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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제8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상실의 세계와 세계의 상실

신경숙론

 

 

이재영 李在榮

1963년 대구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현재 베를린자유대학 독문학 박사과정. tugend21@yahoo.co.kr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항상 집으로.

─노발리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우리는 가속적인 변화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속도는 우리 시대의 표징이다. 속도의 황홀함에 매혹된 시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며, 생산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생산을 충족시키고 있다. “같은 강에서 두 번 같은 물결을 탈 수 없다”는 고대의 구절에서 우리는 더이상 강의 같음과 수위의 균형을 연상하지 않는다. 변화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만 있는 것이며, 용도를 잃은 과거는 신속하게 폐기된다. 목적에 대한 질문과 성찰은 약점의 징후로 간주되고, 가치는 오직 계량될 때에만 존재를 인정받는다. 전체에 대한 근심을 저버린 마끼아벨리주의자들, 그들이 우리 시대의 군주들이며 전위들이다.

신경숙(申京淑)의 소설들은 이러한 시대의 지배적인 흐름과 궤를 달리한다. 신경숙 소설들에서는 시간이 지속적으로 과거의 개입을 받고 있으며, 전망 대신 회상이, 기대 대신 상실이, 생성 대신 몰락이, 빠름 대신 느림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시대정신과 정반대 쪽을 향하고 있는 신경숙 소설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성격과, 그 세계 안에서의 문학의 위상을 고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상실의 세계

 

신경숙의 소설들은 부재로 충만하다. 인간간의 소통과 신뢰, 몸과 감각의 일부, 고향의 집,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 어떤 목소리, 젊음, 영원성, 그리고 나의 자리가 비어 있다. 부재하는 것이 내게 가치있는 것일 때, 부재는 단순히 어떤 것의 없음에 대한 의식을 넘어서 상실 혹은 기대의 감정을 낳는다. 상실감은 이미 존재했던 가치있는 것의 부재를, 기대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치있는 것의 부재를 향한다. 나아가 이러한 부재가 도달될 수 없는 것을 향할 때, 상실과 기대는 슬픔과 결합되어 동경으로 전화된다. 복구와 구현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동경의 강도는 현재의 고통 및 공허감과 비례한다.

시간을 축으로 삼았을 때, 신경숙 소설세계의 출발점은 강렬한 동경이다. 권태롭고 갑갑한 고향을 벗어나 도시로 가고 싶은 마음이다. 어릴 적, 가볍게 날고 있는 것들을 사랑하던 신경숙이 도시에서 놀러 온 친척에 대해 느꼈던 선망은 작품에서도 “산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보일까?”(『풍금이 있던 자리』 144면)1라는 기대로 표현된다. 그러나 고향을 고통의 공간으로 경험하는 「지붕」(『강물이 될 때까지』)의 여자가 철새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이런 기대는 처연한 갈망으로 상승된다. 이런 갈망의 극한을 지시하는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외딴 방』의 쇠스랑이다. 무료한 고향을 떠나 도시의 큰오빠에게로 가는 것이 꿈인 소녀는 현실과 소망의 괴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러나 도시에 도착한 후에도 동경은 잦아들지 않는다. 여전히 새는 날아가기에 아름다우며, 「직녀들」(『풍금이 있던 자리』)의 P는 늘 여기가 아닌 저기에 대한 말을 하고, 『깊은 슬픔』의 화연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며,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당신’에겐 언제나 저 멀리 있는 것이 이긴다. 그러나 동경은 미래와 세상 바깥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 고향을 더 강렬하게 지향한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풍금이 있던 자리』)의 이숙은 사라졌다는 이유로 공룡에 집착하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고향은 이제 빈번히 이상화되며, 연어로 상징되는 회귀욕망은 인간의 본질로 파악된다. 전통은 모래 발자국을 해독함으로써 길을 찾아낼 줄 아는 지혜로운 것이고, 고향은 어느 상황 속에서라도 내 편이 돼줄 것 같은 무한정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의 처소이자 어머니의 삶으로 대표되는 본원적 진실의 터전이다. 과거는 자아와 세계의 분열 이전의, 의미로 충만했던 시대로 된 것이다.

반면 도시는 이런 고향을 파괴해온 잔인한 유혹과 강제로 그려진다. 눈물을 흘리며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은 폐허 같은 빈집들이다. 도시의 부화(富華)는 농민들을 정체감과 빈곤감에 빠뜨리고, 고향은 지긋지긋한 곳이 된다. 가족의 재산을 몰래 팔거나 공금을 들고 달아나는 오빠들,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어머니가 향하는 곳도 도시다. 도시의 눈부신 속도를 실감하게 하는 기차는 고향의 한가운데를, 수많은 아이들의 목을 자르고 지나간다.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철로는 도시의 폭력이었으며, 이별과 죽음을 낳는 금기의 자리였다.

