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에르베 기베르 『유령 이미지』, 알마 2017

사진의 음화, 이미지 없는 사진론

 

 

양효실 梁孝實

미학자 hosil69@naver.com

 

176_4961984년 프랑스에서 푸꼬(M. Foucault)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암으로 공표되었다. “마드리드나 쌘프란시스코 혹은 빠리의 어둑한 광란의 게이 전용 사우나를 들락거리던” 푸꼬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은 사생활을 보호하는 프랑스의 문화적 관습과 살아생전 푸꼬의 소원대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1977년부터 1984년까지 거의 매일 푸꼬와 만났던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 1955~91)는 그로부터 6년 후인 1990년에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라는 오토픽션(autofiction)을 출간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인 무질은 누가 봐도 푸꼬였다. 채찍과 수갑이 등장하는 변태적 섹스(SM)에 몰입한 무질이 죽기 전 몇달간의 모습을 역시나 에이즈에 걸린 ‘나’와의 관계하에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자서전소설로 인해 프랑스 사회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1991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근 1년간 기베르는 언론과 매체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죽음·노화·‘질병’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말과 글, 영상을 수없이 주류사회로 밀어 넣었다. 푸꼬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려 했던 기베르, 자기고백이 곧 자기모욕이었던 작가의 실천에서는 불가피한 디테일이었다. 기베르는 심지어 죽어가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담은 영상을 1992년 TV에 방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죽음마저도 (자기)작업의 일부로 재배치했다.

1977년 쎄르주 두브로브스끼(Serge Doubrovsky)가 『아들』을 출간하면서 처음 사용한 ‘오토픽션’은 자서전과 소설을 오가는 혼종적 글쓰기로, 이제 프랑스에서는 문학의 한 범주이자 장르로 안착했다. 저자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관습으로서의 자서전의 ‘나’는 자아의 타자성, 자아의 허구성을 이야기한 라깡( J. Lacan)의 정신분석이나 주체의 죽음을 이야기한 바르뜨(R. Barthes)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등장과 함께 해체되기에 이른다. 자서전이 픽션으로 수렴될 때, 즉 자아의 진실 말하기에 대한 강박을 타자의 허위 꾸며내기를 향한 욕망이 압도할 때, 또는 기표가 기의에서 미끄러지고 은유적 수렴보다 환유적 확산이 분출할 때 ‘글쓰기’는 생산이 아닌 쾌락에, 위반적 향유에 바쳐진다. 오토픽션은 소수자문학이고, 글쓰기(écriture)이다. 1968년 바르뜨가 『저자의 죽음』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망가는 이 중성, 이 혼성, 이 비스듬함, 즉 쓰는 몸의 정체성에 의해 시작하기 위해 모든 정체성이 사라지러 오는 흑백이다.” 오토픽션이건 글쓰기이건 소수자문학이건 결국 이 새로운 혹은 ‘다른’ 예술은 진실권력을 보유한 주체의 존재론을 해체하려고 지금도 계속 밀려오는 주변부적 삶의 현시이고, 분열적 몸쓰기이다.

