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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갑상 曺甲相

1950년 경남 의령 출생.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 『길에서 형님을 잃다』 『테하차피의 달』, 장편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 『밤의 눈』이 있음. gsc@ks.ac.kr

 

 

 

병산읍지 편찬약사

 

 

세사람 앞에 캐논 프린터기에서 출력된 에이포 용지 석장씩이 놓였다. 종이는 오븐에서 막 꺼낸 바게뜨처럼 바삭하고 따뜻했지만 활자에 박힌 시선들은 차가웠다. 문제가 생긴 원고를 읽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병산의 어제와 오늘』 발간 전체를 통괄하는 편찬위원장과 실무를 책임지는 편집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읽으려는 글의 제목은 역사 편의 한 꼭지인 ‘해방정국과 6·25전쟁’이었다. 편찬위원장은 처음이지만 뒤의 두사람은 이미 한번 읽은 글임에도 탁자에 코를 박았다.

1945815일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다.’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됐다.

 

1945815일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렸다는 해방(解放)이라는 말이 피동적이라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光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임시정부 우리 군대의 이름이 광복군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8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니 우리 민족의 해방의 기쁨도 세계사적 테두리 속에서의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그날이 왔지만 삼각산은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지 않고 한강물도 용솟음치지 않았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38선이 그어지고 남에서는 미군이, 북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실시하였다. 삼봉·병산도 해방정국하에서 모든 지역들이 밟았던 길을 따랐다. 일제 패망 직후 지역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바 좌우합작 성격의 건준은 미군 진주 후 해체되고, 좌익계열 중심의 삼봉군 인민위원회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런 좌익중심의 활동에 반발한 고태수 김노병 등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부를 만들었다.

해방정국은 새나라 건설을 목표를 하는 임시적 시간이기에 분열과 혼란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어떤 형태의 국가를 세우느냐 하는 문제는 친일청산에서부터 일본인 재산(적산) 처리, 토지(농지) 분배, 외세와 남북분단 문제 등과 결부되기에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서로 다른 생각을 크게 묶어 말하면 좌우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의 정점은 신탁통치 찬반여부로, 좌익은 찬성이라는 선택을 통해 고립화를 자초하였다. 이어서 19482월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지역에서의 총선거가 그해 510일 이루어졌는데 삼봉 지역의 제헌 국회의원 당선자는 무소속의 김기탁이었다. 제헌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하고 815일 미군정 폐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광복 3년, 남북의 서로 다른 정부 수립 2년 만에 전쟁터가 되었다. 후방에 속한 삼봉·병산은 병참부대를 비롯한 군부대들이 주둔하여 대한민국 수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비록 전화의 직접적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인적 피해는 피해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적 손실의 기본은 당시 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희생이지만 병산은 물론 삼봉군 전체의 전몰군경과 전상자 숫자의 파악은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 전후 혼란과 행정 미비가 원인일 텐데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민간인 희생도 뒤따랐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특별한 사례가 있어 상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12월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좌익 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창설 초기 가입자의 대다수는 전향자들이었으나 정부는 조직 확대과정에서 의무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자의적인 이 규정에 의해 좌익과 무관한 국민들이 가입하게 되었다. 지역의 가입인원은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되어 공무원과 유력인사들이 가입을 독려하고 강제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좌익에게 물자제공과 편의를 제공한 혐의자나 주민 간의 사적 감정에 따라 보복성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19491120일 부산에서 결성된 경상남도 보도연맹 산하의 삼봉군 결성일자 및 조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보도연맹 가입자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적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구금되고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들에 대한 구금과 처형은 국군과 경찰의 후퇴와 같이 이루어졌으며 낙동강 방어전선 아래 지역에서의 구금과 심사기간은 길고 가혹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인 CIC를 비롯한 군 정보기관과 경찰 사찰계가 중심이 된 학살은 이승만정부 최상부의 결정과 명령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삼봉군의 대다수 보련원들은 8월 초순부터 중순 사이에 구금되어 815일 전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 수는 조사 시기와 조사 주체, 보도기관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7백여명 전후로 추정된다. 1차조사는 19604·19혁명 뒤 삼봉군유족회가 결성되어 실시되었다. 이때 사체 발굴과 더불어 합동묘와 비석이 마련되었으나 5·16쿠데타 뒤 파괴되었다. 이후 2009년 정부 산하의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우리 병산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은 희생자를 줄였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병산 면장을 지낸 김후곤과 당시 병산지서 지서장으로 재임하던 허형도 경사의 남다른 노력과 결단이 있었다. 보련원들은 좌익활동의 경중에 따라 ABC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어 갑의 경우는 전쟁 발발 직후 본서에서 구금했다. 그외의 보련원들은 삼봉읍은 본서에, 나머지 11개 면은 지서별로 소집과 해제를 거듭하다 8월 초순부터 농업창고 등에 구금하였다.

