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

신경숙과 한강의 최근 소설에 부쳐

 

 

조연정 曺淵正

문학평론가.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순진함의 유혹을 넘어서 구조적 폭력 시대의 타나톨로지(thanatology) 등이 있음. yeoner@naver.com

 

 

우리 시대의 초라한 사랑

 

사랑에는 갈망과 고통뿐이라고 명민한 자들은 말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저 둘 사이를 오가며 유형(exile)의 밤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테지만, 확실히 우리는 사랑이 초라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서지기 쉬운 허상에 불과하니 진정한 사랑 역시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 철학자들을 탓해야 할까. 사랑으로부터 낭만적 신화를 거둬내고 사랑을 성적 욕망의 미사여구로 전락시킨 정신분석학자를 원망해야 할까. 아니, 연애와 결혼이라는 상호계약의 제도가 사랑의 혼란스러운 본질을 안전하게 길들여버렸다는 사회학자의 진단을 경청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학자라면, 실존의 허무보다 생존의 불안이 압도적인 이 시대의 불행을 증언하며 낭만적 사랑의 여유는 사치일 뿐이라고 단정할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우리는 더이상 사랑을 통과하며 형언할 수 없는 숭고를 감지하거나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가 힘들어졌다. 『사랑의 단상』의 첫 페이지에서 롤랑 바르뜨(R. Barthes)는 사랑을 ‘심연에 빠져들기’(sabîmer)로 비유했었다. “절망 또는 충족감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라짐의 충동,” 알 수 없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승인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해져버린 듯하다. 사랑은 이제, 가벼운 즐거움을 주는 방식으로 어디에나 있고 충동에의 희생을 강요하는 형태로는 아무데도 없다. 진정한 사랑의 파토스는 이미 가벼운 욕망으로 산화되거나 견고한 제도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너무 비관적인가.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현대의 근본주의”1)라고 말한 울리히 벡(U. Beck)조차도 사랑을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사랑은 ‘위험사회’의 불안을 견디게 해주는 세속종교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만남 알선 싸이트의 괴상한 광고 문구는 안전한 쾌락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 사랑의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알랭 바디우(A. Badiou)는 말한다. 사랑이 일종의 계약이나 욕망의 회의적 운동이 되어버린 상황에 맞서 바디우는 위험과 모험을 창안하고 ‘삶을 재발명’하는 사랑을, 동일성의 만남으로 종결되지 않고 차이의 구축으로서 지속되는 사랑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 철학의 고유어들을 활용해 말해보면,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선언’을 통해 ‘사건’으로 등재되고 ‘충실성’과 더불어 상황의 ‘진리’를 만들어낸다. 사랑은 결국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2)이며 이같은 사랑을 통해 느끼게 되는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증거”3)이다.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바디우가 어쩐지 시대착오적 낭만주의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사랑을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정의하는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둘의 만남을 하나의 관점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낭만적 신화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타자와 더불어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게 되는 흔치 않은 체험이기에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랑을 하나로의 완결이 아니라 둘의 변화가 진행되는 ‘최소한의 꼬뮤니즘’으로 상정한다. 그에게 사랑은 타자를 매개로 홀로 진행되는 단순한 육체의 즐김도 육체 너머를 상정하는 아름다운 환상도 될 수 없다.

바디우의 이같은 ‘사랑예찬’을 참조하자면, 사랑이 초라해진 이 시대에서 우리는 표피적이고도 순간적인 감각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저 즐거운 삶을 만들어볼 수는 있을지언정, 타자와의 성실한 만남이 주는 기쁨도,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만져보는 행복도, 결국 자기 삶을 재발명하는 보람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숭고한 사랑이 대체로 불가능하고 가능하다 해도 조롱받기 십상인 이 시대에, 여전히 고전적 방식으로 사랑을 생각하는 소설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무질서한 인생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사랑에서 찾고, 서로 소통할 수 없어도 사랑은 가능하다고 믿는 소설들은, 어쩐지 어색하지 않는가. 자기 삶의 기율만을 따르며 여전히 ‘진정성’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 작가들의 이야기로 읽혀야 할까. 혹은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오히려 사랑의 힘으로 횡단하려는 악전고투로 읽혀야 할까.4) 신경숙(申京淑)의 『모르는 여인들』(문학동네 2011)과 한강(韓江)의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을, 사랑이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이 시대의 현실과 더불어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들로 읽어볼 수는 없을까.