도시에 진입한 후 오히려 동경이 더 강렬해진 것은, 도시가 당초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향보다 더 회피하고 싶은 곳이었음을 반증한다. 실제로 신경숙 소설에서 도시에 사는 화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막연한 두려움에 진저리를 치고 있으며, 일찍부터 삶에 대해 겁을 내게 된 사람들이다. 이는 이 화자들이 도시의 삶에 원활하게 섞여들지 못하고 고립된 이방인의 배제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저들과 섞일 수 있다면”(『강물이 될 때까지』 17면)이라는 선망은 곧 죽을 때까지 삶의 외곽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으로 치닫는다. 세계의 주변을 배회하기만 하는 자아는 혼자라는 인식과 함께 자신을 배척하는 세계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다. 이런 공포는 때로 적의로 변하여 세상에 대한 비정형적인 증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행기의 부적응이 낳는 한시적 좌절감을 넘어서 세계 전반에 대한 두려움, 즉 세계 내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까지 도달한 상태는 어떤 특수한 ‘충격적인 경험’(trauma)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외딴 방』에서의 희재의 죽음이 바로 그런 경험이다.

『외딴 방』은 자아의 구원을 위해 치르는 초혼제였다. 희재의 죽음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놓인 장애였으며 세계를 어두움으로 뒤덮는 폐허였다. 즉 희재의 죽음이 낳은 결과는 세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자아와 세계의 단절이었던 것이다. 희재의 죽음 이후 화자는 타인과의 교류를 일절 거부할 것을 맹세한다. 이런 맹세는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오래전 집을 떠날 때』)에서 숨어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나타난다.

희재의 죽음이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그 근저에서 뒤흔들게 된 것은, 그 죽음의 극단적인 감각적 직접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그녀의 축 늘어진 몸.”(『외딴 방』 2, 229면) 사람 몸의 끔찍한 파괴와, 그 파괴 위에서 창궐하는 죽음의 식욕, 몸의 허망한 물질성, 그 몸에 대한 사랑과 구토의 극단적 동시성, 차단할 수 없는 강렬한 부패의 냄새, 이러한 죽음의 가차없는 폭력적 사실성, 그 죽음의 과정에 자신을 참가시킨 운명의 잔인함과 이해할 수 없음─희재의 죽음은 섬광으로 번뜻 엄습하는 순간의 전율이었으며, 모든 익숙함을 앗아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전복이었다.

이로써 세계를 향한 원근법의 촛점은 죽음과 소멸의 자리에 놓이며, 상실되는 것은 세계 내 사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된다. 세계는 불모의 황무지일 뿐이다. 침몰이 사물의 질서이며 존재란 무(無)로부터의 헛된 도주에 불과하다. 무는 일체의 의미부여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며 조롱한다. 무의 지배 앞에서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이 존재의 허망한 위태로움이 안겨주는 공포에 내맡겨져 있다.

의미가 부재할 때 행동력은 마비된다. 신경숙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무력감과 의욕상실, 공허감, 피곤함, 방심의 상태, 수동성, 우유부단함 등을 보이는 인물을 숱하게 만난다. 이는 세계의 공허에 대한 저 ‘충격적 경험’에서 초래되는 직접적인 반응들이다. 일체의 세계 내적 시도를 불가항력적 위력으로 유린하는 죽음은 신경숙의 작품에 편재(遍在)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사고 혹은 병으로 죽고, 자살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뱃속의 아이들은 유산되거나 사산된다. 죽음은 느닷없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때이르게 찾아든다. “거역할 수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이 불시에 삶에 끼여들었다가 휘이 저어놓고는 잠시 숨는”(『아름다운 그늘』 67면) 것이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강박적 집착은 희재의 죽음이 낳은 충격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이제 상실은 세계의 한 측면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보편적 연관이 된다. 무엇이든 원형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 시간은 오로지 파괴의 과정으로만 인식되며, 생성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보존이나 발전의 원리가 아니라 파괴와 몰락의 원리이다. 이것의 피할 수 없는 절대성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상실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오늘은 또 어제가 되어 내일 흐를 것”(『외딴 방』 1, 87면)이며, 미래 또한 상실의 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상실은 대상을 접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