병산지서 역시 몇차례 소집과 해제를 거듭하다 본서로부터 구금자 전원을 이송하라는 전화통지를 받았다. 보련원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지던 이 절박한 시기에 병산 면장을 지낸 김후곤이 허형도 지서장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면장은 뜻밖에도 구금 중인 보련원들을 본서로 보내지 말고 풀어주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엄중한 시절에 이런 의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산이 허형도의 진외가(아버지의 외가)였고 김면장은 그의 아저씨뻘이었기 때문이다. 김면장이 덧붙인 말은 내일이나 모레 본서로 보낼 보련원들 중에 진짜 좌익사범이 있기나 하냐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보도연맹이 결성되기 전인 1949년 봄부터 병산지서에 근무한 그로서는 보련가입자 대다수가 적극적인 좌익활동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병산은 물론 삼봉 전체가 높은 산들로 경계를 이루고 있기에 해방정국에 한동안 산으로 쫓겨간 좌익 무장 야산대가 활동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식량을 비롯한 물자보급과 여러가지 편의를 주민들에게 의존하였고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가입된 수도 적지 않았다. 또한 연좌제에 묶이거나 면 직원과 구장의 독려로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본서의 전통(傳通)을 받은 날 저녁 허지서장은 야간근무를 자청하고는 밤 9시경 농업창고를 열어 수감 중이던 보련원들(약 90여명으로 추정)을 귀가시켰다. 그는 마을을 떠나지 말 것이며 별도의 소집이 있을 시까지 생업에 종사하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다음날 본서의 이송 독촉 전통을 받은 그는 징발된 민간인 트럭의 고장과 자신의 칭병을 이유로 당일 이송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그렇게 이틀을 버틴 병산의 보련원들은 미리 본서로 이송되었던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본서의 명령이 더이상 내려오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남도경에서 내려온 처형금지 지시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보련원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에 대한 재판과정 없는 불법 학살이 어떤 이유로 중지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미국 정부의 중지요청설이 유력하다) 병산 보련원과 그 가족들로서는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지서장이 자기 관할의 대다수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막은 사례는 전국적으로 희귀하기에 미담 이상의 의미있는 역사로 기록될 만하다. 허지서장은 그뒤 본서와 경남계엄사령부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경찰조직을 떠나야 했다. 당시 그는 경위 진급 예정자이기도 했기에 개인적 아픔은 더욱 컸을 것이다.

 

편찬위원장 김성필의 눈길이 읽고 있던 원고로부터 거두어졌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문 활자는 두줄을 비우고 가운데 앉은 ‘읍으로의 도약과정’이라는 소제목이었다. 춘궁기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글자가 얼핏 보였다. 김성필이 고개를 들자 편집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시선을 맞추었다.

“해방과 육이오를 좌우대립에 보도연맹인가 뭔가로 도배를 해서야 되나.”

김성필이 혼잣말로 입을 열었다.

“해방되고 일본서 나오니 집이 있나 먹을 게 있나, 거기다 호열자라고, 전염병인 콜레라까지 돌아 민심은 더 흉흉하고…… 그리고 육이오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렇게 정부 책임으로 다 돌려버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성필의 어른들이 귀환동포였다는 사실을 두사람은 처음 들었지만 그냥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지서장 이야기는 미리 의논이 있었나요?”

김성필의 물음에 강문태 편집위원장이 즉각 답했다.

“아니죠. 그냥 집필 기준만 청탁서와 같이 보내고, 이교수 혼자 생각으로 쓴 거죠.”

“이 얘기도 백프로 사실이라고 어떻게 자신합니까?”

윤종열 부위원장이 나섰다.

“과거사위원회라고 거기서 전국적으로 조사할 때 우리 지역도 했고요, 보고서가 하나 나왔습니다.”

그때 김성필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네. 그래? 알았어.”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김성필이 말했다.

“그럼, 창고 속에 있으면 되지 굳이 우리 책에까지 펼쳐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엉덩이를 들었다.

“미안합니다. 한시간은 비워두었는데 일이 생겼네요. 참,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육이오 뒤에 읍으로 도약과정이 있던데, 그런 시기를 강조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김성필이 나간 뒤 두사람은 얼굴을 맞댔다. 역사 부문 집필자로 이규찬 교수를 추천한 강문태는 불편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윤독회 마치고 바로 이교수한테 연락할 걸 그랬나봐요.”

강문태가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게, 그랬으면 했다는 뜻이라고 윤종열은 받아들였다. 그건 솔직히 자신의 심경이기도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관심이 집중될 줄은 몰랐습니다.”

편찬위는 4개의 분과로 나누어 해당 원고를 검토했는데 자연환경과 지리, 역사, 행정 항목은 제1분과 담당이었다. 마감보다 일주일이나 늦은 걸 두고 불평이 있었지만 윤독회의 시작은 좋았다. 조선시대 끝머리와 일제시대에 새로 찾아냈다는 삼봉 병산지역의 고지도들이 여러장 펼쳐져 있었으며 읍을 가로지르는 강의 모습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탄성이 터져나왔다. 근 현대사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형편과 항일독립운동’으로 시작되어 해방정국과 6·25로 넘어갔다.