 

 

모르는 육체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우정을 구별하기 위해 육체적 관계의 유무를 따지곤 한다. 그런데 이같은 통속적인 방식에 결정적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바디우를 다시 한번 참조해보자. 육체적 증거와 무관한 우정은 열정을 불신한 철학자들이 열심히 선호했던 가장 이지적인 감정이며, 사랑은 이러한 우정의 모든 긍정적 특징들을 취하면서 더불어 타인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을 떠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총체성의 물질적 상징이 바로 “육체의 위임”5)이다. 육체적 증거가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육체적 관계가 타자를 매개로 나르씨시즘적 쾌락을 즐기는 행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의 누추한 육체를 떠맡는 즐겁지만은 않은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 소설이 사랑의 이야기로 읽힐 이유는 많지만, 육체의 초라함을 드러내고 감싸안는 장면이 섬세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라는 점은 결정적이다. 상대의 빛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릴 때의 설렘보다도 상대의 초라한 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올 때의 쓸쓸함이 진정한 사랑의 증거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작가가 바로 신경숙일 것이다. 『모르는 여인들』의 해설에서 권희철이 ‘맨발’과 ‘신발’의 관계를 통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신경숙은 “누추한 벌거벗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랑이라는 듯 마음의 나눔과 육체의 나눔을 뒤섞으며 사랑을 말한다. 누군가는 타인의 초라한 맨발을 수락할 수 없어 사랑으로부터 떠나고, 누군가는 타인의 신발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며 친밀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자신의 마지막 신발을 내어주며 사랑을 증여하는 사람도 있다. 『모르는 여인들』에서 ‘신발’이라는 모티프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신경숙 특유의 사랑방식을 증명한다.6)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부터 반복되는 모티프이자 『모르는 여인들』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함께 밥을 먹는 장면도 ‘육체의 위임’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밥을 챙겨주는 일상적인 행위는 타인을 향해 베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사랑의 사례지만, 밥을 먹는 행위 자체에서 두드러지는 육체성으로부터 타자의 타자성이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부각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밥을 먹는 모습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부의 안쪽을 내보이는 밥 먹는 모습을 서로에게 노출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유쾌한 체험은 아니다. 그 불쾌를 견디는 것이 사랑의 증거라고 하면 과장일까.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 사이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관념도 보잘것없는 육체를 오랜 시간 공유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비루한 육체를 아무런 이유 없이 수락할 수 있게 될 때 마법같이 사랑이 시작되며 그 육체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사랑이 끝나기도 한다.

표제작 「모르는 여인들」은 이같은 사랑의 공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관절염 수술을 받은 남편의 병간호로 지친 ‘나’에게 이십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 ‘채’의 편지가 도착한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너를 생각하곤 했어”(226면)라며 만남을 제안하는 채의 편지를 받고, ‘나’는 이십년 만의 이 만남을 수락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지만 약속 시간이 되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약속 장소로 향한다. 이십년 전, 이별에 대한 합의는커녕 통보의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렸던 ‘나’에게 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십년 만에 재회한 ‘나’에게 채가 내민 것은 아내의 노트다. 노트에는 일하는 아내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던 아주머니와 아내가 주고받은 대화가 담겨 있다. 집안일과 관련된 (특히 가족의 끼니와 관련된) 사무적인 이야기들이 오고가던 노트에는 점차 두 여인 사이의 내밀한 대화가 담기기 시작한다. 노트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내는 암에 걸린 사실을 터놓는다. 아주머니 외에는 모두와 연락을 끊은 아내는 “자기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말아달”(253면)라며 채를 떠났다고 한다. 채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돼버린 것 같”(254면)다고 ‘나’에게 말한다.