죽음과의 조우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자아는 모든 여타의 속성들이 사상(捨象)된, 오직 순수한 존재성으로 환원된 자아이다. 자아와 죽음이 맺고 있는 이러한 관계 속에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며, 따라서 자아는 단독자의 고독 속에 휩싸여 있다. 신경숙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독은 사회의 거부나 자아의 사회적 능력 부족보다 더 깊은 근원에서 비롯된다. 타인과 동화되고 싶다는 욕망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동화가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확신이다. 신경숙 작품들 속의,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애당초 만남을 회피하는 여러 인물들은 만남이 항상 갈라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억압된 확신을 표시하고 있다. 타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늘 타인의 자리를 우회하는 사람들은 공허감을 견뎌내기에도 힘겨워하는 자아에게 타인이 안겨줄 것은 상처밖에 없으리라는 인식의 완강함을 보여준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들어서서 어떤 사태에 직면하기 이전에 이미 자아는 자기 안으로 후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실과 죽음은 내 안에서도 진행된다. 망각이 그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수많은 인물들이 경험하는 기억상실은 세계를 관념 속에서나마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은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기억밖에 없는 것 같았어. 그것만이 유일한 것 같았다”(『깊은 슬픔』 하 273면)라고 말한다. 망각은 상실의 세계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방도의 박탈이며, 삶을 이미 잠식해 들어오는 죽음이다. 상실된 것에 대한 기억의 상실은 세계의 최종적 지워짐이자 나의 정체성의 부식(腐蝕)이다. 그러므로 “기억이란 시간과 함께 엷어지게 되어 있”(『기차는 7시에 떠나네』 212면)다는 인식과 망각의 경험은 아득함을 넘어선 두려움과 절망을 낳는다.

이런 절망이 커질수록 저 ‘충격적 경험’ 이전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커지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의 세계가 끔찍할수록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고 싶은 퇴행적 욕망은 절실해지며, 내게 있는 이전의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안간힘은 필사적으로 된다. 도시에서 과거와 고향을 향한 갈망이 오히려 더 강렬해진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신경숙 소설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년으로의 퇴행욕망을 느끼는 인물들, 손가락을 빨고, 울 때 유년으로 복귀하는 느낌을 얻기 때문에 곧잘 울고, 어머니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며, “엄마의 체취만을 믿고 엄마의 기척만을 따르며 엄마만 있으면 되었던 때”(『외딴 방』 2, 271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결국 아직 자아와 세계가 분열되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반성적 거리가 생겨나지 않았던, 그러므로 삶과 세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있지도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게 인간이다”(『딸기밭』 243면)라는 단정 속에서 연어로 상징되는 귀소본능은 인간의 실체적 본질로 격상된다.

그러나 과거는 시간의 가차없는 흐름 속에서 상실되어가고, 따라서 두려운 현실로부터 과거의 충만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린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향은 비어 있다. 고향집은 과거의 충만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기도 하다. 늙고 병드신 부모님은 더이상 믿을 만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없으며, 도시에서 돌아온 나에겐 “밖의 바람을 막아주기엔 창호지가 너무 얇아 보인다.”(『강물이 될 때까지』 58면) 다른 한편 고향 역시 나를 상실한다. 누구도 습관의 편안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온 후부터,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다른 습관을 들인 후부터 어머니와 나는 서로 할말을 잃어갔다.”(『오래전 집을 떠날 때』 274〜75면)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도시의 습관에 더 익숙해졌음을, 따라서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사실은 이미 낯설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귀의 불가능성 앞에서 체념에 이르지 못할 때, 그리움의 감정은 격화된다. 접근할 수도, 회복시킬 수도 없는 것들을 향해 솟아나는 이런 그리움은 또한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은 이미 사라진 것, 혹은 사라지고 있는 것 속에 있다. 현재의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아름다움도 대상의 현재적 속성이 아니라 그것의 사라짐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개개인이 보는 가장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고귀한 것 속에는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여 있”(『딸기밭』 13면)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왜 비극의 느낌을 주는지. 왜 아름다운 건 한자리에 있질 못하는 것일까?”(『깊은 슬픔』 상 11면)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 질문의 역(逆)명제, 즉 한자리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경숙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은 늘 조락과 상실의 서정을 동반한다. 자연의 미는 곧 떨어져 사그라져버릴 꽃잎처럼 조락하는 것들에서, 인간의 미는 『깊은 슬픔』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나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에게서 감지된다. 인간의 무방비의 실존을 제유(提喩)적으로 표현하는 목덜미나 잠든 얼굴에 대한 비상한 관심도 이런 처연한 아름다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상실의 기색이 내비치지 않는 순수하게 밝은 아름다움은 오히려 불편하고 어색하며 두려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황홀한 아름다움은 여지없이 다시 찾아들 죽음과 상실로 인한 슬픔의 낙차를 키울 뿐이며, 밝고 생동하는 것들은 실은 그 속에 배태되고 있는 죽음을 겨우 감추고 있을 뿐이다. 「조용한 비명」(『강물이 될 때까지』)에서 흰 상의를 입고 탄력있는 다리를 움직이며 테니스를 치고 있던 젊은 여자는 곧 물에 빠져죽고 만다. 「배드민턴 치는 여자」(『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젊음과 건강의 정점에 서 있는 여자들은 그녀들을 구경하는 공사장 인부들의 탐욕적인 시선에 의해 이미 유린되고 있다. 『깊은 슬픔』의 은서는 화랑 입구를 온통 생기로움으로 꽉 채우는 여고생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이렇게 상실의 절대적 우위를 출발점으로 하는 신경숙의 작품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비가(悲歌)적 서정이다. 회복될 수 없이 사라진, 혹은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환기하는 우울과 슬픔과 고통의 절실함이 신경숙의 작품이 주는 감동의 핵심이다.