“이건 좀 생각해봐야겠네요.”

시대별로 끊어 읽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의 진행이었는데 처음으로 검토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보도연맹이란 소릴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지서장이 한 일은 엄연한 명령불복종인데 그걸 옳은 일 한 것으로 써놓아도 되나요?”

사업가이면서 관변단체 여러곳에 이름을 얹고 있는 오국재였다. 다른 위원들이 할 말을 찾는 동안 오국재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사일구면 사일구, 오일육이면 오일육이면 되지, 혁명은 뭐고 쿠데타는 또 뭔지 모르겠어요.”

잠시 뒤 병산포럼 회장을 맡고 있는 이수동이 말했다.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는 생각해봐야겠지만, 미담으로 넘기기엔 따져볼 게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주민들 목숨을 살리기로 결심했을 때 벌써 그게 옳은 건지 틀린 건지는 결판이 난 거 아니겠습니까. 지서 주임이, 예전에는 주임이라고들 많이 부른 것 같은데, 옷을 벗었으니 명령불복종 문제는 그걸로 끝난 거로 봐야지요.”

오국재가 무슨 말을 그렇게 장황하게 하느냐는 눈길로 바라보자 이수동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해방정국과 육이오 글 내용이 우리가 만들려는 책의 취지에 맞느냐 아니냐를 생각해봐야겠지요.”

“대한민국 군경이 죄 없는 양민을 학살했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목적에 맞을 리 있습니까? 아무리 병산 사람들 살려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 해도 지나치다 싶네요. 위원장님은 어떻습니까?”

다른 위원이 강문태를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크게 보아 우리가 만드는 게 기본적으로 읍지니까, 집필자가 고을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뜻에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는 걸 강조하다보니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보도연맹에 너무 치중한 건 문제가 있어 보이니 저희들이 생각해보겠습니다.”

강문태가 부위원장에게 시선을 돌리자 “네. 일단 유보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윤종열이 받았다. 그는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기억났지만 입을 다물었다. 언론인 출신인 윤종열은 기획력까지 뛰어나 축제위원회를 비롯해 문화 방면으로 활동범위가 넓었다.

“우리가 손을 조금 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국재가 필자들의 원고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윤문할 수 있다고 정한 편찬 원칙을 들먹이고 나왔지만 왈가왈부 시간을 끄는 것보다 보류 결정이 제대로 된 조처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윤독회가 끝난 다음날 오후, 강문태가 부위원장과 따로 만날 시간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아니 위원장님, 애써서 예산 통과시켜드렸더니 좌빨 글 싣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병산 출신 군의원 중의 한명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어제 얘기가 나와 유보를 시켰습니다.”

“여러 할 말 없습니다. 예산이 우리 군민들 혈세라는 말씀만 드립니다.”

그러고 하루 뒤 오늘, 편찬위원장인 김성필이 달려온 것이다.

 

“이교수 글이 택시가 되어버렸어, 단 사흘 만에.”

“네?”

택시라니 윤종열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어제 전화받았을 때 창가에 서서 거리를 봤거든요, 그때 택시 두대가 줄지어 가더라고. 아, 이 문제가 우리 편찬위원들 문제를 벗어나 누구나 입을 대는 게 되었구나. 누구나 손만 들면 세우고 태워야 하는 택시처럼 말요.”

윤종열은 알아들을 듯하면서도 조금은 아니다 싶은 강문태의 심사에는 대꾸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간명하게 처리하시지요.”

“간명하게?”

“네. 이교수에게 전화해 육이오 중에서 보련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니 줄여달라고 하는 거죠.”

“결국은 수정 요구네.”

“다른 이야기 해서 복잡해지지 않게 그냥 축소만 강조하시죠. 양이 줄면 용어나 문맥도 힘이 빠질 테니 그런 문제점들도 절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강문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었다. 상대가 전화를 바로 받았다. 열어놓은 한뼘 통화로 이교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좀 불편했습니다.”

“네, 그러셨군요. 편찬위원회에서 같이 읽어보고 이렇게 전화를 냈습니다. 잠시 시간이 괜찮으신지?”

“네. 말씀하십시오.”

“육이오 부분을 좀 줄여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도연맹 부분입니다.”

“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네, 편찬위원들이 원고를 읽고 나온 의견이 이렇습니다. 소제목이 해방정국과 육이오전쟁인데 보도연맹사건이 차지하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아니냐, 그런 얘기입니다.”

상대방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병산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책이니까 근본 성격은 읍지 아닙니까. 그러니 다른 지역과 다른 육이오, 다른 보련사건을 겪었다는 걸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 이야기는 앞서 나온 삼봉군지에서도 언급하지 못한 거니까 더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양이 많아졌다고 하시는데 되도록 상세하게 기술해야 전후 상황과 맥락이 파악된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된 겁니다.”