이십년 만에 ‘나’를 찾아온 채는 ‘아내는 왜 그럴까’가 아니라 “그때 왜 내게 그랬어?”(233면)라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이십년 전 ‘나’는 롯데백화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채를 멀리서 지켜보다 그 길로 도망쳐버렸다. 채는 도망치는 ‘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채와 ‘나’는 그렇게 이별했다. 그때 ‘나’는 “군화 속의 땀에 젖어 있을 채의 발가락을 연상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252면)어서 채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채의 아내는 자신의 병든 육체를 그에게 떠맡길 수 없어 그를 떠나버린 셈이다. 채의 누추한 육체를 떠안을 수 없어 떠난 ‘나’도, 그에게 자신의 망가진 육체를 떠맡길 수 없어 떠난 채의 아내도, 어쩌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키려 한 것이지 모르지만, 그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혹한 상대들이다. 채와 만나고 돌아온 ‘나’는 남편의 메마른 발가락을 하나하나 닦아주며,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돼버린 것 같다던 채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이란 서로의 누추한 육체를 떠안음으로써 가능해지며 그것이 버거워질 때 끝장난다 말했지만,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비대칭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끝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쪽도 사랑의 끝장을 극복해보려 하는 쪽도 결코 쉽지는 않다. 「모르는 여인들」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진화는, 즉 상대의 발가락을 견딜 수 없어 사랑을 포기한 내가 그 사랑을 통과하여 이제 다른 상대의 발가락을 닦아주고 있는 설정은, 저 비대칭을 극복하는 사랑에 관한 또다른 희생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경숙이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한 희생의 신화가 아니라 저 비대칭과 불일치가 그저 인생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랑이 인생이라는 무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하거나 가까스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과 더불어 인생은, 아니 인생과 더불어 사랑은, 그렇게 “슬픈 것도 같고 서러운 것도 같고 아니 조금 무거운 것도 같”(228면)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당연한 사실을 섬세히 짚어주며 독자의 마음까지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 신경숙 소설의 변치 않는 힘일 것이다.

물론, 타인의 누추한 육체를 떠안는 것이 생리적 불쾌를 감내하는 일만은 아니다. 타인의 보잘것없는 알몸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견딜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수락해낼 때 결국 사랑은 완성된다. 그 견딜 수 없는 감정이란 고독이 아닌가. 일체의 이미지나 상징을 거둬낸 타인의 알몸을 보는 느낌은 마치 자신의 알몸을 홀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외롭고 슬프다. 이제, ‘육체의 위임’이 사랑의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수치를 감출 수 없는 타인의 무방비한 몸을 들여다보는 고독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 끝의 신발」의 한 장면을 보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순옥언니가 온갖 불행한 사고 끝에 어린애가 되어버린 모습이 버겁다.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22면)로 기억되는 순옥언니의 불행을 애써 외면하는 내가 “순옥언니와 마주쳤을 때 갖게 될 고독을 피해보려는 마음”(29면)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타자와 마주할 때 느끼게 되는 당장의 감정은 쓸쓸함이다. 이 쓸쓸한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떠안으며 자신의 고독 위에 타인의 고독까지 기꺼이 겹쳐놓고자 할 때 사랑이 가능해진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타자의 고독을 승인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했거니와, 통제 불가능의 상황이란 불행한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신경숙 소설에서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 사이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예기치 않은 죽음이나 실종도 원인 모를 이별이다) 인간의 불행한 운명을 환기하는 반복되는 모티프다. 연쇄살인범에게 온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장면을 목격한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어두워진 후에」는 이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불행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흔치 않은 불행과 더불어 그려지는 사랑의 형태는 예사롭지 않다. “살인이 자신의 직업”(123면)이라고 말한 자에게 온 가족을 잃은 남자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영혼이 빠져나”(135면)간 느낌으로 이년 간 무작정 떠돌아다닌 남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따뜻한 밥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남자의 모든 요구에 “그러지요”(122면)라고 무심히 대답하는 여자의 환대 덕분에 남자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번도 찾지 않았던 자신의 집으로 가보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제 살아가려면 그 집을 더이상 피하지 말아야 한다”(150면)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심신이 황폐해진 한 인간이 누군가의 무조건적 온정으로 다시 살아갈 의지를 얻게 된다는 익숙한 서사로부터 이 소설이 유독 강조하는 것은, 낯선 남자에게 일말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자의 낯선 태도다. 우리는 여자의 이같은 행위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왜일까.