36살에 죽은 기베르는 25권에 달하는 온갖 스타일의 글, 사진, 영상을 남겼다. “시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방식은 노동”이라며 엄청나게 쓰고 찍었던 기베르는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르 몽드』에 사진에 대한 칼럼을 썼다. 그가 26살에 쓴 『유령 이미지』(Limage fantôme, 1981, 한국어판 안보옥 옮김)는 무엇보다 사진비평 혹은 사진에세이이다. 『유령 이미지』는 그보다 1년 전에 나온 롤랑 바르뜨의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한국어판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를 의식하면서 쓰였다(프랑스에서 『카메라 루시다』와 『유령 이미지』는 일인칭으로 쓰인 최초의 사진론으로 간주된다). 주지하다시피 『카메라 루시다』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바르뜨의 사적 경험을 축으로 전개되지만, 상실된 어머니라는 대상을 ‘되찾게’ 해준 사진, 다섯살이었을 때의 어머니의 사진, 흔히 ‘온실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은 정작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나의 내면의 법규”였던 어머니와 바르뜨가 맺은 기이한 관계는 어떤 기성의 어머니나 가족으로 환원 불가능한 단수성을 갖기에 바르뜨는 독자로부터 그 사진을 감췄다. 기베르의 『유령 이미지』의 ‘핵’은 역시 어머니를 찍었지만 18살 소년의 미숙함 때문인지 감겨 있지 않은 필름 때문에 현상되지 못한 이미지, 또 그 실수/실패를 만회할 기회가 다시 왔을 때에는 일부러 찍지 않은 사진이다. 기베르는 뷰파인더로 보았지만 사진의 존재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 이미지, 이 “사진의 음화”, 이 없는 이미지의 ‘존재’를 오직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서만 입증하고 증언한다. 또 그런 이유로 『유령 이미지』는 사진론임에도 단 한장의 사진도 등장하지 않은 채로 존립한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기계”인 카메라로 찍히고 현상되어 벽에 걸린 사진을 놓고 기베르는 “완벽하고 거짓된 이미지, 비현실적인 이미지”라고 일갈한다. 아예 찍히지 않은 이미지를 축으로 사진 이미지를 뺀 채 전개되는 사진비평문을 읽는 것은 그러므로 모호함, 환각, 상상력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진다. 비평이란 게 작품으로서의 예술지시체를 보충, 보완하는 것이라면 이 대상 없는 비평, 이미지 없는 글쓰기는 그 사진, 혹은 그 이미지를 보려는 우리의 욕망을 강화시킬 게 뻔하다.

나는 서평을 써야 하지만 지금 나는 책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 혹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환각, 명상, 환영, 상실, 죽음, 사랑, 유혹, 기억과 같은 사라짐을 위한 은유들이 이 책을 지탱하기 때문이고 앞서 바르뜨가 지적한 것과 같이 “모든 정체성이 사라지러 오는 흑백”의 경험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장들, 가령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가 그 감동의 추억 전체를 희미하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포괄하고 잊어버리는 행위이지만 반면에 글쓰기, 그것은 차단시킬 수 있을 뿐이며 쓸쓸한 행위이기 때문이다”(29면)라든지, “사람들은 가족사진의 존재 이유가 추억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가족사진은 추억을 대신하는 이미지들과 추억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후손들에게 이런 흔적을 남기겠다는 어렴풋한 희망 속에서 한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 떠돌게 하는, 일종의 품위 있고 교체 가능하며 평탄해진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30면)라든지, “나의 욕망은 가족의 범주 속에 불청객처럼 억지로 끼어든 인물들에게로 향한다”(65면) 같은 문장들은 이미지로 뒤덮인 지금 이곳의 냉기, 편평함, 뻔뻔한 ‘가족주의’를 재고하게 한다. 또 일견 피그말리온의 신화를 상기시키면서도 사실과 환각, 망상이 뒤얽혀 있는 사건을 묘사한 62번째 항목 ‘암환자 같은 이미지’는 글쓰기가 일으킨 실재를 우리 앞으로 가져온다. 모르는 소년의 사진에 대한 기베르의 ‘사랑’은 결국 사진에 살을 입히고 마침내 그의 몸이 되는 신화를 완성한다. 책의 말미에 해설을 단 김현호의 지적처럼 “어느 것 하나 바스라질 듯이 예민하고 날카롭지 않은 것”(225면)이 없는 책이다. 굳이 이 책을 지금 읽는 것의 시의성을 지적한다면, 소수자들의 각성 혹은 자기발견이 중심의 존재론을 반복하는 쪽으로 움직일 때 더 많이 사라짐, 더 많이 희미해짐을 이야기한 기베르의 글쓰기를 읽는 것의 ‘의미’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