“교수님 뜻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편찬위원 분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겁니다,”

강문태가 잠시 뒤 “명백하게”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작동했는지 이교수가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제가 내일 병산에 가겠습니다. 세시경이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전화가 끊긴 뒤 윤종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상대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안 것 같습니다. 저도 내일 배석하겠습니다.”

윤종열이 방을 나간 뒤 강문태는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는 병산 출신으로 교편을 잡았다. 근무지도 고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교장으로 퇴직했다. 시와 수필을 쓰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향토사에 관심을 가졌다. 기회가 되어 군지 발간 때 글도 쓰고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강문태 하면 교육자일 뿐 아니라 문인이자 향토사 연구자로 이름을 굳혔다. 이태 전쯤, 그가 출입하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읍 승격 20주년 기념 이야기가 돌았을 때 강문태는 당장 읍지 발간을 떠올렸다. 명분과 의의가 서는 일이라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마침 도의원을 지내고 현재 병산읍발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성필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일이 진행되면서 강문태는 자기 생각과 배치되는 여러 변화와 맞닥뜨렸다. 그가 기획과 집필을 염두에 두고 각계 전문가들 중심의 편집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지만 편찬위원장을 맡은 김성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냥 편찬위 하나면 됩니다. 그 안에 교장선생님과 한두분이 편집위원으로 조금 전문적인 걸 맡아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내민 편찬위 명단은 한마디로 읍의 유력자 리스트였다. 출향인들 중에서도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을 편집위원으로 모셨던 때와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다. 이번에도 일부 부족한 예산을 후원금으로 충당했지만 그 형태는 전혀 달랐다. 전에는 도움을 준 사람들 이름을 책 말미에 올리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후원자 몇사람이 편찬위원회에 들어왔다. 구분되어야 할 후원과 편집이 섞이고 만 것이다. 편찬위 면면을 살핀 강문태는 지방자치 선거와 기업의 힘을 생각하면서 추세거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고유한 인문사회 영역인 읍지 발간에 뜬금없이 하청이니 용역이란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집필진이 한명도 편찬위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책에 필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기도 했다. “우리가 필자 선정해서 돈 주고 글을 받으면 그 글은 우리 편찬위원회 소유지요. 기획, 편집부터 감수까지 모두 우리가 하잖아요”라는 주장이었다. 강문태가 저작권 문제를 떠나서라도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해서 최종 편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보해두고 있지만 자기주장대로 되지 못하리라는 걸 그 자신이 확인하고 있었다. 편찬위 회의가 거듭될수록 그의 마음은 어쨌거나 안태고향(安胎故鄕)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여기고 이 일을 무난하게 끝내야 한다는 식으로 단순해져갔다. 지금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강문태는 읍지 편찬이 진행되어온 과정을 떠올리다 뻐근해오는 목을 몇번 돌리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강가에 자리한 편찬위 사무실의 열린 시야로 공단과 아파트단지들이 혼재한 읍의 한쪽 정경이 들어왔다. 인근 대도시에서 빠져나온 공장들이 공단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베드타운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다음날 세시, 이교수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썬글라스를 벗으며 그가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얼마 전에 눈이 좋지 않아 수술을 했습니다. 원고가 늦은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강문태와 윤종열은 실내에서도 썬글라스를 쓰겠다는 양해를 구하는가 했지만 그는 썬글라스를 저고리 윗주머니에 넣었다.

“눈까지 안 좋으신데 원고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됐네요.”

명함을 나누어 가진 뒤 강문태가 그렇게 곧장 본론으로 이끌었다.

“제 생각은 어제 잠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육이오 때 병산까지 포함해서 삼봉 전체에 희생만 있었다면 오히려 몇줄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살려낸 경우가 있으니까 제대로 기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병산 읍지니까 말입니다.”

강문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지만 하는 말은 달랐다.

“보도연맹 사건이 육이오의 전부가 되어버린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말씀처럼 병산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만 그게 우리 고장이 겪은 육이오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강문태가 이야기하는 동안 윤종열이 일어나 사무용 책상에 놓인 출력된 원고 2부를 들고 왔다. 처음부터 탁자 위에 놓아두는 게 분위기를 딱딱하게 한다 싶어 거기다 둔 것이었다. 강문태가 종이에 눈을 박더니 한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교수님의 해방정국과 육이오 서술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네요. 팔일오에서 정부수립까지가 하나, 전쟁발발과 보련조직, 그리고 삼봉의 희생자와 조사가 또 하나이고. 그다음에 병산지서 이야기 따로 하나죠. 해방정국 길이는 실상 얼마 안되는데, 두 단락이군요. 그리고 육이오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보도연맹 가입의 문제점과 처형, 조사까지가 앞의 해방정국하고 길이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다시 병산지서 이야기가 앞의 두 부분만 하니 편찬위원들이 불균형 소리를 한다 싶네요.”

