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175_466

정희정 鄭熙晶

서울예대 공연창작·극작과 4학년. 1992년생.

gml_wjd71@naver.com

 

 

 

명주

 

인물

명주, 아빠, 엄마, 남자, 아들

 

현대

 

장소

어느 아파트, 보통의 거실.

오른쪽에 부엌이 보이고, 그 옆으로 명주의 방문이 있다.

뒤쪽으론 안방 문이 보이고, 왼쪽에는 현관문이 있다.

 

 

1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명주, 방에서 나와 불을 켠다.

아빠의 등이 보인다.

 

명주 아빠 또 울어?

아빠 불 꺼. 쪽팔리니까.

 

명주, 거실 불을 끄고 부엌 불을 켠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연다.

 

명주 나도 나이가 드나. 잠이 안 와.

아빠 맨 밑에 봐봐. 소주 있어.

 

명주,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낸다.

 

명주 반밖에 없네.

아빠 아껴둔 거야. 너니까 주는 거지.

명주 와. 같이 마셔.

아빠 그걸 누구 코에 붙여. 너 다 해.

 

명주, 컵을 가지고 식탁에 앉는다.

컵에 모두 따라 붓는다.

한모금 삼킨다.

 

아빠 두번째 칸에 땅콩 있어.

 

 

명주, 일어나서 다시 냉장고를 연다.

명주 아빠도 좀 줄까?

아빠 됐어.

 

명주, 땅콩을 한줌 집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명주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빠 아니, 없어.

명주 근데 왜 또 그러고 있어.

아빠 그냥 같은 이유지, 뭐…… 누가 들으면 맨날 청승맞게 이러고 있는 줄 알겠다.

명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아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어떻게 이 집 공사한 새끼랑…… 날 무시하는 거야. 진짜, 자다 깨서 너희 엄마 얼굴만 보면 미치겠어. 밟고 싶어.

 

명주, 입에 땅콩을 털어 넣는다.

 

명주 괜찮아. 요즘에는 애인 없으면 바보래.

아빠 그래서 나도 애인을 만들라는 거야, 뭐야.

명주 못할 것도 없지.

아빠 난 못해.

명주 그래. 못하지. 아빤 못해. 아빠가 못하는 게 문제지.

아빠 그게 왜 또 내 문제야.

 

잠시.

아빠, 녹음기를 흔들어 보인다.

 

아빠 들어볼래?

명주 뭔데?

아빠 혹시나 해서, 너희 엄마 차 밑에 몰래 넣어뒀던 거야.

명주 어떻게 또 그런 생각을 했대.

아빠 샀어. 쉬워. 이거 빨간 것만 눌렀다가 끄면 돼. 들어볼래?

명주 (보다가) 아니, 나중에.

 

아빠, 다시 등을 보이고 앉는다.

녹음기를 보며 훌쩍거린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명주를 바라본다.

 

아빠 다 죽여버릴까?

 

명주, 아빠를 보다가 소주병을 흔든다.

 

명주 이거 줘?

 

아빠, 소주병을 한참 바라보더니 명주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다 멈춰서 안방 문을 바라본다. 안방으로 다가가려는데.

명주 어디 가? 괜히 지금 들어가서 엄마 또 때리지 말고.

 

아빠, 다시 명주에게 다가와 병을 받아들려고 하자,

명주, 병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명주 진짜?

아빠 응. 그 새끼 죽여버릴 거야.

명주 그다음엔?

아빠 자수할 거야.

명주 속 편한 소리 하네.

아빠 진짜. 이제 무서운 게 별로 없어졌어. 남들이 뭐라고 하는 거보다 내가 진짜 어떻게 될까봐 무서워서 더는 안 되겠어. 지금은 내가 제일 무서워.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명주 ……그다음은?

아빠 없어. 없다고 생각하려고.

 

명주, 아빠를 보다가 자신의 옷에 병을 문지른다.

 

명주 내 지문 묻어 있잖아.

 

명주, 옷에 감싼 채로 병을 내밀면,

아빠, 받아든다.

아빠, 식탁 위에 있는 잔을 들어, 남아 있던 술을 한숨에 털어 넣는다.

 

명주 땅콩 줘?