이런 비가적 서정과 세계관은 근대적 합리성과 계몽의 지배적 경향이었던 낙관주의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이 이성의 힘으로 역사를 지배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는 표상된 미래를 최대한 신속하게 현재로 끌어당기기 위한 역사의 가속화를 낳았다. 낙관주의적 세계관에서 흔히 거침없는 진보를 상징하는 기차가 신경숙의 작품들에서는 늘 이별과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은 이런 대립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합리성과 낙관주의에 대한 회의는 신경숙의 산문과 작품에서 빈번히 피력된다.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닿지 못할 논리 밖의 세계들”(『아름다운 그늘』 46면)이 있으며,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진리를 은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합리적 세계의 바깥에 있는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붙잡으려 하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들,(…)끝끝내 암호처럼 남을 견뎌야 할 것들”(같은 책 27면) 속에 오히려 더 깊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논리와 개념적 고찰이 아니라 직관이라는 것이다.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회의가 낳는 결과는 수동성이다.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그 성질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이런 것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의 합리적 파악 가능성을 일절 부인하는 순간, 그것에 대한 저항은 맹목적이 되거나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신경숙의 여러 인물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현실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자기 맘대로 안되면 아파버리는 게 제일 마음 편하”(『풍금이 있던 자리』 249면)다는 체념은 회복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아직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리는 데 그친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만 삶은 이해하는 게 아닌지 모른다. 그냥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깊은 슬픔』 상 215면)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선택은 삶의 운명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에서는 삶의 진행 자체가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으로 일반화되고, 수동성은 그런 불가해성에 대한 최선의 대응으로 옹호되고 있다. 절대적 위력을 지닌 운명에 저항하는 것은 파탄과 몰락을 앞당기고 첨예화할 뿐이므로 최선의 길은 운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지각적으로라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런 운명적 세계관에서 바라볼 때, 현실을 의지의 힘으로 바꿔보려고 하는 사회운동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이다. 신경숙의 작품에서 사회운동에 가담한 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좌절한다. 「초경」(『강물이 될 때까지』)의 학생운동을 하던 오빠는 추적망상에 시달리고, 「어떤 실종」(같은 책)의 어머니는 강제징집 후 의문사한 아들로 인해 처참하게 미쳐가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운동을 추동하는 힘은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열풍(…)광풍”(『풍금이 있던 자리』 264면)과 같은 집단심리로 간주된다. 그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인간의지의 무력함과 제한성에 대한 확인과 이로 인한 좌절감만 남을 뿐이다. 결국 사회운동은 당초부터 허망했던 것이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면서 개인적 취향만을 좇던 「딸기밭」의 유는 대학졸업 후 기아문제나 환경보호 등 더욱 보편적인 문제들로 건강하게 관심을 확장해간 반면,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유은기는 이제 세상의 한 끝에서 구멍가게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을 추동해온 정의에 대한 참된 열정과 불의에 대한 공분(公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과 책임감, 사회운동이 낳은 자유의 신장은 성급하고 억지스러웠던 낙관에 대한 회의 뒤로 가려지고 만다. 이런 일면성은 희재의 죽음 이후 신경숙이 지니게 된 세계관, 즉 현실의 전면 뒤에 더 본질적인 죽음의 세계가 놓여 있다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의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지금까지 재구성해본, 신경숙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상실의 세계는 그간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급속한 도시화를 배경으로 농촌과 도시, 고향과 타향을 대립시키고 있으며, 그런만큼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접근하는 신경숙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색은 희재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 의해 지배되는 비관과 상실의 서정인바, 이러한 서정은 그 직접성의 강렬함과 여러 미적 장치들에 힘입어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 댓가는 현재의 전모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의 포기이다. 세계가 상실로서 파악되고 난 후, 사실상 세계는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한 것이 되고 만다. 지배적인 세계인 도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강물이 될 때까지』 137면)는 무의미한 혼돈일 뿐이며, 세계는 오직 자아의 고통을 통해서만 감지된다. 자아의 고통이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세계는 동일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계를 향한 시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만 고착될 때,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고유한 가치를 잃게 되며, 따라서 이를 향한 천착의 절실함도 사라진다.