이교수는 자기가 쓴 원고를 강문태가 자로 재거나 가위로 오리듯 길이를 따지고 비판주체를 슬쩍슬쩍 편찬위원으로 바꾸는 걸 지켜보며 잠깐씩 눈을 감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이 드러날까 걱정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나누면 해결될 거라는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아찔하기도 했다. 강문태라는 분이 이런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실상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고향의 향토사 연구자로 이름자를 외우는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는 강문태도 마찬가지였다. 족보를 통해 가문을 아는 보학이 향토사의 근간인데다 출향인에 대한 관심은 그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인근의 국립대 사학과 교수 이규찬을 필진으로 추천했던 것이다.

“어제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줄여달라, 이 말씀이시군요.”

이교수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할 말은 해야 했다.

“위원장님이나 부위원장님도 허형도 지서장 이야기는 알고 계시지요?”

“들은 적은 있지요.”

윤종열은 그저 입을 다물고 강문태가 답했다. 강위원장의 말을 듣고 이교수는 아, 안다고 해야 정확할 표현을 다르게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운을 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참 대단한 일이 병산에서 일어난 것 아닙니까.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죠. 그런 면에서 과거사위원회에서 삼봉 사건 조사보고를 몇줄로 넘어간 건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두분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읍지가 문헌으로서 역사서로서 가치를 지니려면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기록해둬야 되지 않겠습니까?”

강문태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교수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병산의 역사에 현대사만 있는 게 아닐뿐더러 기본적으로 개괄적 기술이어야지 너무 좁혀서 집중화시키는 것도 문제지요. 또한 지금 문제가 된 사건을 두고 이게 객관적 시각에서 완전하게 정리되었다는 말도 하기 어려울 테고요.”

“보련 얘기를 특정한 부분으로 보고 분량 얘기가 나온다면 그런 경우가 이미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조선 개국공신 정준발 장군에 의해 삼봉이 최초로 부()로 승격되는 얘기나 임란 때 의병으로 나선 수불스님의 공적 발굴은 위원장님이 참여하신 군지부터 길이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저도 상세하게 다루었고요. 그리고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니 보련을 줄여야 한다고 하시는데 몇년 전에 그때를 겪은 분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물이 정부산하 위원회에서 공적으로 나왔지 않습니까. 그걸 두고 문제를 삼는 건……”

이교수가 잠시 생각하다 뒷말을 줄였다.

“좀 그렇네요.”

그의 머릿속에 역사와 관련된 여러 낱말들이 오갔지만 그 정도로 끝냈다는 걸 두사람이 짐작 못할 리 없었다.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윤종열의 발언이 그걸 말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얘기를 너무 전문적으로 깊이 할 것 있습니까. 편찬위에서 만들고자 하는 게 우리 고장의 어제와 오늘을 자라는 학생들을 포함해서 모든 주민에게 알려 자부심도 가지고 내일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니 그 정도 틀에서 얘기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강문태가 할 말은 하겠다는 자세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정장군과 수불스님 모두 업적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인물이니까, 다루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교수님과 역사 기술 방법이나 뭐 그런 얘길 하자는 건 아닙니다만, 현대사 자체에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으니까, 민감하지 않을 수 없지요.”

띄엄띄엄 강문태가 연결시키는 말을 들으면서 결국 이교수의 목구멍 안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늦봄 햇살이 견디기 힘든지 금방 눈꺼풀이 떨리다 감겼다. 침묵이 잠시 흐르고 이교수가 주머니에서 썬글라스를 꺼내며 말했다.

“제가 요즘 썬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해서 역사를 보는 제 시선까지 색안경 쓴 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을 우스개에 담아보았지만 두사람의 표정은 딱딱하기만 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는 게 이 일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분량을 좀 줄여달라는 그 얘기로 받아주시면 됩니다.”

윤종열이 뒷말을 이렇게 붙였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우리 위원장님이 위원회에서 공격을 많이 받습니다. 주로 사업하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그런지, 하여튼 응원군은 없는데다 발간 날짜까지 다가오고, 애가 타실 겁니다.”

이교수는 원고를 늦게 준 것까지 이 자리에서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나 싶어 울컥 역정이 솟았지만, 고향 어른분들이다 싶어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그래도 위원장님 곁에는 부위원장님이라도 계신데, 제가 힘드네요. 며칠만 말미를 주십시오.”

세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 머리를 맞대고 보니 50대 중반의 이교수 모발만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고 나이가 한참 위인 두사람 머리는 새카맸다. 얼굴까지 비교하면 더없이 부조화스러운 모습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세상이었다. 이교수는 복도로 나오면서 잊고 있었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썬글라스를 썼다.