유영철이라는 연쇄살인범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시점에 이 민감한 사건을 소설로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작가의 절박함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눈여겨볼 점은 끔찍한 불행을 겪은 남자의 행적이 마치 도망자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이 일어난 집에 되돌아가지 못하며, 철거 직전의 시민아파트에 숨어들고, 결국 부랑자처럼 낯선 곳을 떠도는 모습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미지로 적당해 보인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유 때문에 실제로 범인으로 의심받기는 했지만 범인이 검거된 후에도 그가 도망자의 삶을 지속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두워진 후에」가 실제 사건을 참조하여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뒤따르는 동시에 피해자를 가해자와 오버랩하며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세상은 알 수 없는 곳”(138면)이라는 자명한 사실일지 모른다. 살인범의 지난 삶을 빠짐없이 알게 된다 해도 우리는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물론 피해자의 공포와 상처 역시 어떤 말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

남자가 마치 가해자 혹은 도망자처럼 그려짐으로써, 즉 그가 불쌍한 사람이 아닌 위험한 사람으로 그려짐으로써, 여자의 환대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강조된다. ‘대체 왜?’라는 질문이 끝까지 남아 독자를 뒤흔드는 것은 저 두 남자의 끔찍한 삶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저 여자의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환대에 관한 것이다. 「어두워진 후에」가 강조하는 것은 조건 없는 환대의 숭고한 결과가 아니라 사소한 시작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이때 여자의 환대가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그려진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노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특별히 음미될 만하다. 남자가 하룻밤을 머문 여자의 집에는 대소변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녀의 어머니와 아직 보살피는 손길이 필요한 두 동생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누추한 삶으로 남자를 초대한다.

여자의 행위에서 강조될 것은 ‘무조건’이라는 조건만은 아니다. 여자의 선행은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수락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주고받음 사이의 거리를 삭제했다. 일상의 여분을 나눈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를 공유했다. 우리는 호들갑스러운 환대나 거리두기의 환대가, 적대나 위선, 나아가 자기만족의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여자의 행위는 단순한 환대가 아닌 사랑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타자의 누추함을 세상으로부터 감춰주고 나의 누추함을 그에게 내보이는 그 사이 어디쯤엔가,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닐까.

혼령을 등장시켜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화분이 있는 마당」의 비현실적인 설정도 신경숙이 제시하는 사소한 사랑의 놀라운 능력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다.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친구로 연인으로 함께해온 상대로부터 갑작스럽게 결별을 통보받고 언어장애와 식이장애를 겪던 ‘나’는, 후배 집 앞마당에서 만난 낯선 여자가 차려준 밥을 먹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장애를 서서히 극복하고 이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신비로운 소설이 사랑의 특별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느닷없는 창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80면)고 느끼게 된 것, 그리고 “이제 창을 떠올려도 고통 대신에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았다”(80면)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이야기를 나눠준 혼령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대체로 영문을 모르겠는 불행들에 이끌려가지만, 또 한편에는 영문을 모르겠는 사랑이 존재한다. 밥 먹기와 이야기 나누기처럼 대단치도 않은 행위 속에 서로의 누추함과 쓸쓸함을 나누는 사랑이 존재한다.

신경숙 소설이 이제껏 관심을 둔 것은 돌연한 불행을 감내해야 하는 인생의 서글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르는 여인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최소한의 능력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발휘하는 신비로운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제나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서술되곤 하는 것은, 애초에 사랑이 보잘것없음이라는 인간의 불행한 운명을 감내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랑은 운명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돌파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불행도 오로지 사랑으로밖에는 돌파할 수 없다. 신경숙은 인생과 사랑에 관한 원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같은 사랑의 서사를 통해 우리 시대의 특별한 불행을 거스르는 유일한 방식을 말해볼 수도 있다.

 

 

만짐의 시간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만남에 관한 소설이다.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고, 여자는 행동으로도 표정으로도 남자에게 말할 수 없다. 서로 시선과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언어 혹은 언어의 대리물을 통한 소통이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 소개되는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7면)라는 보르헤스의 묘비명처럼,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 사이에는 침묵과 어둠의 “서슬 퍼런” 칼날이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대의 결핍을 보충해줄 수 없는 이 둘 사이에 사랑이 가능하기는 할까.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 일상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사소하고도 숭고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기본적 소통마저 불가능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때 ‘만짐’이라는 육체적 행위가 관계의 핵심 매개가 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희랍어 시간』을 읽어보자.