 

아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곤 신발장 앞으로 가서 신발을 꺼내어 신는다.

 

아빠 그래, 나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 집 나간 아버지 어머니 잘 견디면서 살았다고.

명주 그 정도는 다 견디며 살더라, 요즘.

아빠 그러냐.

명주 응.

 

아빠, 신발 다 신자 일어나 명주를 본다.

 

아빠 너도 이 정도는 잘 견딜 수 있지? 이제 다 컸잖아.

명주 그런가.

아빠 내가 다 키웠어. 클 때까지 기다렸어.

명주 생색내는 거야?

아빠 응. 그래도 너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 속은 좀 풀린다. 내가 이런 이야기 쪽팔려서 어디다 하겠냐. 밖에서는 카리스만데.

명주 그래. 다행이네.

 

아빠, 웃으며 나가려는데,

 

명주 아빠.

 

아빠, 돌아본다.

 

명주 올 때 소주 한병 더 사와.

 

아빠, 명주를 보다가,

 

아빠 그래.

 

아빠, 웃으며 병을 흔든다.

 

아빠 갔다 올게.

 

아빠, 밖으로 나간다.

명주, 식탁 위에 아빠가 놓고 간 녹음기를 발견한다.

쥐어본다. 주머니에 넣는다.

명주, 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워진다.

 

 

2

 

어두운 거실.

안방 문이 열린다.

엄마, 큰 가방을 여러개 들고 나와 현관문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곤 이것저것을 꺼내 가방에 넣는다.

명주, 방에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본다.

 

명주 어디 가?

명주, 불을 켠다.

엄마는 명주를 발견한다.

 

엄마 집에.

명주 여기가 집인데, 어떻게 집을 가.

엄마 다른 집에.

 

명주, 식탁에 앉아서 엄마가 짐 챙기는 것을 바라본다.

 

엄마 왜 일찍 깼어. 들어가서 더 자.

명주 잠이 안 와.

엄마 들어가서 눈이라도 더 감고 있어봐. 너가 깨니까 내가 나가기 민망해지잖아.

명주 뭐 어때. 다 큰 딸 두고 나가는 건데.

 

엄마, 명주를 보다가,

 

엄마 그건 그래.

 

다시 짐을 챙긴다.

 

명주 누구한테 가는 거야?

엄마 그게 뭐가 중요해.

명주 어제 왔던 사람?

엄마 봤어?

명주 아니. 어제 현관에 못 보던 신발 있길래.

엄마 맞아. 그 사람이야. 용서했어, 내가.

명주 뭘?

엄마 집에 있던 반지를 다 가져갔었잖아.

 

명주, 말없이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 말 안 했었나. 너 돌반지도 다 가져갔었는데.

명주 돌려받았어?

엄마 아니. 다 팔아버렸대.

명주 그럼?

엄마 그래서 용서했지.

명주 왜?

엄마 이미 없는 걸 어떻게 해.

명주 그래도.

엄마 아, 거기 결혼반지도 있었다. 내가 그건 잘했다고 했어.

명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지. 사람 좀 잘 만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만나니까 그렇지 뭐.

엄마 그놈이 다 그놈이야. 집에 있는 걸 들고 나가거나, 아니면 때리거나. 나는 두놈 다 만나봤네.

 

엄마, 한참 짐을 보다가 명주를 본다.

 

엄마 그래도 꾹 참다가, 너 좀 크고 지금 나가는 게 어디야. 안 그래?

명주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엄마 아니, 생각해보니까 한번 나가다가 걸리긴 했었다.

명주 언제?

엄마 너 아주 어렸을 때. 내가 너 데리고 가는데, 네가 하도 웃어서 걸렸잖아. 울면 달래기라도 하는데 웃는 건 달랠 수가 없으니. 내가 그날 얼마나 맞았는지 아냐. 그뒤로 내가 결심했다고. 조금 더 키워서 아예 두고 가자.

명주 고맙네.

엄마 더럽게 빨리 안 크더라.

명주 엄마가 키워준 기억은 없는데.

엄마 너 어렸을 때 기억을 너는 못하니까. 그런 면에서 억울해. 어렸을 때 내가 다 힘들게 버티며 키워놨는데, 기껏해야 네 아빠가 잘해준 것만 기억하니까. 내가 못해준 것만 기억하고.