 

이규찬은 토요일 오전 일찍 연구실로 나갔다. 한적한 캠퍼스는 물론 블라인드가 내려져 조금은 어둑한 연구실이 자신의 심사와 어울린다 싶었다. 연구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에 걸려들었지만 전화 한통화로 끝내지 못하고 이렇게 연구실에 앉은 것은 고향 읍지에 싣는 글이라는 이유 단 하나였다. 부친 대에 떠났지만 삼봉은 선산이 있고 재실(齋室)이 있는 곳이었다. 국사전공 교수가 제 고향땅에서 만드는 읍지에 역사 부문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아 당연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규찬으로서는 등재지 학술논문의 사분의 일을 받는 연구점수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청탁을 받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 달려든 게 병산의 보련사건이었을 만큼 허형도 이야기는 진작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근현대사 전공이 아니기에 접어두고 있기는 했지만 논문 생각도 해볼 정도로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지금 그의 마음이 딱 그랬다. 애정과 미련은 한몸이었다.

당분간 밝은 빛을 피해야 하기에 컴퓨터도 켜지 않고 출력해둔 원고에서 6·25 부분을 찾아 읽어나갔다. 두번째 단락부터가 보련 이야기였다. 우선 눈을 머물게 한 것은 보련 가입의 강제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역의 가입인원은 말단 행정기관에’부터 ‘사적 감정에 따라 보복성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까지 긴 문장에 연필로 줄을 죽 그었다. 군 정보기관과 경찰 사찰계가 학살주체라는 문장에서는 한참을 망설였다. 구금과 처형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반드시 밝혀야 하는데 국군과 경찰의 후퇴와 같이 이루어졌다는 문장이 그걸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느냐 하는 판단을 해야 했다. 거기에다 그 문장에서 처형은 몰라도 구금이 후퇴와 같이 이루어졌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고 구금과 처형, 학살이라는 표현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는 상단의 여백에 이렇게 고쳐써보았다. ‘이들에 대한 학살은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낙동강 방어전선 아래 지역의 보련원들도 처형을 피하지는 못했다.’ 새로 쓴 문장을 가운데 두고 앞뒤를 읽어보니 연결도 무난해 보였다. 삼봉군의 보련원 구금과 처형, 그뒤의 조사부분은 그대로 두고 다음 단락으로 눈길이 넘어갔다.

단락이 바뀌고 시작된 ‘무엇보다 우리 병산에서’로 시작되어 ‘희생자를 줄였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라는 문장이 보련 이야기가 소개되는 두번째 문장과 중복이고 ABC와 갑을병도 그랬다. ‘병산에서 희생자를 줄인 데는 면장을 지낸 김후곤과 지서장 허형도의 결단이 있었다’로 고치고 ABC를 지웠다. 그의 눈길은 이제 김면장이 지서장을 찾아온 장면에 머물렀다. 우선 진외가가 아버지의 외가라는 뜻풀이를 지우고 ‘본서로 보낼 보련원들 중에 진짜 좌익사범이 있기나 하냐는 것이었다’를 읽었다. 그러다 몇줄 뒤에 지서장이 ‘보련가입자 대다수가 적극적인 좌익활동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를 발견하고는 뒤의 글을 지웠다. 지우고 다시 보니 아니었다. 김면장의 말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지서장 자신의 명백한 판단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중복이라는 급한 마음에 한쪽을 지운 것이다. 이규찬은 지운 부분에다 습관대로 한자 생()을 쓰고 동그라미를 쳤다.

다음 내용은 지서장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었다. 이미 보련결성 부분에서 부당한 가입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중복이라는 생각과, 그래도 좌익과 무관하다는 점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부딪혀 판단이 어려웠다. 그는 한참 머리를 싸매다 생()자로 살린 ‘보도연맹이 결성되기 전인 1949년 봄부터’라고 시작되는 문장을 ‘그 자신이 1949년부터 이곳에 근무했기에 김면장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로 고쳐쓰고 주민들의 야산대에 대한 편의 제공과 연좌제가 나오는 그다음 문장 모두를 걷어내었다. 고쳐쓴 문장은 곧바로 당일 밤에 허형도가 창고 문을 열고 사람들을 풀어주는 장면과 연결되었다. ‘그 자신이 1949년부터 이곳에 근무했기에 김면장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본서의 전통을 받은 날 저녁 허지서장은 야간근무를 자청하고는 밤 9시경 농업창고를 열어 수감 중이던 보련원들(약 90여명으로 추정)을 귀가시켰다.’ 뭔가 이가 빠진 듯 허전하고 실감이 없을뿐더러 문장의 이음도 불안했다. 앞서 지운 문장들, 활자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그어진 연필 줄이 자기 몸을 그은 칼자국 같아 마음이 아려왔지만, 이왕 시작한 것 빨리 끝내겠다는 초조함이 그 위에 포개지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 단락이었다. 호흡이 가빠서인지 처형 중지 명령은 경남도경 지시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재판과정 없는 불법학살이나 천행이 아닐 수 없다는 부분은 뺄 수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경위 진급 예정자였기에 개인적 아픔이 컸을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까지도 지워졌다.