여자는 어느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반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수년 전에 이혼했으며 여러차례 소송 끝에 아홉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겼지만, 여자가 말을 잃게 된 데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12면) 필담으로 진행된 상담에서 심리치료사는 그녀 삶에 일어난 여러가지 불행한 사건들을 환기시키며 언어장애의 원인을 찾아주려 하지만, 그녀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13면)라고 반복해 말한다. 문학을 강의하고 시와 칼럼을 쓰며 언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해온 그녀지만, 어려서부터 언어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15면) 언어에 대한 그녀의 강박적 거부감은 불완전한 언어가 세계를 장악해버린 폭력적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 차원에서 스스로의 존재마저 파기했던 『채식주의자』(창비 2007)를 떠올린다면 『희랍어 시간』의 이같은 언어장애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녀는 세계를 향해 어떠한 권력도 실행하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21면)를 기다린다. 그것은 신음, 비명, 으르렁거림, 흥얼거림, 웃음소리 같은 감각의 소리일지 모른다. 학창 시절 겪은 최초의 언어장애를 낯선 외국어 소리로 극복한 경험을 기억하며 그녀는 지금, 사용가치를 잃고 존재가치만 남은 희랍어를 배우면서 완전한 말을 기다린다.

여자는 단순히 소통의 매개로서의 말을 잃은 상태가 아니다. “언어로 생각하지 않”고 “언어 없이 이해”(15면)한다는 것은 분명,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면을 상실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언어로 세계를 장악하기보다는 몸에서 말을 삭제함으로써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린 상태라고 해야 할까. 남자는 어떤가. 열다섯살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을 간 남자는 점차 시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남자는 세계를 잃고 있는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세계를 자신의 내면에 가두어야 할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독의 세계로, “한번 더 빠져나갈 꿈 밖의 세계가 없”(107면)는 세계로, 눈에 보이는 것 전부가 오로지 보고자 하는 스스로의 욕망일 뿐인 세계로, 그 완벽한 어둠의 세계로, 남자는 차분히 걸어들어가고 있다. 여자의 시점과 남자의 시점이 교차서술되는 이 소설에서 여자가 ‘그녀’라는 삼인칭으로, 남자가 ‘나’라는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몸속에서 말이 사라져버린 여자는 세계를 향해 자신의 확고한 내면을 소거해버린 상태이며, 눈밖의 세계를 볼 수 없는 남자는 세계를 온전히 자기 안으로 끌어들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여자도 볼 수 없는 남자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손쉬운 능력으로서 언어와 시선을 잃었다 할 수 있지만, 어쩌면 남자의 상황이 더 비극적일지 모른다. 그는 세계로부터 거절당한 셈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가 통과해온, 아니 실패한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우정을 살펴보자.

시력을 잃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남자에게 첫번째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는 말을 잃은 여자였다. 그녀와의 사랑이 파탄 난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고 남자는 회상한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47면) 다그치는 ‘나’에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48면)를 드러냈다. 마침내 완벽한 어둠으로 들어가게 될 시간을 앞둔 ‘나’는, 마치 눈앞에 여자가 있는 듯 그녀의 모습을 그려보며, 십여년 전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남자는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48면)라고 뒤늦게 고백하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난 시절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시간이 흐른 뒤 남자가 깨달은 것은 그녀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그 어리석음이 사랑도 자신도 파괴했다는 사실이다. 남자는 무엇을 알게 된 것일까. 희랍철학을 공부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게 된 것일까. 과연 그럴까.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93~94면)

 

남자는 영원불변의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플라톤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아름다운 사물’ 대신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믿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아름다움 자체를 믿는 자신이 바로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는 것이라 말했다. 플라톤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번 더 빠져나갈 꿈 밖의 세계가 없”는 남자에게는, 눈앞의 아름다운 사물을 볼 수 없으므로 그 너머를 믿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남자가 깨달은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세계 속에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어둠의 세계와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는 “눈을 뜨고 있는 꿈을 꾸다가 문득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 상실감도, 체념도 느끼지 않는다”(107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지난날의 조급함이다.

