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희 黃聖喜

1972년 경북 안동 출생. 200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앨리스네 집』 『4를 지키려는 노력』 등이 있음. hsh7213@hanmail.net

 

 

 

시간의 능력

 

 

베란다로 간다

세탁기 위에 두루마리 휴지가 쌓여 있다

휴지 하나를 꺼내 욕실 휴지걸이에 끼운다

날이 흐리다 그리고 나는 어제처럼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채로 소파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 속 디자이너들이 새 옷을 만들고 있다

자신의 딸을 걱정하느라 어머니는 점점 미쳐간다

딸의 아버지는 경쟁사 몰래 디자인을 훔친다

한순간을 이해하는 동안 한순간이 흘러간다

채널을 돌린다 나는 곧 다른 나라의 일로 분개한다

몇만 킬로 떨어진 상공에서 벌어진 폭파사건이었다

목적도 결과도 터져버렸다 시간 말고는 모두 추락했다

킬러의 심리를 분석하는 동안 또 한순간이 흐른다

나는 식탁 위에 놓아둔 칫솔을 찾고 있다

칫솔은 변기 뚜껑 위에 놓여 있다

오줌을 누러 갔다가 알게 된 사건의 전말이다

한순간이 흘렀고 나는 정오 너머로 밀려났다

배가 고팠다 시간 말고는 모두 배가 고팠다

 

 

 

산만한 국민

 

 

냉장고에 기댄 채 밤새 딴짓을 한다

왜 여기 모여 함께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모든 것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때때로 실존은 현실에 대한 직무유기가 된다

한 대통령의 몰락 옆에서 나는 딴짓을 한다

파란만장했던 일가의 파국에 집중하지 못한다

몰락은 존재 말고 행동을 원할지 모른다

행동은 유보당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파국은 명분을 만드느라 창피할 틈이 없다

냉장고는 반찬 냄새 섞인 냉기가 경멸스럽다

실존은 딴짓을 들킬까봐 오래 숨죽이고 살았다

대답이 뻔한 삶을 궁금해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뻔한 대답을 가진 삶을 이해 못하는 게 두려웠다

새벽에 축구중계를 틀어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현실과 실존이 심장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좁은 어깨는 오직 시간의 방향으로만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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