이규찬은 진작부터 가슴에 치미는 스스로를 향한 화를 죽이며 줄이 그어지고 화살표와 줄 바꿈표 등 자기만이 아는 교정부호들이 어지러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전후 맥락이 끊어져 다시 써야 할 지점에 표시를 해가다 희생자 숫자와 조사기관 대목에서 눈길이 머물렀다. ‘1차조사는’에서부터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모두를 삭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슬며시 달려들었다. 아니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마음보다 손이 성급하게 유족회 결성과 합동묘 파괴가 담긴 문장을 지우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연필을 내던지고 일어났다. “이런, 제기랄!”

 

다음주 월요일 오전에 이교수는 강문태에게 전화를 냈다.

“아무래도 수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저희들이 어려운 부탁을 드렸나봅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팔일오부터 육이오까지만 다른 분에게 부탁을 드리는 방법이 있을 성싶은데 말입니다.”

이교수가 수정을 할 수 없다고 결정지었을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를 강문태가 말하고 있었다.

“역사 부분 전체가 제 이름으로 나갈 텐데 그 부분만 다른 이름으로 따로 나간다는 건 좀 이상하겠습니다.”

“아,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책에 필자를 개별적으로, 그러니까 각 항목마다 밝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런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교수로서는 필자 명기 여부를 따로 밝힌 원고청탁서를 지금껏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당장 메일로 받은 청탁서를 찾아볼 수도 없고 전화로 따질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전 모두 빠지겠습니다.”

약간 흥분한 이교수의 어성과 달리 강문태는 차분하게 답했다.

“네, 여러모로 아쉽지만, 그럼 이 문제를 그렇게 끝내겠습니다.”

전화를 끝내고 강문태와 윤종열이 만났다. 이교수의 글이 통째로 빠졌을 때의 대처방법은 두사람 생각이 거의 같았다. 문제가 된 부분은 내부자인 윤종열이 쓰고 나머지 글은 제삼자에게 의뢰한다는 것이었다. 윤종열은 그 자리에서 몇군데 전화를 해서 새 집필자를 쉬 찾아냈다. 이교수가 재직하는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출강하는 시간강사였다. 강과 윤은 이교수 원고를 새 집필자에게 건네주기로 했는데 무엇보다 편집마감 날짜가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윤이 쓸 글의 길이를 감안해서 해방과 전쟁 이전의 모든 원고를 1할 정도 줄이기로 결정했다.

윤은 다음날 새 필자를 만났다.

“우리가 내려는 책의 성격이 통상적으로 말해 읍지이기는 하지만 요즘 이런 저술들의 추세가 그 고장의 변화의 발자취를 통해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를 알리는 것 아닙니까. 편찬위원회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원고청탁서 대신 구두로 발간 취지부터 강조했다.

“미리 말씀드린 대로 발간날짜를 맞추어야 하니 어쨌든 2주 안에 원고를 주셔야 합니다. 여기, 군지하고 표본원고가 도움이 될 겁니다.”

윤은 이교수의 원고를 표본원고로 칭하면서 누가 썼는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며 글을 새로 쓰는 이유에 대해서도 사정이 생겨서라고만 했다. 다행히 시간강사로 이십여년을 버티고 있는 사십대 후반의 새 필자는 표절과 대리집필 등이 심심찮게 행해지는 학계 형편과 세상물정을 잘 아는 사람인지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윤은 표본원고 중에서 아주 독창적이다 싶은 자료나 기술은 건너뛰고 1960년대 이후는 소항목을 새로 짜고 자료와 서술을 상당히 다르게 할 것 등을 주문했다. 물론 문장의 호흡이나 서술어미를 바꾸는 이야기도 어느정도 구체적으로 했다. 어차피 윤이 다시 읽고 손을 볼 테니 이교수의 글에서 멀어지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닌 듯도 했다.

만남 뒤 윤종열은 한동안 끊었던 담배까지 꺼내 물며 자기가 써야 할 원고 생각에 매달렸다. 그 자신의 촉으로 이런 일은 사람을 나누고 꼬리표를 붙이는 데 유용하게 작동할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사람들이 입을 대지 않을 용어와 기술 방법을 열심히 찾아댔다.

 

1945815일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국내 지도자들은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새나라 건설의 준비에 나섰지만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선을 그어 남과 북에 군정을 각각 실시하였다. 군정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새국가 건설 계획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다 좌우 대립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건국준비위원회 이후 좌파 중심의 인민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었음은 물론 전 국민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우파의 활동은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삼봉에서는 고태수와 김노병이 지부를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 우위의 정국은 수십개의 정당과 역시 수십개의 신문사를 출현하게 했으며, 당시 유엔사무총장 리(T. H. Lie)가 미국측 자료에 근거해 ‘남조선의 경제상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보다 더 악화된 것같이 보인다’는 보고서를 제출할 정도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전염병까지 퍼져 혼란 상태를 가중시켰다. 이러한 와중에 좌익은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지 결정에 대한 찬성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이후 총파업과 대구폭동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삼봉·병산에서도 좌익은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제 때 경찰에 몸담았던 이○○와 지주 김○○를 친일파로 지목하여 살해하고, 서울서 내려와 있던 대학생 성시춘이 공산당을 비난한다고 해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백주에 살해하는 등 잔인성을 보였다.

