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7회

술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을 때가 기억났다. 담배를 생각하자 세 들어 살던 남자한테 훔친 지포라이터도 생각났다. 그는 그 라이터를 십년도 넘게 가지고 다니다가 친구들과 바닷가로 놀러 갔다가 잃어버렸다. 친구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는데 그때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가 빠진 것이다. 그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현관 옆에 방을 하나 세놓았다. 그곳은 원래 연탄 창고 자리였는데 몇해 전에 가스보일러로 바꾸면서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곳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동네에 건축 붐이 일었다. 낡은 집을 부수고 다세대주택을 지어 세를 놓는 게 유행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새 집을 짓는 대신 창고 자리에 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되도록이면 신혼부부에게 세를 놓으면 좋겠다고 부동산에 말했지만, 라면이나 겨우 끓일 정도로 좁은 부엌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은 신부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화장실도 재래식이었다. 처음으로 세를 든 남자는 페인트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대문을 초록색에서 파란색으로 바꿔준 사람이다. 고향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사촌 형이 소개해준 갈비집에서 일하려고 고향을 떠난 지 육년이 되었다고 했다. 남자는 갈비집에서 삼년 정도 주방보조일을 하다 군대에 갔는데 경력 덕분에 취사병이 되었다. 파와 양파를 썰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게 남자의 큰 장기였다. 자기소개를 할 때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남자는 이병 시절에 양파만 썰었다. 너도 나중에 군대 가거든 잘하는 걸 말하면 안 된단다. 잘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어야 해. 알았지? 남자는 그에게 말했다. 남자가 이병에서 막 일병이 되었을 때 주방 대청소를 하게 되었다. 남자가 맡은 일은 벽을 새로 칠하는 거였다. 이병 세명을 데리고 페인트칠을 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페인트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 말은 갈비집에 남자를 추천해주면서 사촌 형이 한 말이기도 했다. 먹지 않는 사람은 없어.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식당은 없어지지 않아. 그는 페인트칠을 하면서 십년 후 페인트 대리점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색색의 페인트 통이 가득 쌓여 있는 가게에 앉아 장부정리를 하는 자신을 상상해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삶 같았다. 남자는 요리사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한번도 식욕이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를 하고 페인트 회사에 들어갔단다. 남자는 대문을 칠하면서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두번 놀랐다. 하나는 꿈이 너무나 소박했기 때문이었다. 큰 꿈을 안고 페인트 회사의 영업사원이 되었다면 적어도 최종 목표는 페인트 회사의 사장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인트 대리점이라면 찻길 건너에도 하나가 있고 학교 앞에서 하나가 있었다. 둘째는 장래희망이 페인트 대리점 사장인 사람치고 페인트칠을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페인트를 바닥에 흘릴 때마다 그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난 신입사원이잖니. 게다가 영업사원이고.

두번째로 세 든 남자는 잠자기 전 삼십분씩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는 그 노래를 듣는 걸 좋아했다. 남자가 아는 노래를 부르면 그는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남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남자가 노래를 부를 때면 창을 열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시끄러 죽겠어. 동네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어머니는 세달 만에 남자를 내보냈다. 세번째로 세 든 남자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고 했다. 남자의 방에는 몇권의 시험 문제집이 있었는데 살짝 펼쳐보니 밑줄을 안 그은 데가 없었다. 밑줄은 중요한 데 긋는 게 아닌가.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가 시험에 합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종종 남자의 방에 누워서 만화책을 보았다. 남자는 토요일 저녁이면 만화책을 가득 빌려오곤 했다. 주말은 쉬어야 한다는 게 남자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려 하는 것이라고. 남자는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불을 개지 않았다. 이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는데, 그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거기 누워 만화책을 읽고 있으면 삐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범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량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학생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런 냄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라면을 잘게 부숴 죽처럼 끓여주었다. 생긴 것보다 맛있었다. 라면을 왜 이렇게 먹어요? 하고 물으니 젓가락질하기 싫어서라고 남자가 대답했다. 그 라면을 먹으면서 그는 확신했다. 젓가락질도 하기 싫은 사람이 시험에 합격할 리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남자는 시험에 합격했고 합격한 날 그에게 통닭을 사주었다. 네번째로 세 든 남자는 주말에만 집에 왔다. 남자는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그는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남자. 한번은 남자가 오토바이를 태워주었다. 겨울이었다. 바닥에 쌓여 있는 눈이 날려 얼굴을 때렸다. 그는 콧물이 나서 남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자의 등은 넓었다. 너 내 등에 콧물 닦았지. 남자가 달리면서 소리쳤다. 미안해요. 그도 소리쳤다. 남자는 짐을 놔둔 채 사라졌다. 두달이 지나고 세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계약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형이라는 분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용달기사가 짐을 빼러 왔다. 형이라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는 용달기사를 도와 남자의 짐을 라면박스에 담았다. 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 그는 짐을 싸다가 지포라이터를 훔쳤다. 용달기사가 그가 남자의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걸 봤지만 모른 척했다. 지포라이터에는 해골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라이터를 사용하고 싶어서 담배를 샀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담배에 불을 붙여보고 싶어서. 그는 담배 한갑을 다 피워본 후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걸 가지고 다니면 어렸을 때 잃어버렸던 허리띠가 생각났고, 그때처럼 라이터를 만지기만 해도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셋방에 살았던 그 남자들을 그는 형이라고 불렀다. 주중에 이사 왔던 고시생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일요일에 이사를 왔다. 그는 그때마다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왔다. 그러면 남자들은 점심으로 짜장면 두그릇을 배달시켰고, 짜장면을 먹는 그는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이라고 불러라. 그는 누군가 이사를 오면 마음이 설렜다. 저 형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그들의 자취방에서 라면을 얻어먹고, 군대 이야기를 듣고, 실연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셋방에 드나들면서 드라마 보는 일을 멈추었다. 대신, 그들이 험담을 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곤 했다. 왜 그리 부하들을 괴롭혔을까? 왜 말없이 떠났을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과거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폭력적인 아버지. 일찍 죽은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 근사한 상상을 하고 싶었지만 결론은 늘 비슷했다. 상상력은 빈약했고, 그래서 그는 부끄러웠고, 어느 날 밤에는 자신이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