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지속인가 생태적 전환인가

 

 

이필렬 李必烈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과학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저서로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등이 있음. prlee@energyvision.org

 

 

1. 원자력발전, 끈질긴 근대적 욕망

 

작년 12월,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계획을 좌절시킨 부안주민들이 그동안의 운동을 마무리하는 성격의 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서 부안을 에너지 전환의 중심으로 만들자는 발표를 하던 나에게 뜻밖의 질문이 던져졌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나의 ‘모호한’ 입장에 대해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해 11월 원자력노조 대의원대회에서 행한 강연을 겨냥한 것으로, 질문에서 문제삼은 내용은 현재 건설중이거나 건설계획이 확정된 원자력발전소까지는 완공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제안의 무게중심은 원자력발전소의 확대가 아니라 숫자를 명확하게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럼으로써 마지막에 완공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끝나는 2050년경에는 원자력발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자에게 이 점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은 악한 것이고 우리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것이므로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데 어떻게 원자력발전 확대에 동의하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을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구분할 때, 원자력발전이 나쁜 쪽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준 원자폭탄의 후속 발명품으로서, 현세대뿐 아니라 수백 수천년 후의 후손에게까지 방사능의 해를 끼칠 수 있는 원자력발전이 좋은 과학기술에 속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원자력발전에 대해 반대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현실은 무조건의 반대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그것은 원자력발전이 이미 우리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의 거의 절반이 원자력발전에서 생산되는 상황, 당장 원자력발전이 사라지면 우리 생활이 대부분 마비되는 이 상황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생태적 감수성이 강한 사람이라면 지금도 계속 쏟아지는 핵폐기물과 먼 훗날 그것을 감당해야 할 우리 후손을 생각할 때,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체르노빌 사고로 각종 암에 걸려 고통받는 우끄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어린이들만 생각해도 가슴속에 커다란 고통을 느낄 것이고, 원자력발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옆에 있으면 영혼이 상한다는 생각은 원전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과 후손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긴 것으로서 경청할 만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생각으로 반대만 한다고 해서 원자력발전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나 덴마크와 같이 원자력발전을 시작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국민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그러한 견해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이딸리아나 네덜란드처럼 원자력발전소가 서너 개 정도 돌아가는 경우에도 그러한 믿음에 기반한 반대운동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원자력발전이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 나라는 국민투표를 거쳐 원자력발전을 하지 않거나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반면에 원자력발전이 전체 전기의 상당부분을 공급하고 국가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웨덴과 독일에서는 오랜 논쟁을 통해 상세한 점진적 원자력 포기계획이 수립되고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원자력발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에 가려서 그 특징이 부각되지 않지만, 원자력발전은 근대의 양면을 아주 잘 드러내는 기술이다. 그것은 상대성이론과 핵분열 발견이라는 근대의 뛰어난 과학이론과 실험의 산물이자 자연에서 끊임없이 노다지를 캐내서 (또는 자연의 한계로부터 해방되어)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근대적 욕망의 산물이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희망의 원리』에서 이제 인류가 원자력으로 시베리아와 사하라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열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원자력발전은 근대를 완수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한 도구로 여겨졌던 것이다. 원자력은 무한의 에너지를 공급할 것처럼 보였고, 자연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원자력발전은 전세계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전기를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은 체르노빌이라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사고와 처치불능의 핵폐기물도 쏟아냈다. 밝은 면에 가려져 있던 짙은 어둠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근대 완수의 희망이 헛된 것임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블로흐 식의 열광은 식지 않았다. 대상이 원자력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원자력에 대한 블로흐의 기대가 헛된 것임이 판명되었는데도 인간배아복제, 생명공학, 유비쿼터스, 나노기술에 대해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근대적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보여준다.

 

 

2.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인 원자력발전은 근대가 극복되어야 하듯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우 원자력발전에 너무 깊이 적응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하게 폐쇄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칫 커다란 혼돈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돈이란 전기공급의 혼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자력발전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혼란, 방황, 원망도 포함하고, 원자력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받는 모든 사람과 체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기술적인 대안을 담은 비전을 제시하고 이 비전의 현실성을 증명하면서 원자력발전을 밀어내야만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원자력발전이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바로 지금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자는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당장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자는 주장으로 들릴 위험이 있고, 사람들에 대한 설득을 더 어렵게 만듦으로써 원자력발전의 극복을 더 멀리 밀어놓는 결과를 가져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