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저 깊은 다정과 치열

 

 

정지아 鄭智我

소설가.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르뽀집 『벼랑 위의 꿈들』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인생의 본질은 이별에 있다. 떠난 뒤에야 빛났음을 깨닫게 되는 청춘과도, 숨 막히게 사랑했던 연인과도, 피와 살을 준 부모와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키워낸 자식과도 이별하지 않을 재주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시간은 언제나 인간의 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견뎌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늙어간다는 것은 저 자신의 몸과 천천히 이별할 수 있는, 잔인한 신이 인간에게 허한 유일한 선물일지 모른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신은 정미경(鄭美景) 선배에게 유독 잔인했다.

늘 선배가 부러웠다. 멀리서 보는 이에게 그의 삶은 충만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선배를 글로만 만나던 시절, 때로 질투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대학 시절의 뜨거운 연애쯤이야 누구나 경험했을 테지만 그 사랑이 결혼으로 연결된 경우는 흔치 않다. 철없던 시절 만난 남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화가로 성장하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다. 하물며 그 사랑이 세월 앞에서 퇴색되지 않고 외려 숙성하여 진정한 영혼과 예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니. 설마, 그저 세상에 보여진 모습일 테지, 치부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여행에서 만난 선배 부부는 다정하고 편안하고 친밀했다. 막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처럼 요란하게 자신들의 사랑을 과시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란히 서서 그저 바라보고 몇마디 말을 속닥인 정도지만, 그런 두 사람 주변에 세상의 어떤 검으로도 깰 수 없는 사랑의 결계가 쳐져 있는 듯했다. 결혼이라는 하자 많은 제도가 허한 최고의 관계가 아닐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범인(凡人)은 그 세계의 본질에 가닿기 어렵다. 내가 그러했다. 빨치산의 딸로 태어나 독재시대에 성장한 나에게는 단 한번도 편안한 일상의 세계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내게 허락되지 않은 그 세계를 감히 속물의 세계라 손쉽게 비난했고, 아예 엿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이 들면서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선배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자각이 깊어졌다. 결국 선배의 글이 일상을 철저히 배제한 나의 단단한 세계를 무너뜨렸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남도의 가을을 가장 선연하게 알리는 감들이 붉게 익어가던 무렵이었다. 선배와 평사리 토지마을을 걷고 있었다. 담장 밑마다 흐드러진 늙은 호박에도 시들어가는 잎사귀에도 남도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자연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조차 제 안으로 흡수하여 마치 제 것인 듯 천연덕스럽게 우리 앞에 가만히 펼쳐놓았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가, 촌년이었던 우리는 어린 날의 추억 속으로 자맥질하듯 빠져들었다. 이런저런 추억여행을 거쳐 선배의 시댁이 있다는 남원에까지 이야기가 이르렀다. 선배는 시댁의 그 많은 제사를 직접 다 치렀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선배가 일상을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 사람인가를. 그리고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범속하다고 치부하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일상의 본질에 가닿지 않은 자가 그 세계를 뛰어넘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으며 오만한 것인가를.

선배의 영원한 동반자였던 김병종(金炳宗) 화백은 결혼한 뒤에도 평생 아내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었다고 한다. 선배의 음식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김화백이 원한 게 설마 맛있는 밥만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가 진짜 원했던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소박하고 정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공간을 감싸고 있었을 충만한 사랑이 부러움과 동시에 그런 충만한 사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는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냈다. 선배는 등단한 뒤에도 남편과 아들 둘의 도시락까지 다 싸준 뒤에 작업실로 향했다고 한다. 하루 세끼 밥을 차리는 일의 번거로움은 두말해 잔소리다. 오죽하면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가 하루 세끼 집에서 밥 먹는 ‘삼식이’라고 할까. 아마 선배는 즐거이 밥을 차렸을 것이다. 사랑으로만 될 일은 아니다. 범속한 일상사의 숭고한 의미까지 알지 않고는 삼시세끼 즐거이 밥을 차릴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제 한 몸 먹여가며 다독여가며 살아내기도 어렵다. 하물며 가족이야. 나로 인해 세상에 온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고,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고, 그렇게 서로 다독이며 견뎌내라는 것이 일상사의 의미라고, 나는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생각했다. 때로는 일상을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도 온다. 그러나 일상을 부정하고서는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건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파괴다. 소소한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혁명의 실패를 우리는 여러차례 경험했다.

선배는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았다. 게다가 그 일상에 안주하지 않았다. 가는 그날까지 자기가 속한 세계의 다양한 층위에 관심을 가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런 삶들을 문학의 지평 위에 펼쳐놓았다. 선배는 자신이 출발한 지점부터 최선을 다해 다른 층위의 삶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선배와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였다. 혼자 사라졌던 선배가 나타났을 때 누군가 물었다.

“자기, 어디 갔다 왔어?”

선배는 다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냥 저기……”

그래서 다들 별일 아닌 일로 집요하게 캐물었다. 대체 어디 다녀왔느냐고. 그러자 선배가 슬그머니 뒤에 감추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유 그래. 샀어요, 샀어.”