명주 그건 그래.

엄마 너는 모를 거야. 말도 못하는 상대를 앉혀놓고 우는 기분을.

명주 기억나. 엄마가 자주 했던 말.

 

엄마, 명주 보면,

 

명주 우울해.

엄마 별걸 다 기억하네.

명주 외로워.

엄마 아빠가 되게 싫어했었다. 사람 지겹게 한다고.

 

엄마, 다 정리한 짐을 두고, 자리에 앉는다.

 

명주 지금 안 나가?

엄마 데리러 온대.

명주 이 새벽에?

엄마 응. 네가 깰 줄은 몰랐으니까. 그냥 조금 더 일찍 오라고 해야겠다.

 

엄마, 핸드폰을 꺼내 두드린다.

명주, 엄마를 본다.

 

엄마 그렇게 보지 마. 괜히 불편하게.

 

엄마,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

 

엄마 행복하기 위해서 가는 거다. 너 말고 내가.

명주 알고 있어.

엄마 서운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나 지금까지 잘 견뎠잖아.

 

명주, 엄마를 가만히 보다가,

 

명주 나도 조금씩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

엄마 뭔데.

명주 엄마가 방에서 너무 안 나온다. 아마 엄마가 죽은 것 같다. 일기에 그렇게 썼다가 불려갔던 적도 있어.

엄마 언제?

명주 초등학교 때. 그땐 일기는 나만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지. 엄마는 속옷 차림으로 있는 적이 많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엄마가 세수하다가 갑자기 비누를 바닥에 던졌고, 내 생각엔 아마도 엄마가 미친 것 같다고도 썼었어.

엄마 너는, 사람 창피하게.

명주 나 지금 엄마 잘 견뎠다고 칭찬하고 있는 거야.

엄마 어디가 칭찬이니.

명주 요즘 엄마들은, 애가 아무리 어려도 바닥에 던지고, 때려서 죽이기도 하잖아. 화를 못 참아서.

엄마 그건 내가 칭찬받을 일 아닌 것 같은데.

명주 왜. 그래도 엄마는 날 바닥에 던지지는 않았잖아.

엄마 미안한데, 나도 너 몇번 던졌어. 안 울어서, 그것도 실컷. 너는 어째 잘 울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멀뚱멀뚱 봤어, 나를.

명주 그랬어?

엄마 응. 오히려 보고 웃었어.

 

엄마, 가만있다가,

 

엄마 맞아, 생각해보면 너는 별로 울지도 않았던 것 같아.

명주 그래?

엄마 응. 아주 어렸을 때는 너무 울어서 걱정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지 넘어져도 별로 울지도 않고, 눈 밑에 찢어진 그거, 상처 날 때도 너 안 울었어.

명주 엄마가 더 울었던 거 아니야?

엄마 맞아. 내가 더 울긴 했지.

명주 그래서 내가 울기 민망했나봐.

 

명주, 자리에서 일어난다.

 

명주 언제 온대? 밥 안 먹고 갈래?

엄마 이 새벽에 무슨 밥이야.

명주 그래도……

엄마 난 됐어. 괜찮아. 나 그만 갈래.

명주 아직 안 왔잖아.

엄마 밖에서 기다리는 게 더 속 편할 것 같아서.

명주 더 있다가 가지.

엄마 붙잡는 것 같아서 나가려는 거야.

 

명주, 냉장고를 연다.

 

엄마 내가 몇개 챙겨서 먹을 거 별로 없을 거야. 사다 먹어.

 

엄마, 가방을 든다.

 

엄마 갈게.

명주 엄마.

 

엄마, 가려다가 뒤돈다.

 

엄마 그렇게 부르니까 왜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지냐.

명주 들어줘?

엄마 아니. 그럼 더 무거울 것 같아.

 

엄마, 현관문 앞에 선다.

 

엄마 갈게.

 

엄마, 나간다.

명주, 현관문을 바라본다.

집, 조용하다.

명주, 냉장고를 연다.

그 안을 한참 바라보다 냉장고를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어두워진다.