남자가 깨달은 것은 결국 물질세계의 완고함과 감각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121면)을 그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닌가.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118면)다는 사실을 남자에게 깨우쳐준 것은 열네살에 육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았던 친구 요아힘 그룬델이기도 하다. ‘나’와 그는 각자의 삶에 기입된 결핍을 공유하며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 여분의 삶을 살아가는 요아힘은 아름다움이 바로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름다움을 “생생한 힘”(122면)이라 믿었던 그는 눈앞에 있는 ‘나’를 갈망했지만,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와 “화엄(華嚴)(121면)의 세계를 붙잡고 싶었던 ‘나’는 요아힘으로부터 도망쳤고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123~24면)

 

요아힘 그룬델은 죽었다. 이 세계로부터 저 “쓸쓸한 몸”(125면)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나’는 요아힘과의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떠올리며 또 한번 자신의 어리석음에 괴로워한다.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접촉을 거절하여 요아힘을, 그리고 자신을 쓸쓸함 속에 방치한 것을 후회한다. 한번은 거절당하고 또 한번은 거절한 두번의 실패한 만남을 통해 남자는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둠과 침묵 사이에서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라고 했지만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식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야기를 나눌 수도 시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들을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남자는 여자의 기척을 들을 수 있다. 그뿐인가. 이들은 서로를 만질 수 있다. 『희랍어 시간』은 “문득, 그럴 수밖에 없는 듯”(181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만지며 끝난다. 물론 이것은 만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이 만남은 어떻게 사랑이 되는가.

남자는 이 ‘만짐’을 통해 ‘꿈 밖의 세계’로 빠져나가고 있다. 『희랍어 시간』을 남자의 이야기로 읽을 경우 이 소설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이데아의 세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세계로 빠져나오는 이야기가 된다. 여자의 이야기로 읽으면 어떨까. 몸속의 말을 삭제함으로써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린 여자는 저 ‘만짐’을 수락함으로써 내 안으로 세계를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 일인칭 시점을 취하던 남자가 여자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점부터 삼인칭 ‘그’로 바뀌는 설정이나, 삼인칭의 ‘그녀’로 지칭되던 여자가 남자와의 접촉과 더불어 일인칭 ‘나’로 말하게 되는 설정은 절묘하다. 내면이 비대해진 남자와 세계가 비대해진 여자는 이렇게 ‘만짐’을 통해서 세계와 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해가는 것이 아닐까. 언어와 시선이라는 분절된 감각보다 소리와 접촉이라는 분절 이전의 감각을 통해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관념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은 아니다. 감각의 결핍과 비대칭의 만남을 극복하는 사랑의 절대적 신비를 말하려는 것 역시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이란 나와 너 사이의 완벽한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각자가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삶을 재발명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상대와 마주하여 서로를 더듬고 만지는 행위로부터 가능해진다. 한강은 사랑의 본질을 ‘만짐’이라는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말한다. 부서질 듯 연약한 한강 소설의 섬세한 인물들은 흔히 세상으로부터의 상처가 두려워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폐쇄적 인물들로 읽히기도 했다. 『희랍어 시간』은 그러한 편견에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듯, ‘만짐’이라는 사랑의 감각을 동원하여, 세계로부터 비극적으로 거절당한 인물들을 세계로 활짝 열어 보인다. 한강은 우리의 연약하고도 예민한 몸을 나누는 행위로부터 굉장한 사랑이 ‘문득’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사랑을 쓰기, 사랑을 하기

 

숭고한 사랑의 열정이 불가능한 시대지만 또한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는 시대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볍고 즐거운 쾌락을 시종 기웃거리지만, 사랑만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근거인 양 사랑의 고통과 환희에 스스로를 내어맡긴 자들도 없지는 않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재편할 수 있다는 낭만적 혁명주의자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다. 그들은 주로 여기, 무용(無用)한 문학의 영역에 있다. 익명의 타자와 보잘것없는 밥상을 나누는 신경숙 소설의 은근한 온기도, 소통 불가능 속에서 만짐의 사랑을 문득 실천해 보이는 한강 소설의 열기도, 모두 이 세계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목도하고 몸소 체험한 사랑의 사례들이다. 드물게 아름다운 바디우의 문장을 읽어보자. “연인들은 심지어 가장 격렬한 섹스에서조차도, 몸이 사랑의 선언을 받아들였다는 그 증거 위로 평화가 내려앉을 때,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 마치 두 육신의 수호천사처럼 사랑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7) 사랑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포기할 수 없음이 사랑을 지속시키고 삶을 변화시킨다.