남북한을 아우르는 정부수립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완전한 결렬로 무산되면서 단독정부 수립의 수순에 들어갔다. 194711월 유엔총회에서의 한국 총선거안 가결, 소련의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방문 거부, 유엔 감시하에서의 남한 총선거에 따라 1948815일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우리 삼봉군의 제헌국회의원 당선자는 무소속의 김기탁이었으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1950625일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승인하에 전쟁을 일으켰다. 삼봉은 다행히 낙동강방어 전선 아래에 속해 직접적인 피해를 피하면서 후방 병참기지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봉초등학교와 병산초등학교를 비롯한 군내의 모든 교육시설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였으며 특히 새로 지은 병산중학교는 임시 육군병원으로 쓰였다.

비록 후방이었다 해도 물적·인적 피해는 피할 수 없었는데 무엇보다 수많은 삼봉·병산 지역의 젊은이들이 전선에 나가 몸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전몰군경과 전상군경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된 바가 없다. 전후 혼란과 행정 부족이 원인일 터지만 외국의 여러 마을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새겨 기념하는 조형물이 없다는 것은 아쉬우면서 반성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비롯한 민간인 희생도 따랐다. 국민보도연맹은 광복 이후의 사상대립에서 좌익에 물든 이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품기 위한 반공조직이었다. 정부는 좌익활동을 했던 이들을 일정기간 교육시켜 탈맹시키기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북한의 전쟁도발로 모두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병산의 보도연맹원들은 도 경찰국의 처형 중지 지시와 당시 지서장 허형도와 전 면장 김후곤의 도움으로 구제되었다.

삼봉과 병산은 이렇게 광복과 정부수립,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경제개발로 비약적 발전이 시작되는 1960년대를 맞았다.

 

“그래요, 진작 이렇게 줄여써야지 뭐 그리 시시콜콜히 파고들 게 있어. 도경의 지시가 있었다고 먼저 전제를 하니까 지서장 문제도 넘어갈 수 있고. 좋습니다.”

이교수 원고를 보고 명령불복종 이야기를 꺼낸 오국재였다. 제1분과 윤독회는 김성필 위원장까지 참석해서 제법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오국재의 첫말이 긴장을 풀어주는 듯했다.

“근데 말입니다.” 이수동이었다.

“역사에서는 선후라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임진왜란 나기 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두사람이 동인 서인 하는 사색당파 땜에 보고를 다르게 해서 국방을 소홀히하고, 그 결과로 어떻게 되었다, 그렇게 인과관계가 있는 선후 말입니다. 저번에 무슨 교수가 쓴 글에서는 지서장이 창고 문을 열어준 뒤에 도경에서 처형금지 명령이 내려왔다고 되어 있던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버릇대로 이야기를 늘어뜨리기는 했지만 아무도 얼른 대꾸를 못했다. 오국재가 “그걸 부위원장님이 왜 몰라요. 하긴 앞의 글이 워낙 편향이 심해 내용이 백프로 옳다고 단정할 자신도 없긴 하지만, 명령불복종 문제도 지우고 정부의 개입이 있어 희생을 줄인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배치한 거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라고 다시 나섰지만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틀린 지적은 아니네요. 제가 오의원님 말씀대로 전체를 생각하다보니 놓친 것 같습니다.”

당사자인 윤종열이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렇게 쓰면 해결될 것도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메모한 글을 읽었다.

“이 과정에서 병산의 보도연맹원들은 당시 지서장 허형도와 전 면장 김후곤의 노력과 도 경찰국의 처형 중단 지시에 의해 구제되었다.”

“방금 읽은 그 문장을 앞에 나가셔서 저기 화이트보드에 써보시죠.”

말을 아끼던 김성필이 윤종열부터 여러 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부분은 제1분과뿐 아니라 편찬위 전체에서 감수까지 받기로 했으니까 명확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윤종열이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모두들 “그럼요”라면서 편찬위원장의 발언에 동의를 표했다.

 

『병산의 어제와 오늘』은 그로부터 5개월 뒤에 나왔다. 4·6배판형 상하권 1천부 한정판으로 비매품이었다. 예정보다 두달이나 늦은 것은 필자가 바뀐 ‘역사’ 때문이 아니라 ‘인물과 성씨’ ‘문화·종교’ 항목 때문이었다. 어떤 대상을 넣고 빼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문화·종교 쪽에서 재실 사진과 교회 사진을 두고 시간이 소요된 건 뜻밖이었다. 자료 성격이 짙은 모든 책에 정오표가 붙어 나오는 건 아니지만 편찬위에서는 발간 뒤 정오표를 만들었다. 하권 뒷표지 바로 앞에 끼워둔 한장짜리 정오표에는 26개가 촘촘히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오탈자였으며 ‘역사’ 항목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한 삼봉·병산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가 열린 2주일 뒤 편찬위원회는 읍사무소 인근의 한 식당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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