 

 

3

 

어둠 속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명주, 방에서 나온다. 다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다가가 문을 연다.

남자, 안으로 들어온다. 둘, 가만히 멈춰 선다.

 

남자 조용하네요.

 

둘,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남자 혼자 사신다고……

명주 네.

남자 들어가도 될까요?

 

명주, 고개 끄덕이면

남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다.

 

명주 앉으세요.

 

명주, 부엌으로 가자,

남자, 따라들어와 식탁 맨 끝 쪽 의자에 걸터앉는다.

 

남자 왜 혼자 사세요. 올리신 글에도 별 이야기는 없던 것 같은데.

명주 별 이유가 없어서요.

남자 저도 혼자 살고 있어요.

명주 봤어요. 올리신 글에서.

남자 보셨구나. 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으세요? 별 이야기 다 써놨는데……

명주 별 이야기 없던 것 같은데.

 

명주, 남자에게 차 한잔을 건넨다.

명주, 조금 떨어져 앉는다.

 

남자 꽤 길게 썼는데……

명주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봤어요.

남자 네. 워낙 화가 많으신 분이라서. 술 드시고 홧김에…… 술을 워낙 좋아하셨거든요. 주량이 반병밖에 안 되면서, 그걸 매번 꼭 채워 마시고 들어와서는……

명주 엄말 때리고.

남자 맞아요. 저도 되게 많이 맞았어요. 그래서 저 맷집 되게 세요.

명주 잘 울지도 않아요?

남자 네, 그럼요.

명주 왜요?

남자 그냥, 안 아파요. 아니, 아픈데, 그 정도 아픈 건 괜찮아요. 그래서 그냥 잘 못 울어요. 아, 대답이 조금 이상한가요.

명주 아니요. 이상할 거 없는데.

 

둘, 잠시 말이 없다가,

 

남자 저, 근데 왜 이렇게 만나세요?

명주 이상해요?

남자 아니요. 이상할 거 없죠. 저도 이렇게 만난 건데요 뭐.

명주 글쎄요. 저도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또 이해되는 부분이 있어서. 우선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그래서 금방 질리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했어요.

남자 아, 누구 추천으로 시작하시는 거예요?

명주 네.

남자 친구?

명주 아니요. 엄마요.

 

명주, 남자의 다 마신 컵을 본다.

 

명주 한잔 더 드려요?

남자 아니요. 괜찮습니다.

명주 잠이 잘 온다고 해서 산 찬데. 소용이 없어요.

남자 잘 못 주무시나봐요.

명주 네.

남자 저돈데. 그래서 우리 둘만 이 시간에 깨어 있었나봐요.

명주 한잔하실래요?

 

명주, 냉장고 맨 밑 칸에서 술병을 꺼낸다.

 

남자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빠 닮아서 주량이 작아요.

명주 괜찮아요. 어차피 반병밖에 없어요. 조금씩만 마셔요.

 

명주, 다시 앉으면,

남자, 조금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둘, 조금씩 나눠 마신다.

 

남자 근데 왜 혼자 사세요?

명주 주량 진짜 약하신가보다.

남자 네?

명주 아까 한 질문이잖아요.

남자 아, 그냥 너무 조용해서 한번 더 물었어요.

명주 조용한 게 뭐 어때서요.

남자 외롭잖아요, 우울하고.

명주 난 괜찮던데.

남자 아니요. 이거 되게 조금씩 사람을 갉아먹는 거예요. 괜찮은 거 아니에요. 차라리 시끄러운 게 나아요.

명주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남자 누구든 같이 살아야 시끄럽죠.

명주 같이 사는 거, 나는 별로 자신이 없어요.

 

명주, 남자를 가만 보면,

남자, 조금 더 다가온다.

 

남자 저랑 살아보는 건 어때요?

명주 내가 왜요.

남자 저 되게 시끄러운데…… 저 지금도 끊임없이 떠들고 있잖아요. 끊임없이 더 떠들 수도 있어요.

명주 정말요?

남자 네, 명주씨라고 했죠?

명주 네.

남자 저랑 살아보실래요? 저, 여기 들어와서 살고 싶어요. 달라질 거예요.

 

명주, 남자를 가만 바라본다.

