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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47회

형민의 아내는 조각케이크를 사왔다. 아내가 집에 가서 쉬라고 말을 했지만 형민은 병실에 남아 있고 싶었다. “여기에서 둘이 밤을 새울 수는 없어. 그리고 애가 화장실 가고 싶으면 당신이 따라갈 거야?” 형민의 딸은 혼자 있고 싶다며 둘 다 집에 가서 쉬라고 말했다. “제발. 엄마도 집에 가. 화장실은 나 혼자 갈 수 있어.” 형민의 아내는 팔짱을 끼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신 이 케이크 다 먹어야 해. 저녁에 잠도 푹 자고.” 형민의 딸이 조각케이크를 먹었다. 남김없이.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부모님을 봤다. 이제 됐어? 하는 표정이었다. 형민은 아내와 병실을 나왔다. “왜 애를 혼자 두는 거야?”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형민이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중학생 때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거든.” 형민의 아내는 중학교 2학년 때 맹장수술을 했다. 맹장이 터지는 바람에 응급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끝나고 의사가 며칠 동안 고통이 상당히 심했을 텐데 어떻게 참았느냐고 물었다. 형민의 아내는 맹장수술을 하기 일주일 전에 친척 결혼식에 가서 뷔페를 먹었다. 즉석에서 LA갈비를 구워주어서 동생이랑 갈비를 세접시나 먹었다. 수타면으로 짜장면을 만들어주는 코너도 있었다. 그렇게 고급 뷔페는 처음이었고 그래서 과식을 했다. 그날 저녁 형민의 아내는 설사를 했다.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약국에도 가지 않았다. “차라리 배가 아픈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형민의 아내와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둘은 전학 가기 전 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싸구려 반지를 사서 끼웠다. 우리 매일매일 편지하자.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형민의 아내가 열한통의 엽서를 보내는 동안 단 한통의 답장도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반지를 낀 부분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형민의 아내는 반지를 빼서 학교 운동장에 파묻었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아버지가 전과자이고 오빠도 깡패라는 소문이 도는 아이였다. 형민의 아내는 원래 그 아이를 싫어했는데, 소문 때문이 아니라 앉고 일어설 때마다 소란스럽게 의자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반지를 운동장에 파묻고 며칠 후에 부반장이 지갑을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들 그 아이를 의심했다. 그걸 눈치챈 아이가 교탁 앞으로 가더니 자신의 가방을 거꾸로 들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쏟았다. 어디 봐, 지갑이 있나 보라고. 씨발년들아. 그 아이가 소리쳤다. 하굣길에 형민의 아내는 그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아이랑 같이 어울리게 되었어.” 형민의 아내는 수업이 끝나면 그 아이네 집에 가서 만화책을 보았다. 그 집은 아주 지저분했는데, 만화책이 늘 방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깡패라고 소문이 난 그 애의 오빠가 들어와 욕을 했다. 미친년들이라고. 그러면 그 애도 오빠에게 욕을 했다. 미친놈이라고. “그건 어릴 때 문방구 앞에서 불량식품을 몰래 사 먹던 것과는 질이 달랐어. 나도 나쁜 아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그러다 형민의 아내는 부반장이 잃어버렸다는 지갑을 그 아이 집에서 발견했다. 지갑은 책상 아래에 있던 운동화 박스 안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반장의 것 말고도 다른 아이의 것으로 짐작되는 지갑들이 서너개 더 들어 있었다. 그걸 본 뒤로 형민의 아내는 그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아파서 앞으로는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배가 아프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했거든.” 형민의 아내가 형민보고 차에 타라고 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형민은 조수석에 앉았다. 시동이 한번에 걸리지 않았다. “손봐야겠다.” 형민이 말하자 아내가 대답했다. “손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까봐, 그래서 정비소를 못 가겠어.”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형민의 아내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때, 나흘을 입원했는데 할머니가 아프셔서 엄마가 하루 못 왔거든. 혼자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가 침대로 돌아오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고. 그래서 울었어.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누워서. 내 울음소리에 병실에 입원한 사람들이 다 깼어. 어느 아주머니가 말했지. 엄마가 없어서 그래? 그래서 내가 말했어. 그런 게 아니라고.” 형민의 아내는 지금도 그때 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 병실에서 밤을 보내고 나니까 다음날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고. 형민은 그래도 하영이가 혼자 병실에서 우는 것은 상상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냥 꿈 한번 꾸지 않고 푹 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형민의 딸은 형민의 생각과 달리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간호사가 약을 가져다주었는데, 하영은 혓바닥 아래에 알약을 감추는 환자가 나오는 어느 드라마를 떠올려보았다. 그걸 흉내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약을 먹었다. 어느 간병인 아주머니가 도와주어서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 왔다. 그리고 두시간 정도 잠을 잤다가 깼다. 누군가 코 고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렸다. 하영은 병원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다쳤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쳤으니 됐지. 그건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우기고 싶었다. 하영은 깁스를 한 팔을 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꼬집어보았다. 열세살 무렵에 하영은 잠깐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옆집에 노부부가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아령 두개를 들고 복도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하영에게 잔소리를 했다. 공부해서 효도해라. 하영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할아버지 자식들은 공부해서 효도했어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옆집 할머니는 누군가 부축을 해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날이 쇠약해지는데, 할아버지는 점점 젊어졌다. 하영은 그게 징그러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이 아파트는 싫다고. 구질구질맞다고. 옆집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까지 들린다고. 하영의 엄마가 하영에게 한소리를 했다. 이딴 구질구질한 집을 사기 위해 엄마 아빠는 더 구질구질맞게 살았다고. 하영은 아침도 안 먹고 도서관에 간다며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낯선 도시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를 타면서 몇시간을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네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네시간 후 하영은 낯선 버스터미널에서 김밥을 사 먹었다. 김밥이 너무 맛이 없어서 화가 났다. 이렇게 김밥이 맛이 없는 도시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영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차가 막혀 다섯시간이 걸렸고, 중간에 휴게실에서 알감자를 사 먹었다. 뜨거워서 혓바닥을 데었다. 쌤통이다. 하영은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엄마는 없었다. 방에 들어가보니 도배가 새로 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이런 쪽지가 적혀 있었다. 니 방만이라도 구질구질하지 않게 새로 도배했어. 저녁에 피자 사 먹어. 하영은 잠을 자고 있는 환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간이침대에서 쪼그려 잠을 자는 보호자들을 보았다. 구질구질해.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이 잠에서 깰까봐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하영이 그 꿈을 꾸던 그 시간에 형민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