그 안에 든 것은 명품이라기에는 가격대가 낮지만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외국의 신진 브랜드 핸드백이었다. 다들 핸드백을 구경하면서 웃고 지나쳤다. 사소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선배의 부고를 듣고 가장 먼저 그 장면이 떠올랐다. 예쁜 소품에 대한 여성다운 호기심을 잃지 않은 선배, 그닥 비싸지도 않은, 자신의 형편에 비하자면 소박했을 핸드백 하나를 사면서도 그조차 사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을 버릴 수 없는 선배, 그러면서도 솔직한 선배, 그 솔직함을 과하지 않게 여성스럽게 귀엽게 표현할 줄 아는 선배, 나는 그 모든 점이 다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선배의 소설이기도 했다.

김병종 화백은 한 인터뷰에서 선배의 소설이 저평가된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선배의 글에 단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선배는 가족을 위해 정갈한 삼시세끼를 차려냈듯 독자들 앞에 늘 정갈한 소설을 내놓았다. 문단이 어떻게 평가하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선배의 문학적 재능을 백 퍼센트 신뢰하는 굳건한 예술적 동지가 든든하게 곁을 지켜준 것도 한몫했을 테지만 선배는 아마 자기가 엿본 세계를 제대로 형상화하지 않고는 스스로 배기지 못하는, 일종의 완벽주의자였을 것 같다. 때로 같은 언저리를 맴돈 적은 있어도 선배의 글이 급해서 함부로 차려낸 밥상 같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선배의 소설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으로 시작해 자본주의의 본질로 나아갔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선배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경제이론서”를 읽었고, “금융용어가 외계어처럼 낯”선 상태에서도 “파생금융의 지존 L(『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작가의 말, 2005)로부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웠다. 선배는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하고 체화하는 데 능한 작가였다. 지난해 이효석문학상을 심사하면서 선배의 소설 「못」을, 외람되지만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미경 소설엔 언제나 ‘오늘’이 있고, 그 오늘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맞닿아 있다. 욕망의 끈을 붙들고 추락하는 남자와 추락할 것을 알기에 욕망하지 않으려는 여자의 쓸쓸한 삶을 정교한 언어로 직조한 수작이다.”

나는 선배만큼 자본주의의 본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한 작가가 최근의 한국문학에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가 압도하는 소설은 아니었다. 선배는 이데올로기를 현실의 삶으로 끌어들여 생생한 피와 살을 부여할 줄 아는 작가였다.

문학상이라는 것이 소설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평가는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 흔하듯 문학상 또한 대중성이라든가 기타 등등의 이유로 좋은 작품을 놓치는 일도 흔하다. 선배는 2006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로 한동안 상을 받지 못했다. 마지막 문학상이 하필이면 죽음을 목전에 둔 지난 12월이었다. 그러나 문학상 후보로는 그 누구보다 자주 거론되었다. 선배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주로 너무 정통적이다, 형식적 새로움이 없다,는 평가였다. 나는 그런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정통적이라는 것은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거나 새로움의 부재라는 의미로 읽힌다. 정통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우리가 어디로 나아갈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므로 아마 새로움의 부재를 의미하는 걸 거라 추측한다. 그러나 정통성을 형식적 새로움으로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이의 새로움도 있다. 깊이의 새로움이라면 선배만한 작가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깊이의 새로움은 늘 외면당해왔다. 할 말은 많지만 선배의 죽음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선배가 떠난 날에도 텔레비전은 블랙리스트니 뭐니로 시끄러웠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촛불정국이 어쩌면 선배의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드는,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그래서 선배의 작품은 남편의 바람대로 훗날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숙연히 생각했다.

선배는 가족과의 관계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소설가 아무개는 그들 속에 흡수되어버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경계가 무뎌지고 세 사람의 ‘쟁이’들 속으로 흡수되어버리는 그 느낌이 나는 좋다. 팔자일까, 운명일까.”*

선배의 따스하고 치열했던 삶은 이미 그가 사랑했던 가족들의 삶 속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다. 흡수된 그는 떠났어도 떠난 게 아니다. 선배의 삶은 가족들에게로만 흡수된 게 아니다. 소설 속으로도 흡수되었고, 그가 남긴 소설의 인물들 속으로도 흡수되었다. 그가 치열하게 살아냈던 일상의 작은 한 조각까지도. 그러니 덧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이런 말이 허락될지 모르겠지만 지난겨울 한달간 자신의 죽음과 매일 직면했을 선배가 지나간 삶을 후회하거나 다가오는 죽음을 안타까워했을 것 같지 않다. 김병종 화백은 “사력을 다해 아내를 살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선배는 홀로 남아야 할 남편이 가장 안타깝지 않았을까? 사랑과 신뢰가 컸던 만큼 남은 이의 외로움과 슬픔도 크다. 선배가 주고 간 크고 깊고 다정한 사랑으로 부디 잘 견디시기를.

 

 

* 「[조용호의 나마스테!] “새하얀 눈 맞으며 떠난 아내… ‘문학적 삶’ 연장이 나의 숙제”」, 세계일보 201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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