 

명주 정말 끊임없이 떠들 수 있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남자 적어도 오늘밤은요.

 

어두웠던 조명, 점점 더 어두워져간다.

명주,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면, 남자,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완전히 어두워진다.

 

 

4

 

어두운 거실. 밝아지면,

명주, 속옷 차림으로 흐트러짐 없이 가만히 식탁 앞에 앉아 있다.

손에는 녹음기가 쥐어져 있다. 만지작거린다.

조용하다. 한참.

그때,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명주를 보지도 않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명주 당신.

 

남자, 멈춘다.

 

명주 나랑 얘기 좀 해.

남자 피곤해. 나 며칠 못 들어왔잖아.

 

남자, 다시 들어가려는데,

 

명주 나 우울해.

남자 그 말 그만 좀 해.

명주 외롭다고.

남자 지겨워.

 

남자, 방문 앞에 선다.

 

남자 애는 자?

명주 들어가봐.

남자 됐어. 자겠지.

 

그때, 명주, 식탁에 녹음기 탁, 내려놓는다.

 

남자 뭐야.

명주 녹음기.

남자 뭐 하는 거야.

 

남자, 가만히 명주를 바라보자,

명주, 녹음기를 흔들어 보인다.

 

명주 들어볼래? 당신 차 밑에 있던 거야. 쉽더라. 이것만 누르면 돼.

 

남자, 대답 없자,

 

명주 왜 아무 말도 안 해. 너무 조용하잖아.

남자 협박하는 거야?

명주 당해줄 거야? 그냥 앉아. 얘기하자는 거야.

 

남자, 다가와 앉는다.

 

명주 기억나? 옛날에 당신이 나한테 물었었다. 왜 혼자 사냐고.

남자 기억 안 나.

명주 내가 대답을 안 했었어. 그래서 지금 하려고.

남자 하든지.

명주 우리 아빠는 엄마가 바람피워서, 소주병 들고 그 새끼 죽이겠다고 나갔고, 엄마는 또다른 사람이랑 행복하겠다고 집을 나갔어. 그래서 나 혼자 산 거야.

 

남자, 명주를 보면,

 

명주 근데 웃기게도 아빠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자기 머리를 찍었고, 오히려 엄마가 같이 살던 남자 머리에 병을 날렸다. 나는 누구를 더 닮았을까.

남자 협박 아니라며.

명주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끝은 같으니까.

남자 그래서 네 머리든 내 머리든, 오늘 둘 중에 하나 깨보자는 거야?

명주 당신은 당신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남자, 가만히 명주를 본다.

 

남자 내가 그 말 듣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명주 내가 불행해진 이유를 찾다가 거기까지 갔어.

 

남자, 벌떡 일어난다. 의자를 꽉 잡아 들다가 내려두고.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명주 어디 가.

남자 집에.

명주 여기가 집인데, 어떻게 집을 가.

남자 다른 집에.

 

명주, 나가려는 남자를 잡는다.

남자, 떼어낸다.

명주, 다시 잡는다.

 

명주 가지 마. 나 우울해.

 

명주, 남자에게 안기면,

 

남자 잡지 마.

 

남자, 떼어낸다.

명주, 다시 남자에게 안긴다.

 

명주 외로워.

남자 제발, 좀!

 

남자, 명주를 바닥에 밀쳐버린다.

명주, 고개를 천천히 드는데, 웃고 있다.

남자, 멈춰 서서 명주를 바라본다.

 

남자 나는 이제 네가 무섭다.

 

남자, 나가려다 말고,

 

남자 나 이정도면 많이 견뎠다. 이유를 나에게서 찾지 말고 너한테서 한번 찾아봐.

 

남자, 밖으로 나가버린다.

명주, 움직이지 않는다. 굳은 채로 계속 멈춰 있다.

점점, 어두워진다.

 

 

5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로 명주의 우는 소리가 겹쳐 들린다.

 

아들, 방에서 나와 불을 켜면,

녹음기를 쥐고 있는 명주의 등이 보인다.

 

아들 엄마 또 울어?

명주 불 꺼.

 

아들, 냉장고 문을 연다.

 

아들 나이가 드나. 잠이 안 와.

 

명주는 한참 아들을 바라본다.