신경숙의 작품 가운데 화자가 과거의 사건에 대한 충실한 보고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등대댁」(같은 책)이나 『외딴 방』 등에서는 구체적인 사실성에 바탕을 둔 미적 묘사력이 신뢰할 만한 실감을 더해주는 반면, 화자의 현재가 중심에 놓여 있는 「조용한 비명」이나 「해변의 의자」(『풍금이 있던 자리』)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고통의 정체가 막연하여 미적 묘사력이 오히려 현혹적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화자가 현재에 접근할수록 미적인 것이 세계에 대한 본원적 접근의 과정성을 상실하고 이미 존재하는 인식을 위한 장식적 기능으로 제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실의 세계관이 낳은 다른 하나의 결과는 고통의 원인이 항상 세계에서만 찾아지며, 자아는 반성과 비판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이다. 운명의 불가항력적 위력이 커질수록 자아의 자율성과 책임은 축소된다. 세계에 대한 저항이 허망한 것으로 파악될수록 세계에 내맡겨진 자아의 운명에 대한 자기연민은 커진다. 죽음의 지배에 대한 인식이 완강한만큼, 자신의 무력함과 소극성에 대한 일체의 비판은 자아의 핵심을 뒤흔들어놓을 수 없는 피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2. 세계로부터의 후퇴─사랑과 글쓰기

 

삶이 허망한 것이라 해도 “욕망을 놓는 일은 내 몸과 마음을 가눌 근거를 무너뜨리는 일”(『풍금이 있던 자리』 282면), 곧 죽음으로 향하는 일이다. 세계 내에서 정주(定住)할 곳을 찾지 못하지만 욕망을 제거할 수도 없는 자아에게 남는 선택은 세계로부터 후퇴하여 은신처로서의 반(反)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계에 포위되어 있지만 세계의 법이 인정되지 않는,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에 거역하는 반세계는 사랑과 글쓰기에서 찾아진다.

산문 「사랑이 와서」에서 신경숙은 자신의 사랑관의 변화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사랑에 대한 최초의 관념은 내면의 은밀한 소통과 공감이었다. 그러나 나의 드러냄의 바탕이 되는 신뢰가 자주 배반당하면서 사랑의 관념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 일로 바뀐다. 외면으로서의 세계는 자아로부터 분리된 차원을 넘어 자아를 적대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되었으며, 그런만큼 나와 나의 보호자 사이의 사랑은 배타적으로 된다. 여기서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로 설정된 연인은 그 자신의 공간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연인 역시 그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의지와 조건을 지닌, 자신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자이다. 이를 깨닫자 이제 사랑은 붙잡을 수 있는 현실을 벗어나 “다가갈 수 없는 것, 금지된 것, 이제는 지나가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들”(『아름다운 그늘』 22면)을 향하게 된다. 이는 이러한 그리운 것들이 나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는 내 안의 관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숙의 인물들은 대개 연인을 보호자로서 표상하고 있다. 불가항력적으로 침입해오는 외로움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해줄 유일한 것은 사랑이며, 사랑을 향한 갈망은 “그의 속에 섞여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강물이 될 때까지』 93면)아도 되는 상태에 대한 갈망이다. 사랑은 상실의 세계 안에서 영원성을 기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며, 연인이란 나를 영원히 보호해줄 사람이다. 나를 보호해줄 한 사람이 있으리라는 믿음만이 삶을 유지해낼 힘을 제공해준다. 옛집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사랑은 세상으로부터의 안전한 후퇴를 가능케 하는 새 집을 만드는 일이다. 이 집안에서만 비로소 삶의 의지와 생기를 회복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런 집을 가능케 하는 연인에게 모든 책임을 맡기고, 그 연인에게 자신은 오직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완성태로서 표상된다.

강물로 섞여드는 빗방울처럼 연인 안으로 융합해 들어가고자 하는 이런 소망은 그러나 연인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연인에 대한 순종은 실은 연인의 나에 대한, 나의 소망에 대한 순종이다. 사랑에 대한 이런 소망을 실현해주기 위해 연인은 나의 소망에 충실하게 복무해야 하며, 타자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부정해야 한다.

억압에 의하지 않는 한, 연인은 이러한 요구를 결코 지속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이는 동성애나 근친상간, 혼외의 사랑관계 등에 대한 사회의 금지 이전에, 사랑마저 도구화하는 세태 이전에,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저 ‘욕망을 놓는 일’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대에서 출발하는 사랑의 관계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좌절 후에 도달하는 그리움으로서의 사랑은 이미 현실의 대상을 통해 만족될 수 없다. 그리움의 조건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거리이며, 이 거리가 좁혀질수록 대상도, 그리움도, 사랑도 신기루처럼 스러진다.

『깊은 슬픔』은 이 그리움으로서의 사랑이 현실대상을 향할 때 초래될 수밖에 없는 좌절을 그리고 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저버릴 수 없는 사랑을 실현할 일체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은서는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은서와는 달리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실현을 현실 바깥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세계로부터 한번 더 후퇴하여 내면에 머무른다. 이 내면에서의 그리움의 활동이 글쓰기다.

