형민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