 

명주 맨 밑에 봐. 소주 있어.

아들 (꺼내며) 반밖에 없네. 와, 같이 마셔.

명주 괜찮아. 너 다 해.

아들 나 이거 반병 마시면 취하잖아.

 

아들, 식탁에 앉는다.

 

아들 또 무슨 일 있었어?

명주 아니.

아들 그런데 왜 또 그러고 있어.

명주 누가 들으면 맨날 청승맞게 이러고 있는 줄 알겠다.

아들 틀린 말은 아니지. 괜찮아. 요즘은 헤어지는 사람들 많잖아. 참고 사는 게 바보지.

 

명주, 녹음기를 바라본다.

 

명주 다 죽여버리고 싶어.

 

아들, 명주를 보다가 소주병을 흔든다.

 

아들 이거 줘?

 

명주, 아들을 한참 바라본다.

아들, 보다가 병을 내밀면,

 

명주 다 죽여버릴 거야.

 

명주는 병을 받아서 자신의 옷에 문지른다.

아들, 컵에 남은 소주를 명주에게 건넨다.

명주, 한숨에 다 털어 넣는다.

 

아들 뭐 꺼내줄까?

 

명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곤, 현관으로 간다.

 

아들 그다음엔 어쩔 생각이야?

명주 글쎄. 아마도 자수해야겠지?

아들 (웃으며) 진짜 대책 없다.

명주 그런가.

아들 그 뒤에 계획도 없어?

명주 응. 별로 중요하지가 않아. 계획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명주, 잘 들어가지 않는 신발을 꾹꾹 신으며,

 

명주 아빠도 엄마도 그 사람도, 다들 자기가 잘 견뎠다고 하는데, 나도 나 나름 잘 견뎌왔어. 나도 이 정도면 열심히 견디려고 한 거야.

아들 맞아.

 

명주, 아들을 본다.

 

아들 근데 요즘엔, 그 정도는 다 견디는 것 같아.

명주 그래?

아들 응. 우선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명주, 신발을 다 신고, 일어나 아들을 본다.

 

명주 그럼 너도, 이 정도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들 당연하지. 나 다 컸잖아.

명주 그래. 다 컸지.

 

아들, 뒤돌아 들어가려다, 명주를 바라본다.

 

아들 엄마.

명주 응.

아들 올 때 소주 한병 더 사다줘. 맨 밑에 넣어줘.

명주 응.

 

명주, 아들을 빤히 본다.

아들, 밝게 웃어 보인다.

명주, 그 모습을 가만히 본다.

 

명주 왜 웃어?

아들 나 원래 잘 안 울잖아. 엄마 닮아서.

 

아들,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는데,

명주,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문이 닫힌다.

명주는 문이 닫힌, 자신의 방을 가만히 바라본다.

웃음이 난다.

그러다 자신의 손에 있는 소주병을 본다.

한참. 한참을 바라본다.

 

점점, 어두워지며,

막.

 

 

 

희곡 | 심사평

 

올해 응모된 희곡은 총 57편으로 예년에 비해 10편가량 줄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다양한 소재와 작가적 결기가 보이는 작품들이 많아 반가웠다. 한편, 서사를 완성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상투적인 결말을 구현하는 데 그쳐 아쉬운 작품들도 많았다.

 

예심을 거쳐 다섯 작품이 집중 논의되었다.

「‘미녀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90년대 초, 천경자 화백의 ‘미녀도’ 위작 논란 사건과 분신정국의 시대상을 어떤 가치판단의 개입 없이 담담히 바라보게 한다.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여 학예실의 일상을 매우 현실감 있게 재현한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라는 현실의 논란이 그 이면까지 더 깊이 사유되지 못하고, 극의 목표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채 멜로드라마적 결말에 이른 것이 안타까웠다. 단막극 분량의 압축적인 글쓰기를 통해 극의 목표와 더 치열하게 싸우는 작업을 권한다.