『외딴 방』의 화자는 이렇게 내뱉는다. “나는 작가가 될 거야.”(『외딴 방』 1, 128면) 회사가 노조 탈퇴를 야간학교 입학조건으로 내걸자 노조를 탈퇴한 후,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수치심에 시달리던 화자가 내뱉는 말이다. 이 말에 이어 화자는 이렇게 자신에 대해 다짐한다. “나는 글쓰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아무래도 괜찮다구, 지금도 하나도 안 부끄러워. 아무렇지도 않아.”(같은 곳) 즉 문학은 현재의 고통으로부터의 피난처이며, 세계와 자아의 분열이 해소된 상태를 꿈꿀 수 있는 곳이다.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을 가상 속에서 대체(代替)적으로 실현하게 해주는 이러한 문학은 보상의 문학이다. 이런 점은 다음의 말에서 더 분명해진다. “나는 꿈이 필요했었다.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 큰오빠의 가발을 담담하게 빗질하기 위해서, 공장 굴뚝의 연기를 참아낼 수 있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소설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같은 책 222면) 즉 문학은 현실의 고통과 폭력을 감수하면서도 살아남게 해주는 생존전략이자 진정제이다. 현실에서 욕망의 충족을 포기한 자아가 현실의 견고함이 제거된 상상의 세계 안에서 대체적인 만족을 추구하겠다는 이러한 의도는 현실과 문학을 분열과 조화의 영역으로 대립시킨다. 자유는 내면 안으로 갇히게 되지만, 이로써 현실을 견뎌내고 체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경숙은 이렇게 술회한다. “저는 그동안 소설 속으로 열심히 숨어다녔습니다. 제게는 소설 속만큼 깊이 숨을 곳은 없었습니다.”(『아름다운 그늘』 6면) 이렇게 미적 영역으로 자아가 후퇴함으로써 행동의 필요는 줄어들고 현실은 방치된다. “시나 소설들을 읽고 있으면 굳이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렇게 의자에 파묻혀 혹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시나 소설과 함께 썩어가도 별수없지, 싶은 것이다.”(『오래전 집을 떠날 때』 112면)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가 현실적 고통에서 비롯되고 이 고통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한, 이를 통해 산출되는 글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외딴 방』의 나는 정치상황을 작품 속에 반영해야 한다는 셋째오빠의 요구에 이렇게 항변한다.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이 좋아서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외딴 방』 1,  261면) 이런 항변은 고통받는 개인의 특수한 운명이 보편적 사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런 고통에서 비롯되는 상상의 산물 역시 일반적 가치를 획득한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상상이 고통과의 연관을 잃고 자족적으로 되지 않는 한, 예술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거리는 비판과 저항을 위한 거리로 될 수 있다. 이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예술은 지배적인 관념과는 다른 모습의 현실을 그려낼 수 있게 되고, 이로써 현실에 대한 거부는 기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탐색으로 적극화된다. 기존 현실에 그대로 편입되느니 차라리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겠다는 태도에는 도피와 저항, 긍정과 부정의 계기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중성 가운데 어떤 계기가 우세하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신경숙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져야 한다.

신경숙은 자신이 소설 속으로 숨어다녔다고 말하지만, 씌어진 글이 서랍 속에 묻혀 있지 않고 발표되는 한 소설은 드러냄이다. 자전적 성격이 짙은 신경숙의 소설들은 오히려 다수의 독자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자전적 성격은 문학을 내면에 대한 타협 없는 정직한 관찰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내게 다른 거울은 없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표현해내려고 애썼다”(『아름다운 그늘』 40면)는 신경숙의 진술은 「멀리, 끝없는 길 위에」의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 문학의 본령이 있음을 강조하는 어느 교수의 한마디를 깊이 새겨둔 것과도, “내 그림 같지 않기 때문에”(같은 책 229면) 유화를 피하고 수채화만 삼십년 동안 그려왔다는 화가 강연균에 대한 이야기와도 통한다. 신경숙이 민중문학에 대한 자책을 느끼면서도(산문 「눈 내리는 날에」) 자전적이고 내면적인 글쓰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문학 안에 고통의 극복에 대한 전망과 정치성을 실으려 할 때, 그 결과는 내면화되지 못한 겉도는 주장일 뿐일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현실과 상상력이 지닌 운명을 헤치고 나가서 먼저 저를 보고 꼭 당신에게 가겠다”(『오래전 집을 떠날 때』 5면)는 다짐에서 보이듯 신경숙에게 자기성찰은 세계로 섞여들기 이전에 먼저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길이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면을 형성해온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충실히 회복하고, 이런 회복의 과정에서 지배적인 관념을 해체하여 사실의 벌거벗은 직접성에 다가가기 위해 언어의 극한까지 시도하는 것, 그렇게 새롭게 형성된 세계가 던져주는 미적 감동을 통해 독자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것이 신경숙이 작품과 산문 들에서 피력해온 문학의 가능성이다. 이름을 잃어버린, 기존의 언어 안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저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하는 기도(企圖)는 일상의 지각 속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은폐되어 있는, 확실히 느껴지지만 쉽사리 말로 포착되지 않는 비의(秘意)적 감정들을 거쳐 삶의 심층에 도달해야 한다는 문학의 ‘해결될 수 없는 과제’(aporia)와의 대결이며, 실로 최고의 문학만이 수행해낼 수 있는 과제에 대한 도전이다.