신경숙과 한강의 소설이 다루는 진실한 사랑의 양태들은 그 자체로도, 진정성을 상실한 동물과 속물의 시대에, 냉소적 윤리가 사랑의 열정을 질식시킨 이 시대에,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희미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수 있다. 이 위안은 소설을 읽은 독자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허무로 귀결될 뿐 아니라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소모적인 노동의 하나로 전락한 이 시대에, 어떤 작가들은 쓰는 일 자체로 스스로를 단속하며 자기 삶을 재발명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신경숙과 한강의 인물들이 실어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편지나 일기의 형태로 내밀한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징후적으로 읽힐 만한 대목이지만, 멈춤도 쉼도 없는 이 작가들의 쓰기에 대한 ‘가학적 붙들림’(블랑쇼) 자체가, 특정한 모티프와 특유의 태도를 고수하며 지속되는 이들의 쓰기 자체가, 아직 완전히 소거되지 않은 진정성의 한 사례로 읽힐 수 있다.

『채식주의자』로부터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라는 폭발적인 장편을 거쳐 또 한편의 장편을 연달아 써낸 한강은 작가의 말에 “글쓰기가 내 삶을 힘껏 밀고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193면)라고 적었다. 지난 팔년간 세편의 장편을 쓰는 틈틈이 오로지 내부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쓴 단편들을 묶은 것이라는 『모르는 여인들』의 작가의 말에도 “이 작품들을 쓰지 않으면 다른 시간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282면)다는 구절이 있다. 삶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진부한 이야기가 이 시대의 희귀종이 되어버린 만큼, 신경숙과 한강이 써놓은 저 말은, 그러니까 쓰기를 통해 삶을 밀고 나갔다는 저 고백은, 특별히 음미될 만하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쓰기에의 필연성과, 삶의 구축이,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사태가 이 두 작가에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작품과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구축하고 삶을 재발명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시대와 무관한 인간다움의 내밀함을 탐색하거나 섬세한 예술가의 열정을 발휘하는 듯한 이들의 소설은, 이전 시대 문학의 우세종인 ‘진정성’의 영역을 고수하는 듯하지만, 실은 가장 구체적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며 사랑에의 선언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대 문학의 최전선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밀고 나가는 안간힘으로부터 세계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적 차원의 사랑과 ‘만짐’의 사랑 안에서 신비롭게 가능해진다. 결국 사랑은 우리의 이 초라하고 연약한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 신경숙과 한강 소설의 전언이 바로 이것이다.

 

 

1) 울리히 벡・엘리자베스 벡-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옮김, 새물결 1999, 41면.

2)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조재룡 옮김, 길 2010, 59면.

3) 같은 책 60면.

4) 김미현은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을 ‘포스트 포스트 진정성’의 관점에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인간다움을 탐색하는 신경숙 문학의 원형을 21세기적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숙・김미현 대담 「세상 끝 어둠, 그 이후」, 『문학동네』 2012년 봄호 58~63면.

5) 알랭 바디우, 앞의 책 47면

6) 김홍중은 이러한 ‘신발’ 모티프를 통해 친밀성과 관련된 시대적 변화를 읽어낸다. 친밀감 소통의 장소가 ‘내면’으로부터 ‘육체의 말단’으로, 인간의 ‘안’으로부터 인간의 ‘아래’로, 인간의 깊이로부터 인간의 바닥으로 옮겨오고 있는 장면을 신경숙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중 「신경숙 문학의 몇가지 모티프들」, 『문학동네』 2012년 봄호.

7) 바디우, 앞의 책 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