「암실 밖으로」는 암실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이 작품의 메시지로 이어지는 연극성이 돋보인, 단막극으로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막강한 현실 앞에 나약한 개인의 문제를 일상의 언어를 통해 제기하였고, 근래 예술계와 대학의 성추행 사건, 교수와 제자 사이의 파행적 권력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시의성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작위적인 상황, 상투적인 인물 설정이 아쉬웠다. 작품의 목표에 비해 극의 결말과 남학생 캐릭터 등이 다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금붕어 낳는 집」은 근미래 ‘금붕어 낳는 여자’라는 설정을 통해 시대의 증후를 뚫고 나온 도발적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다양한 캐릭터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은 자신만의 연극적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쓰는 젊은 작가만의 낭만성, 혹은 치기를 느끼게 했다. 반면 주인공 자매는 물론 이 극 전반의 문제의식과 대척점에 놓인 삼촌의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단순하여 저항의 지점이 약하다는 점, ‘금붕어’가 어떤 것의 은유이며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속에서 독립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이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슈바인학센」은 이른바 ‘세모녀 동반 자살사건’이라는 현실을 관념적으로 재현한 작가의 패기와 결기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특히 가난, 약자, 절망이라는 상투적일 수 있는 구도를 전혀 피상적이지 않은 세계로 표현하여 서늘한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중후반으로 나아갈수록 현실의 사건을 애써 설명하는 것이나 작위적인 설정 등이 서사를 이끌면서 작품의 가장 중요한 미덕을 해쳤다. 이야기가 힘차게 현실을 뚫고 나왔지만, 다시 현실로 종속되어버리는 결과가 된 것이다.

「명주」는 폭력적인 아버지, 바람피우는 어머니라는 가정비극의 통속을 발랄하게 재편하여 이 시대와 인간의 본질을 관통하는 메타포로 확장시킨 연극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단순한 상황의 패턴을 통해 자신의 운명 밖으로 한걸음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의 한계를 그리며 도덕적 판단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시대의 우울과 고독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반복적인 구조가 인간의 굴레라고 하는 상투성에 갇힐 수 있는 위험, 한편의 연극이 줄 수 있는 다양한 경험 대신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느껴지는 문제의식과 서사가 고민스러웠다.

 

우리는 「슈바인학센」과 「명주」 두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하였다. 젊은 작가의 패기가 주는 낯선 경험과 자신만의 통찰을 통해 시대와 인간의 문제를 관통한 작품 사이에서의 고민은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다.

최종적으로 우린 「명주」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된 작가는 물론, 자신만의 세계를 건져 올리기 시작한 젊은 작가들 모두 묵직한 걸음으로 오래오래 걸어가는 극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고연옥 김은성

 

 

 

희곡 | 당선소감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아직도 어떤 기분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고민스럽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찾아온다는 기회가 나에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갑고, 감사하고, 왜인지 서럽기도 합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확인하고, 나는 꽤 오래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계속 다시 들여다보며 나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고 나서야, 눈물이 터졌습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쓰나봅니다.

 

며칠은 악몽을 꿀 만큼이나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쓰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자꾸 무너졌고, 계속 새 문서를 켜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시간이 지속됐고, 열심히 앉아서 열심히 쓰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믿음도 자꾸 무너져갔습니다.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안타깝지만 역시 나에겐

특별한 재능이나 운 따윈 주어지지 않았구나, 하고 속상해하면서도,

그렇게 인정하고 싶진 않아서,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세상에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쌓여가는데,

나는 그것에 비해 너무 권태롭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정하고 나의 불행을 다 적어보았지만, 곧 덮어버렸습니다.

이만한 고통은 다들 안고 살지 않나, 하는 생각에 창피했습니다.

그러다 혹시, 다들 이렇게 견디며 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나에겐 어떤 꾀도 없어서, 그냥 미련하게 더 앉아 있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노와 미련한 엉덩이는 결국 이렇게 무언가를 써냈습니다.

 

내겐 참, 감사한 순간에 찾아온 선물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나에 대한 조금의 관대와 확신을 가지며,

앞으로 더 정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앉아 있겠습니다.

 

여전히 사랑할 나의 모든 기원인 우리 가족과

늘 곁에서 응원해주는 나의 영원할 친구들,

아프게, 아프게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윤대성 교수님,

나의 모든 첫줄을 쓸 수 있게 해주신 조광화 교수님,

아주 큰 한걸음을 뗄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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