 

 

3. 세계의 상실

 

『외딴 방』 이후의 신경숙 소설들에서도 상실로서의 세계경험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내면에서 세계와의 화해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는 『외딴 방』이 수행해낸 치유의 효과와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은, 나,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외딴 방』 2, 234면)고 말할 수 있게 된 나는 “내 가슴에 소망스런 다른 이야기들이 이렇게 솟아나고 있”(같은 책 255면)음을 인식한다. 일체의 저항을 무력하게 하던 위력적인 고통이 극복되자 비로소 자아는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소망은 시간을 상실이 아니라 축적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과 맥락을 같이한다. 물리적인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을 향해 흐르지만, 꿈과 육체가 “사라지고 낡아가면서 남겨놓았을, 생에 새겨놓았을 비밀”(『아름다운 그늘』 41면)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실의 시간이 동시에 축적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를 향한 노력은 삶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내면적 시각의 변화에 의존하며, 따라서 화해는 내면에 제한되어 있다. 이렇게 현실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분열이 상상 속에서 조화와 화해로 이끌어질 때, 꿈은 가상적 구원을 통해 현실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 예술은 세계를 향한 집요한 관찰이 아니라 세계 바깥에서의 위안이 되며, 이런 예술은 앞서 언급된 문학의 가능성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지속적인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식과 이에 기인한 인식의 집요함이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 고통을 상실할 때 글쓰기는 현실과의 긴장을 잃고 자족적으로 되며, 심미적 체험은 자기목적적으로 자신을 향유하게 된다. 따라서 분열과 통합, 고통의 원심력과 화해의 구심력의 상관관계는 『외딴 방』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에 대한 관찰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측면이다.

『외딴 방』 이후 상실이 화해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환상이다. 문학에서 환상은 현실 바깥에 명백히 공상적인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경우에는 지배적인 현실관념의 안정성을 교란하고 허약한 인간실존에 대한 억압된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때 환상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훈육된 관습적 의식의 벽을 뚫고, 윤색되지 않은 인간조건의 사실성을 폭로하며, 일체의 믿음을 와해하고, 세계를 수수께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근본적인 회의의 시선을 회복시킨다. 충격과 경악은 환상이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미적 효과들이다.

그러나 『외딴 방』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에서 환상적 요소는 대개 기존관념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불안보다는 운명과의 화해를 통한 안정을 낳고 있다.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에서 죽은 소녀의 영혼은 불면에 시달리던 나를 깊은 잠에 빠뜨리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마당에 대한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그를 체념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딸기밭』)에서도 딸은 죽은 지 2년 후 집을 방문하여 부모를 화해시켜준다. 「작별인사」(같은 책)에서는 죽음 저편의 영혼이 화자로 된다. 죽음은 아직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산 자를 관찰하고 산 자를 구출해주기도 하는 영혼은 죽음의 절대적인 낯섦과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절망을 덜어준다. 강한 생명력을 보이던 「그가 모르는 장소」(같은 책)의 향어는 호수 바닥에서 편안한 기분에 젖어 있는 그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이는 현실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를 암시하고 있다.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그녀 방의 오누이와, 이들이 변신한 모습인 빈집의 백조 역시 죽음의 분위기에 집착하는 그녀로 하여금 현실에 충실해야 하겠다는 반성을 하게 한다. 또한 정정한 몸으로 자신의 죽음의 싯점을 미리 예감하고 담담하게 죽어가는 「그가 모르는 장소」의 옆집 할머니나 「작별인사」의 홍의 아버지도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같이작가는 환상의 힘을 빌려 삶과 죽음에서 폭력성을 제거함으로써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 성질의 설화 역시 환상의 개입을 수월하게 한다. 신경숙은 전설의 미적 효과를 『외딴 방』 이전에도 이미 자주 활용해왔다. 「그 여자의 이미지」(『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사팔뜨기와 미자의 사랑, 「저쪽 언덕」(같은 책)에서 금식이의 아가씨에 대한 사랑, 작품 전체가 전설적인 「새야 새야」(같은 책)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막막한 운명적 분위기와 처연한 슬픔의 서정을 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설적 설화 자체는 『외딴 방』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로는 볼 수 없지만, 비극적 서정의 강렬함을 확보하기 위해 사건의 초기상황을 이상화하는 경향은 『외딴 방』 이후 강화된다. 사랑하는 남녀는 「벌판 위의 빈집」에서는 “전설 같은 그런 기쁨”(『오래전 집을 떠날 때』 64면)을, 「전설」에서는 “조금의 불순물도 없이 세상과의 완전한 결합을”(같은 책 240면) 느낀다. 이로써 그후에 발생하는 추락의 낙차가 극대화된다. 이런 작품들에서 작가는 신빙성의 구속에서 벗어나 보통의 현실경험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이 기도하는 서정을 고양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전체 세계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주술적으로 활성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수확의 댓가는 자기목적화한 서정의 공허함이다. 극도로 이상화된 가족의 몰락은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동어반복에 그치므로, 삶의 진실에 대한 깊이있는 접근으로 보기 어렵다.

신경숙 소설이 삶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측면은 이국성의 활용이다. 신경숙 소설에서 빈번히 내면의 투사막으로 기능하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것 역시 사실성의 구속에서 벗어나 대상을 주관의 감상과 관념에 따라 자유롭게 채색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의 “노르웨이의 트롬쇠”(『풍금이 있던 자리』 255〜56면)나 “라인홀트 메스너”(같은 책 251면), 그리고 외국의 여러 예술가들이 그런 대상에 속한다. 「빈집」(『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스페인과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페루, 「작별인사」의 칠레 등 『외딴 방』 이후 작품에서도 이국성이 자주 활용되고 있다. 이국성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는 「오래전 집을 떠날 때」에서의 페루는 소박함을 지닌 채 몰락하는 고향의 모습 속에 초합리적인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자아의 내면이 투사된 이런 이국성은 세계의 적대성을 내면 안에서 약화시킬 수 있게 해주지만, 이는 자아를 실제의 현실로부터 더 견고하게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세계를 향한 이런 감정이입은 자신의 현재에 대한 천착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찰로부터 우리는 신경숙의 소설들에서 세계와의 화해 의지가 자아와 현실 사이에 미적 상상력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로 나아갔으며, 화해는 사실상 이러한 미적 상상력의 세계와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볼 때 「그가 모르는 장소」의 아내와 「그는 언제 오는가」(『딸기밭』)의 서미란은 신경숙의 소설에서 새롭게 나타난 인물유형들이다. 「그가 모르는 장소」의 아내는 사랑에 대한 소망의 좌절에 젖어드는 대신 금지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상황과 싸움으로써 이 금지를 이겨내고 있다. 신경숙의 이전 작품들에서 혼외의 사랑관계가 항상 좌절과 순응으로 끝났던 반면, 여기서 아내는 운명을 수긍하지 않고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장소”(『딸기밭』 136면), 즉 자신의 집을 쟁취해낸다. 「그는 언제 오는가」의 서미란 역시 자아에 대한 운명의 절대적인 명령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살을 함으로써 운명에 앞서 행동한다.

이런 인물들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한편, 신경숙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 상실을 두려워하여 세계를 피하는 사람들이 이제 비판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모르는 장소」의 아내는 “당신은 상처받기 싫어서 누구하고도 깊은 관계를 안 맺어요”(같은 책 104면)라고 남편을 비판하는데, 「그는 언제 오는가」의 서미란 역시 “상처받을까봐 미리 다 피하겠지”(같은 책 279면)라고 언니를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이전 작품세계에 대한 신경숙 자신의 비판으로도 읽힌다. 「그가 모르는 장소」의 아내는 남편이 박살낸 유리문 조각에 발바닥이 찔린다. 『외딴 방』의 내가 쇠스랑에 발바닥이 찍히고는 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과 달리 아내는 남편에게 눈을 꾹 감고 뽑아버리라고 외친다. 희재의 죽음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이런 모습은 신경숙이 이제 자신을 보는 작업을 끝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거절하겠어”(『딸기밭』 269면)─이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결권과 세계 안에 내 집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이는 세계가 상실뿐만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기도 하며, 그런 생성의 과정에 대한 자아의 자율성과 책임을 감당해내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동시에 내면 안에서의 가상적 화해에 침잠하는 것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단을 수행하고자 하는 자유는 세계와의 현실적 대립을 피할 수 없으며, 이 대립에서 자신을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계의 구체적 인식을 위한 부담을 외면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런 결단의 주체가 개별성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성을 얻고자 한다면, 세계가 만인의 집으로 되지 않는 한 세계와의 화해를 유보해야만 한다. 자유가 그러하듯 집으로서의 세계도 주체가 생장하는 한 어떤 최종적 안정에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남을 것이며, 그러는 한 앞서 서술된 최고의 과제에 충실하고자 하는 문학은 세계와의 불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신경숙의 작품들에서 저 선언이 드러낼 귀결들에 주목해본다.

 

 

  1. 이 글에서 살펴볼 신경숙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후로 인용출처는 본문에 책 제목과 면수로만 표시한다. 『강물이 될 때까지』(소설집), 문학동네 1998; 『풍금이 있던 자리』(소설집), 문학과지성사 1993; 『깊은 슬픔』 상·하(장편), 문학동네 1994; 『아름다운 그늘』(산문집), 문학동네 1995; 『외딴 방』 1·2(장편), 문학동네 1995; 『오래전 집을 떠날 때』(소설집), 창작과비평사 1996; 『기차는 7시에 떠나네』(장편), 문학과지성사 1999; 『딸기밭』(소설집), 문학과지성사 2000. 앞의 작품 중 『강물이 될 때까지』는 『겨울 우화』(고려원 1990)의 수정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